한가로운 휴일 오후, 엄마와 아빠는 다정하게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즐기고 있다. 태연, 그 옆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러나 아무리 힐끗거려도 엄마 아빠는 전혀 커피를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 향기로워라~~. 그 누가 커피를 신의 축복이라 했던가! 커피를 즐겨 마시는 내 친구 말자와 순자는 축복을 받은 것들이로다. 고것들이 달달한 커피믹스를 컵에 넣고, 뜨거운 물 붓고, 봉지로 살살 저을 때 풍겨오는 그 향긋한 향은 나를 복장 터지게 한다네. 아아~~ 나는 불행한 여인, 커피를 금지당한 슬픈 종달새~~.”
“백날 노래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다량의 카페인은 칼슘과 철분 흡수를 방해한단다. 키 크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야, 알겠니? 안 그래도 무척이나 짤따란 너의 기럭지에 악영향을 줄 수 없어서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거니까, 아빠의 깊은 뜻을 좀 헤아려 주렴. 그리고 커피믹스 봉지로 커피를 저어먹는 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야. 네 친구들한테도 꼭 얘기해주도록 해.”
“흥! 친구들까지 커피를 못 먹게 해서 커피를 향한 나의 강렬한 욕망을 막고자 하시는 거, 다 알거든요?”
“전생에 꽈배기 공장을 다녔나, 얘가 왜 이렇게 배배 꽈서 듣니? 진짜라니까! 커피믹스 봉지로 뜨거운 커피를 저을 경우, 인쇄면에 코팅된 플라스틱 필름이 벗겨져 인쇄 성분이 커피에 녹아들어갈 수도 있단다. 커피와 함께 인쇄성분까지 마실 수 있다는 얘기지. 또 커피믹스 봉지의 절취선 부분에는 소량의 납 성분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저으면 납까지 마시는 게 되는 거라고.”
“엥? 진짜요? 그럼 말자랑 순자가 지금까지 인쇄성분이랑 납을 마셔왔던 거예요? 어쩐지 애들이 날이 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진다 했어.”
“커피믹스 봉지는 한 겹의 필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겹의 화학수지로 만들어진 다층포장재란다. 커피믹스뿐만 아니라 과자·라면·만두·케첩 등의 포장재는 다양한 환경으로부터 식품을 보호하기 위해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에틸렌(PE), 폴리아미드(PA),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PET), 알루미늄박 등 2~3겹 이상의 필름을 합쳐 만들지. 즉석카레 같이 끓는 물에 데워서 먹는 식품은 내열성, 차광성, 산소차단성 등을 고려해서, 또 냉동만두 같은 제품은 영하의 저온에서 충격을 받아도 찢어지지 않도록 한 거지. 또 토마토케첩 같은 소스류는 산화되거나 냄새가 나지 않도록 다층포장재로 만든단다.”
[그림]커피믹스 봉지가 다층포장재로 구성된 이유는 각각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자료 제공 : 식품의약품안전청 “아~ 그랬구나. 그런데 혹시 여러 겹을 붙인 거라서 몸에 더 해롭고 그런 건 아니에요? 환경호르몬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겠죠?”
“에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다층포장재를 구성하는 재질 중에서 식품 접촉면에 사용되는 재질은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인데, 여기에는 가소제 성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호르몬(DEHP, 인성 내분비 교란물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단다. 다시 말해 포장재 성분이 네 몸에 흡수돼 너의 정상적인 호르몬 작용, 즉 내분비 작용을 방해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야.”
“휴… 다행이에요. 근데 말자는 라면봉지에 뜨거운 물 넣고 그냥 먹기도 하던데, 그것도 괜찮아요?”
“아빠도 군대 다닐 때, 일명 뽀글이 라면이라고 해서 뜨거운 물 붓고 그렇게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라면 봉지의 내면도 주로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 재질로 돼 있어. 때문에 뜨거운 물을 붓는 정도에서는 환경호르몬이 방출되지는 않지만 뜨거운 물 때문에 라면 봉지가 찌그러져 밖으로 흘러나오면 손이 데일 수 있다는 점~ 앗 뜨거, 하면서 봉지를 놓치면 발까지 데일 수도 있다는 점~ 그럼 병원에 가야 한다는 점~ 등은 생각해야지.”
“뽀글이 라면을 먹어도 된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거예요? 답답해 정말. 게다가 아빠의 개그맨 따라 하기는 정말 재미없다는 점~~.”
“당연히 100% 안전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거지!
라면 봉지는 내용물의 변질을 막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거니 꼭 냄비에 끓여먹도록 해라. 혹시라도 아빠 몰래 뽀글이 라면 해 먹으면 네 머리를 뽀글이 아줌마 스타일로 만들어줄 테니깐.”
“그런데 아빠, 완전 궁금한 게 있어요. 그렇게 포장재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신 분이, 왜!! 사랑하는 딸의 포장, 즉 얼굴 피부는 이렇게 형편없이 만드신 거죠? 제 볼떼기를 보시라고요. 우둘투둘 이건 흡사 악어 등껍질의 그것과 같은 느낌이라고욧!”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더러운 손으로 여드름을 쥐어짜는 너에게 물어야지. 세상에 그 어떤 좋은 포장재도 더러움 앞에서는 견딜 수 없다는 점~~~.”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