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 앤 데어 - Here and Ther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때 음반을 낸 적도 있었던 섹소폰 연주자 로버트는 현재 살던 월세집에서도 쫓겨나는 실업자 신세입니다. 애지중지 간직한 섹소폰을 만져도 보지만 좀처럼 다시 연주가 되지 않는 그는 길거리에서 자신을 반갑게 마주한 친구조차도 불편하여 밀어내고 싶을 만큼 삶에 의욕이 없습니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이삿짐을 날라준 세르비아 출신의 청년 브랑코는 자신이 전화를 받아놓고는 극구 사장님이었다며, 본인은 직원인 척 행세를 합니다. 목소리로 같은 사람임을 알아본 것은 아무래도 로버트가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라 더 예민했던 걸지도요. 아마도 옛 여친이었을 여자네 집에서 하룻밤을 기대보지만 여지 없이 불청객 신세였던 그는 그 집에서도 곧 쫓겨납니다. 시간당 10달러 짜리 이삿짐 알바도 해보았지만 팁 없이 2시간 일하고 받은 20달러에 그는 망연자실합니다. 일은 힘들고 돈은 되지 않고, 여간 신경질 나는 게 아니지요.

 

한편 브랑코는 로버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그래서 현재 솔로라는 것에 집중합니다. 돈이 필요한 로버트에게 그가 제안을 했던 것이지요. 세르비아에 있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위장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데리고 와준다면 돈을 주겠다고요.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로버트는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세르비아에 도착해서 5천 달러를 꽂아주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오는 것으로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로버트. 브랑코의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기 중인 택시에는 그녀의 오빠가 운전대를 잡았지요. 공항에는 변화의 땅 세르비아라고 당당히 적혀 있지만 운전수는 냉소만 던질 뿐입니다.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는 땅이라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로버트에게 집중합니다. 뉴욕에서 온 이 미국 시민은 식료품 가게 여자처럼 당장이라도 가방을 들고 함께 떠나고 싶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저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친해지고픈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뉴욕에서 최빈민층 생활을 했고, 때문에 지금 위장 결혼을 하려고 계획 중이라는 것도 그들은 알지 못하니까요.

 

초반의 로버트는 의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게 귀찮았고 희망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브랑코의 어머니가 자신의 더러워진 옷을 세탁해 놓은 것에 대해서 먼저 의견을 묻지 않았다고 버럭 성을 내었고, 빨리 돈을 부치지 않는 브랑코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만을 보였지요. 거리에서 팔짱을 끼우는 위장 결혼의 상대 팔을 툭 쳐버리는 그런 사내였던 겁니다. 그런 로버트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브랑코의 엄마 올가 덕분에요.

 

그녀가 준비해 준 잠옷을 입고 편안하게 잠들었다가 깨어난 아침, 테라스에서 화분에 물을 주며 노래하는 그녀를 발견합니다. 멋쩍게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해보지요. 딱히 이곳 베오그라드에서 할 일이 없었던 로버트는 그녀와 시장도 같이 갑니다.

 

 

바가지를 쓴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튼 소년의 강매에 장미 꽃도 사서 올가에게 선물했고 무거운 장바구니는 대신 들어줍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현실감각이 남아 있어서 브랑코의 여자 친구와 돈없이 결혼부터 할 수는 없다고 못을 박지요.

 

돈이 바로 오지 않은 것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여전히 이삿짐 나르기로 돈을 열심히 벌던 브랑코에게 사단이 났으니까요.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잔혹한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브랑코에게 그 도시는 너무 거대하고 야멸찹니다. 시간당 19달러짜리 벽보 위에 자신의 15달러짜리 벽보를 붙이고, 로버트에게는 시간당 10달러를 주었던 그의 억척스러움은 이 도시에서 이용당하기 아주 쉬웠습니다. 척봐도 이주 노동자이고, 어딘가 약점이 있을 것만 같은 이 청년을 여기저기서 등을 처먹습니다. 그 절박함을 절대적으로 이용해 먹는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살벌한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청년은 사력을 다합니다. 여기서 밀려나면 세상 밖으로 밀려날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 말이지요. 여자 친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위장 결혼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곳 세르비아는 당장에 떠나고픈, 떠나야 마땅한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자본주의의 허상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상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겹쳐집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이 나라로 몰려드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지요.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뉴욕에서 베오그라드로 온 로버트는 달라집니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좀처럼 잡을 수 없었던 섹소폰을 들어 아픈 식물을 위해 연주를 합니다. 미소라고는 없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대인 관계도 넓어집니다. 물론,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올가가 있었지요.

 

 

시장을 갈 때도,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할 때도, 그밖의 모든 외출복은 저 낡은 트렌치코트가 전부인 올가. 그녀의 낡은 아파트 만큼이나 그녀의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회색빛 도시에서 꽃을 가꾸고, 노래를 부르고, 정성을 담은 빨래에서는 향기가 나게 하는 그런 여자였지요.

 

영화는 속도감 없이 참으로 차분하게 진행됩니다. 심지어 대사도 많지가 않지요. 느릿하게 진행되지만 그 안에서 절박한 청년의 분노와 세상에 희망이라곤 없던 남자에게 찾아온 따뜻한 사랑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교차합니다. 하지만 쉰 두살에 어렵게 찾아온 사랑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큰 위기를 맞습니다. 로버트는 이 위기를 어찌 극복해 낼까요. 그에게 찾아올 것 같던 평온한 사랑을 그는 끝내 놓치고 말까요.

 

여기에는 'Vidimose(비디모세이)'라는 인사말로 대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봐요!라는 뜻이라고 하는군요. 영화의 제목을 참 잘 지었습니다. Here And There! 당신과 나의, 우리 모두의 사랑이 모두 안녕한지 묻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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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01-09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어제 이 영화 봤어요. 마노아님의 훌륭한 리뷰를 읽으며 그랬었지. 하고 끄덕끄덕하고 있어요. ^^
비디모세이. 이루어질까요?

마노아 2012-01-09 16:29   좋아요 0 | URL
영화 좋지요? 비디모세이! 아주 적절한 인삿말이에요. 꼭 이루어졌음 좋겠어요. 우리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