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집은 사랑의 길이 써준 시의 집이다. 바람 부는 들길을 지나 해질녘에 찾아든, 따뜻한 새집. 속눈썹이 떨렸던 날들...... 그 연애의 기록이다." -표지앞날개쪽
자서(自序)
사랑은 떠나고 빈집에서 나와 노래한다.
사랑 말고 우리가 노을 아래 엎디어 울 일이 또 무엇이 있을꼬. 어느 날의 일이었던 사랑이여! 또 어떤 날의 이별이었던 노을이여! 삶이 어찌 그것들을 다 이기겠는가.
2011년 가을 김용택 --1쪽
처음 본 날
처음 본 날 웃었지요. 먼 데서 웃었지요. 가만가만 웃었지요. 꽃잎 내린 강물처럼 잔물결이 일었지요. 발밑에서 일었지요. 날리는 꽃잎처럼 발길에 밟혔지요. 한 잎 한 잎 또 한 잎 뚝 뚝 떨어져 내 눈에 밟혀서 오! 봄이여! 꽃구경 가다가 날 저물어 길 잃고 나는 너를 얻었네. -15쪽
속눈썹
산그늘 내려오고 창밖에 새가 울면 나는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고 두 눈에 그대가 가득 고여온답니다. -16쪽
그 꽃집
그대가 가만히 바라보는 그 꽃이 나여요. 그 꽃이 나랍니다. 웃어주세요. "여긴 사람이 없네." 그 강길 호젓한 산길 모퉁이 돌아서며 입 맞출 때, 눈이 감겨오던 그때, 물에 내리는 물오리 소리 가만히 들렸지요. 사랑합니다. 그대가 지금 가만히 바라보는 그 꽃이 나랍니다. 그 꽃집에 그 꽃들
웃어주세요. -17쪽
꽃
꽃은 피어 있는데 피는 걸 누가 보았답니까. 꽃이 졌는데 지는 걸 누가 보았답니까. 아무도 못 본 그 꽃 -25쪽
입맞춤
달이 화안히 떠올랐어요. 그대 등 뒤 검은 산에 흰 꽃잎들이 날았습니다. 검은 산 속을 나와 달빛을 받은 감미롭고도 찬란한 저 꽃잎들 숨 막히고, 어지러웠지요. 휘황한 달빛이야 눈 감으면 되지만 날로 커가는 이 마음의 달은 무엇으로 다 가린답니까. -38쪽
배반
봄이 와 있다. 잔디밭에 봄이 와 있다. 어, 어, 저것 봐! 저 햇빛 좀 봐! 매화가지 끝에 꽃망울이 터지잖아? 내가 나를 배반할 것 같은 봄이
나는 무섭다. -43쪽
보름달
달이 밝습니다. 어제가 보름이었지요. 행복합니다. 이렇게 밝고 큰 달을 다 차지하고 혼자 볼 수 있어서요.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아 좋습니다. 늘 그리운 사람 있습니다. 힘이 들 때, 보고 싶은 사람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46쪽
문득
햇살 좋고 바람 붑니다. 꽃 피겠네요. 남쪽으로 멀리 떠나고 싶네요. 보고 싶답니다. -57쪽
통영의 밤
당신은 싱그러움을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지요. 살아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감동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랍니다. 늘 죽지 않는 감성, 세상에 대한 관심, 예술에 대한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그리는 지치지 않는 영혼을 가진, 예술을 품은 가슴은 빛납니다. 예술은 손에 잡힌 현실이 아니고 온몸에 스며들게 하는 현실이지요. 나는 스며드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느끼고 스며드는 것들은 떼어낼 수 없습니다. 꽃이, 바람이, 봄비가 세상으로 스며들 듯이 나는 당신에게로 스며들고 싶었지요. 지치지 않는 사랑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한 끝이 없는 방황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좁은 골목길 사람들 틈에 꽃잎처럼 날아든 당신의 얼굴, 나는 떨렸습니다. 아름다운 골목이었습니다. 당신은 배우처럼 빛이 났지요. 떨리는 사랑을, 세상을 향한 그리움을...... 당신은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 비릿한 골목의 불빛들, 그 불빛 속의 사람들을...... 나는 기억하게 되었답니다. 봄바람 부는 거리에 꽃잎처럼 날아온, 그대 얼굴을, 그 그리운 통영의 밤을. -78쪽
바람
바람도 없는데 창문 앞 나뭇잎이 흔들리네요.
나를 안아주세요. -80쪽
오월
연보라색 오동꽃 핀 저 화사한 산 하나를 들어다가 "이 산 너 다 가져" 하고 네 가슴에 안겨주고 싶다. -85쪽
감잎
마른 감잎처럼 바스락거립니다. 세상이 이리 넓은데 앉을 곳도 서 있을 곳도 없습니다.
당신은 어디 있나요.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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