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구판절판


삐쩍 마른 저 사내와, 그에 앞서 걸어가는 역시 삐쩍 마른 소의 메마른 몸뚱이가 눈길을 잡는다. 질박한 노동의 결이 보이는 뒷모습이다.
그가 지고 있는 쟁기가 마치 십자가처럼 보인다. 그의 노동이 마치 형벌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연상 때문일 것이다.

풍성한 머리칼의 금발과 아주 특이하게 머리를 꼬아 세운 흑발의 대조가 재밌다. 어릴적에 언니는 내 머리카락을 아주 다양하게 연출해주곤 했다. 엄마가 바쁘셔서 언니 머리를 챙겨주지 못해 늘 짧은 단발로 살아야 했던 것에 대한 억울함이 가져온 반응이다. 덕분에 내 헤어 패션은 아주 다채로웠지만 언니의 억센 손길에 머릿살이 다 튀어나오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
친구 역시 울 언니처럼 어려서 못해본 다양한 머리 스타일에 대한 한풀이가 있다. 그래서 아주 길고 숱많은 머리카락을 엄청난 공을 들여서 유지하고 있다. 친구의 로망은 요정 핑크의 성인 버전 머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벌써 10년 이상 말리고 있다.

패션쇼장에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는 모델의 뒷모습이다. 벗은 상체와 속옷이 비치는 하의가 무척이나 에로틱하게 보인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쓰지 못할 만큼 바쁜 와중에 모델의 프로 의식이 느껴진달까...

아이를 업는 방법이 문화권마다 다르다. 우리나라도 사진 속 홍콩 여자처럼 포대기를 쓰지만, 쓰지 않는 문화권도 많다고 알고 있다. 어깨에 오는 무리를 생각하면 저리 매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은데 아이 다리 휘지는 않는지 걱정이다. 많이 업어주면 안짱다리 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말이다.

고기잡이 아낙이 어찌나 섹시해 보이던지, 수평선을 배경으로 선 그녀의 뒷모습에서 여성미가 물씬 느껴진다. 우리의 어머니 해녀들도 젊어 고왔을 적에는 저런 뒷태를 가지셨을 것 같은데, 옷차림에서 오는 이미지의 차별화가 좀 커보인다.

할머니의 굽어진 허리의 각도가, 짚어낸 지팡이의 각도가 생의 무게처럼 다가온다. 고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남겨진, 온전히 감내해 낸 진솔함을 느낄 수 있다.

흰 대리석 남녀 한 쌍의 조각 저 앞으로 어깨를 감싸 안은 한 쌍의 연인이 보인다. 곧은 길과 높이 솟은 나무 사이에 두 쌍의 연인이라니... 각도가 그야말로 예술이다. 저 대리석 연인이 앞의 연인들을 수호해주는 것만 같다.

급작스레 찾아온 물을 향해 일제히 엎드린 아이들의 갈증이 사진 속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물을 축이는 입술은 또한 물을 향해 경건한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도 읽혀진다.

창턱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햇볕을 즐기고 있다. 바람은 살랑거릴 것이고 꽃향기도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온전히 시간과 장소를 지배하고 주인 행세하는 고양이의 여유가 아름답고도 부럽다.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근사한 사진이다. 여체의 아름다움만 얘기한다면 작년 섣달 그믐날에 보고 온 '칼 라거펠트 전'의 누드사진이 더 훌륭했었다. 그렇지만 이 사진이 주는 황홀감은 곡선의 미학이다. 목에서 등, 그리고 가슴의 선들이 신의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오늘 본 영화 '맨 온 렛지'에서 등장인물 하나는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움직이는 예술품'이라며 몸매를 극찬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사진 속의 여인은 멈춰 있기에 더 고혹적인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홍콩 사진에서는 포대기에 아이를 업었지만, 인도의 이 여인은 허리춤에 받쳐서 아이를 안고 있다. 엄마의 팔뚝은 날로 굵어지겠지만, 결코 아이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가없는 시선이 느껴진다. 어머니를 상징하는 바다, 그 넓음에서 영적인 기운까지 흐른다.

우리가 신발 끈을 매려면 발을 계단 위에 올리고 하는데, 사진 속 발레리나는 발끝을 세워 끈을 조인다. 앞을 향하고 섰지만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역동적인 자세다. 드가의 발레 그림도 떠오른다.

이 책에 실린 가장 작은 크기의 사진이었지만 붙이지 않고 한 장으로 올려본다. 녹음이 짙은 여름날의 눈부심이 사진 밖으로까지 뻗어 있다. 이처럼 행복하고 태평한, 그래서 지나칠 만큼 부럽게 만드는 사진이다. 나란히 의자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저들의 시간이 근사하다. 오늘 하루 많이 애달팠던 내 마음에 제동을 걸어주는 사진이기도 하다. 조급해하지마. 기다림이 필요해...라고.

덧글)쪽수가 안 적혀 있어서 역자의 말 세번째 페이지라고 말해둔다. '너머'를 '넘어'로 적은 오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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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1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3-0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의 글과 함께 여기 실린 뒷모습 사진들 저도 참 좋아하는 책이에요.
뒷모습이 가슴에 들어오고 애잔하면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마노아 2012-03-02 08:3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꽤 오래전에 선물 받았는데 이제사 읽게 되었어요. 그런데 책 뒷면에 아주 큰 상처가 세 개나 있는 거예요. 며칠 전에 알라딘에 삐져 있었는데 화르륵! 열이 받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므로 별 방법이 없네요.^^ㅎㅎㅎ
이 책을 보면서 무사 백동수의 최민수 씨가 생각났어요. 돌아선 등만으로도 연기를 해내더라고요. 아, 그 절절함에 홀딱 반했어요. 뒷모습으로도 사랑을 표현하네요.

2012-03-02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2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지 2012-03-02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네요..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어서 하나 저장했습니다
어떤 사진인지는 비밀입니다

마노아 2012-03-02 08:36   좋아요 0 | URL
하핫, 어떤 사진인지 궁금합니다. 저도 오래오래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사진들이 있어요.^^

순오기 2012-03-0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 제목이 '뒷모습'이었네요~~~
여기 사진들은 하고 싶은 말을 침묵으로도 기막히게 보여주네요.^^

마노아 2012-03-05 18:19   좋아요 0 | URL
역설적인 제목의 책이지요? 뒷모습으로, 무언의 말로 많은 말을 전달한다는 게 참 벅차요.

2012-03-05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5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2-03-06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멋져요~~
저는 언젠가 바닷가에서 아빠와 아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하는 모습을 뒤에서 찍었는데 그 사진이 그렇게 마음에 들더라구요. 그 이후로는 바닷가에 가면 항상 부자들의 뒷모습을 담는 습관이...^^

마노아 2012-03-06 22:48   좋아요 0 | URL
아, 그림이 그려져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나중에 그 사진 들여다 보면 참 행복하게 느낄 것 같아요.^^

2012-03-07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2-03-07 16:0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