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 1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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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첫 소설로 이 책을 꼽은 것은 솔직히 드라마 때문이다. '성균관 스캔들'이 워낙 재밌어서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을 즐겁게 읽었다. 그리하여 새 드라마의 예고편에 바빠진 마음이 서둘러 책장을 펼쳤다. 때마침 컴퓨터 고장으로 책읽기도 좋은 나날이었다.

 

작품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다. 다만 연산군이 선대 왕이었고, 사림파를 쓰기 위해서 왕이 애쓰고 있는 중이니 조선 전기 정도로만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작품은 스물 세살의 젊은 임금 훤이 온양 행궁에서 몰래 빠져나왔다가 어느 집에서 비를 피하면서 시작한다. 그곳에 한 무녀가 있었고 임금임을 바로 알아보고 쉬어갈 자리를 마련한다. 왕은 한 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마음 깊은 곳 상처로 남은 첫사랑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그리운 난향이 났다. 그의 스승의 향기였고, 또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였던 난향.

 

작품은 시간을 8년 전으로 돌려 세자 시절에 만났던 인연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열다섯 세자의 스승으로 온 이는 열일곱 나이에 장원급제한 강직한 선비 허염이었다. 두살 차이 스승을 인정할 수 없어 앙탈도 부리고 심술도 부려보았지만 결국 백기를 든 훤은 도리어 스승의 정에 이어 친구의 정까지 나누게 된다.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엄친아 허염이 동생을 무척 아끼는 것을 알았고, 그 호기심이 결구 오고 가는 편지 속에서 연모의 감정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염의 동생 연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자는 열셋 어린 나의 연우 글씨에 기가 죽어 답장을 못 썼건만, 연우는 마음이 없어 그리한 줄 알아 섭섭했다. 그녀가 보낸 배추 심은 씨앗을 훤이 공들여 키웠고, 답장을 받기 위해 괜스리 배춧잎이 몇 장 나왔냐고 묻는 연우의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늦되어서 체격도 작고 얼굴도 작았던 세자는, 사랑에 눈을 뜨면서 부쩍 몸이 자라버렸다. 세자빈 간택 이야기가 나왔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우는 세자빈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책봉례를 다 치르기도 전에 큰 병이 들어 사가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열 셋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다. 세자와는 글만 나눴을 뿐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훤의 어린 시절은 모두 끝이 나고 말았다. 이 부분을 작가는 '문'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훤의 오열을 묻어 버리려는 듯 비현각의 문이 닫혔다. 비현각의 동쪽에 있는 구현문이 닫히고, 이모문이 닫혔다. 자선당의 정문인 이극문도 닫혔다. 사정문이 닫히고, 근정문이 닫히고, 흥례문이 닫혔다. 마지막으로 광화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거대한 무덤 속에 훤을 겹겹이 묻은 채로 모든 문이 닫히고, 세상은 순식간에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194쪽

 

잠깐 옥의 티를 지적하자면 여기서 '흥례문'을 '홍례문'으로 표기한 것은 살짝 실수라 하겠다.

 

훤과 연우가 편지를 나누면서 서로의 사랑을 키우는 장면은 독자의 가슴도 설레게 하는 예쁜 이야기였다. 그 예쁜 이야기가 이렇게 급작스럽게 비극으로 끝났다. 그런데 한 장이 끝난 이 다음 부분의 제목은 '열리는 문'이다. 극적인 대비고, 그래서 더 기대되는 전개일 수밖에 없다.

 

다시 8년 뒤로 돌아가 행궁에서 돌아온 경복궁으로 가보자. 훤은 궁에 돌아온 뒤로 다시 무녀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주고 온 이름 '월'이라는 이름만 남은 채 그녀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나 사실 월은 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왕의 액받이 무녀였던 월은 궁의 가장 북쪽 궁벽진 곳 성수청에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병이 깊은 훤의 액막이가 되어 곁을 지켰다. 약속했던 시간의 마지막 날, 훤은 별운검 제운의 기지로 월을 놓치지 않고 잡는다. 왕과 액받이 무녀라니,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건만 훤의 마음은 자꾸만 깊어간다. 의도하지 않아도 월에게선 자꾸 연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정인이지만 추억이 깃든 어떤 것들이 자꾸만 훤을 자극하고 만다. 훤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월과 연우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름조차 없던 그녀에게는 어떤 서러운 사연들이 깃들어 있을까. 명색이 로맨스 소설인데, 비극적일지언정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 주변의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훤과 함께 연우를 사랑했던 이복형 양명군과, 월을 사랑한 운검 제운. 또 허염을 사랑한 훤의 여동생 민화공주와, 염을 짝사랑했던 연우의 노비 설의 이야기 말이다.

 

가장 관심이 갔던 인물은 김제운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그림자 같이 살아온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은 본댁 마님이었던 박씨 부인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

제운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지금껏 해야 하는 일만 있었다. -425쪽

 

지금껏 눈치로만 살아온 여덟살 서러운 인생에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박씨 부인을 통해서 글을 배우고, 그녀의 추천으로 검을 배웠다. 빼어난 아이였고, 그래서 박씨 부인은 아이가 아깝고 가여웠다. 자신의 배를 빌어 나온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인이 운검이 되면 마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운검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으실 거다. 네가 되고 싶은 것이 운검이라면, 그래서 그것을 이룬다면 기뻐하실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검술을 좋아하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435쪽

 

자신을 알아준, 자신을 세상 속으로 꺼내준 이에 대한 보답이었다. 다행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검을 잡은 이 중에서 최고의 사내가 되었다. 승진에 제약이 있었지만 임금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무사가 되었고, 한 사람만으로 능히 임금을 지킬 수 있는 검객이 되었다. 입이 무겁고 차가운 표정만 지을 줄 알던 이 사내에게도 연정이 찾아왔다. 그것이 월이었다. 그녀는 임금의 여자였다. 이러니 이 사내가 '비운의' 서브 주인공 역으로 딱이지 않은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도 이루지 못하지만 더 빛날 수 있는 캐릭터다. 아쉽게도. 드라마의 캐스팅은 이 부분에서 아직 답을 모르겠다. 성인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캐스팅 설명서의 사진으로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동원이나 김남일이 딱이지만, 그들은 국방의 의무를...;;;;;;

 

하여간! 2권에 가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제운이 박씨 부인에게 준 가장 큰 효도 때문이었다. 서자를 구박하는 본댁 마님의 구도에만 익숙한 우리인데, 그 서자를 친자식보다 더 아끼고 인물로 키워주는 커다란 마음의 여자가 등장해서 독자는 참으로 훈훈했다.

 

성균관과 규장각 시리즈보다는 앞선 작품이기에, 아무래도 보다 정교하지는 않았다. 더 재밌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해서 마음을 급하게 만들게 하였고, 각종 조선시대 용어와 단어들이 호기심도 자극하였다. 작가는 넓게 펼쳐놓은 복선들을 아주 영리하게 제때에 맞춰 찾아 써먹는다. 무척이나 영리하게 나오는 훤의 캐릭터가 결국 작가의 솜씨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 또한 이름 없기는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책봉되었기에, 이름이 내려졌으나 그 순간부터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것이 되었다. 나는 훤이라 불러 주는 이 없이 단지 원자로만, 세자로만 불리었다. 왕이 된 지금은 훤이란 내 이름은 글로도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이 되었다. 이러하니 너와 나의 처지가 이름이 없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더냐.” -31쪽

 

세자시강원의 많은 스승,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들기까지 여러 스승이 끊임없이 얼굴을 바꿔 가며 세자를 향해 글을 읆었다. 그런데 스승이 바뀌고 책이 바뀌고 글자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백성이었다. 모든 가르침의 가운데에는 백성이 있었기에 세자는 언제나 백성을 배웠다. -138쪽

 

작품에서 열불이 났던 건 민화공주의 허염에 대한 사랑과 선왕의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너무 적극적으로 표현한 민화공주와 그리도 애틋했으면서 결코 표현하지 않았던 부왕의 사랑은 극과 극이었다. 너를 사랑하지만 너에게 그 사랑을 보여줄 수 없는 이유를 알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대를 위한 배려도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 그에게 답답함에 한숨을 쉬어본다.(그렇지만 안내상 씨 캐스팅은 아주 좋아요!)

 

양명군 캐릭터도 다소 아쉬웠다. 결정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드라마의 아역 배우가 정일우보다 더 훈남이라는 것? 하핫, 정말 아깝더라. 김수현은 캐스팅으로 아주 흡족하다. 제운 역을 맡겼어도 좋은 얼굴이다. 한가인은, 김수현보다 연상이다. 그리고 여주인공 역할보다 10년 연상이다. 하아, 그래서 김이 좀 센다. 어리면서 연기 잘 하고 카리스마 있는 남자 배우들은 좀 보이는데, 그런 사례의 여자 배우가 좀 약한 편 같다. 그에 비하면 성균관 스캔들은 참으로 훌륭한 캐스팅이 아니었던가!

 

자꾸 드라마 쪽으로 이야기가 샌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드라마 원작 소설의 운명이기도 하다. 허준에서 '내의원'이 소재가 되었고, 대장금에서 '수랏간'이 주요 소재가 되고, 동이에서는 '감찰부'가 나왔다. 이제 이번 작품에서는 '성수청'이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게 흥미롭다. 궁중 암투와 외척의 득세가 빠지지 않고, 권력에 집착한 간신 캐릭터도 진부하지만, 그것들에게서 다소 숨을 돌려주게 하는 이야기 바탕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극을 보는 재미에는 이런 시각적인 신기함이 항상 포함되어 왔으니까.(그런 면에서 전미선 씨는 아주 좋은 선택!)

 

표지 이야기도 잠깐 하자. 이번 '해를 품은 달'은 개정판인데 예전 책보다 표지가 훨씬 좋다. 성균관과 규장각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개정판'인데 더 좋아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판되어 많은 독자들을 울게 했는데 개정판이 나왔으니 축하할 일이다. 작가님의 '창작의 신'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규장각 다음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 작가님, 부지런을 떨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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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2-01-0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티비에서도 해품달 이야기를 하네요. 하여간 올해 첫 드라마로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아요. 계속 이 분위기를 이어갔으면 싶어요. 그러자면 대본도 좋아야 할테고 배우들 연기도 잘 받쳐줘야 할텐데 말이에요.
전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거의 생각이 안나요;; 드라마 보면 새로울거에요. ㅎㅎ

실제로 액받이 무녀라는 직업(?)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어요. 이 소설의 배경인 조선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에서도요.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그런 무녀들 한둘쯤 뒀을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고요.

마노아 2012-01-08 17:08   좋아요 0 | URL
한밤의 티비연예군요! 광고하는 것 보고서 보고 싶었는데 엄니가 기독교 방송을 틀어놓고 절대 채널을 못 바꾸겠다 하셔서 못 봤어요. 아까비...ㅜ.ㅜ

액받이 무녀가 인간 부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사실 책 보면서 처음 알게 된 거거든요.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잘 상상이 안 가긴 해요. 임금 정도 되니까 있는 것인지.... 근데 꽤 잔인한 부적이긴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