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7 호/2011-10-17
윌리엄은 숨을 들이켰다. 저 앞에 선 소년이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 앞에서 느긋하게 귀나 후비고 있을 인간은 없다.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가 설령 혈육이라 할지라도.
“왜 활을 들지도 않는 거지? 너무 겁먹어서 다리가 풀린 거 아냐?”
낄낄대며 말을 거는 관리 놈의 더운 입김이 몹시 거슬렸다. 내기고 뭐고, 저 놈의 심장부터 꿰뚫어 버리고 싶다.
“네놈이 지껄여대는 바람에 마음의 평정이 풀린 것뿐이다. 입 닥치고 기다리시지.”
“거 참, 말 험하게 하는군. 내 말 한마디면 네놈의 그 잘난 가족도, 마을도 모두 박살나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좀 더 공손하게 구는 게 어때?”
윌리엄은 한 번 더 숨을 들이켰다. 활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말마따나 마을의 존망이 자신에게 걸려 있었다. 세금으로 마을을 괴롭힌 건 관리지만, 홧김에 활쏘기 내기를 걸어 관리의 성질을 돋운 건 자신이다. 성격대로 굴다가는 가족 뿐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옆에 있는 건 관리고 뭐고 그냥 소음 덩어리다. 신경을 끄자. 자신에게 한 번 더 주입시킨 윌리엄은 온 몸의 감각을 활을 잡은 손끝으로 모았다. 과녁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과 한 알. 그리고 과녁이 올라가 있는 곳은 사랑해 마지않는 외아들의 머리 위. 수 밀리미터의 어긋남 만으로도 아들의 이마를 꿰뚫을지 모른다. 침착해. 자신을 믿고 쏘는 거다. 우린, 괜찮아.
“쏘겠습니다.”
거울처럼 잔잔해진 마음이 활로 향했다. 길게 당긴 활시위가 팽팽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가늘게 떨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살은 곧게 날아가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중앙이 멋지게 꿰뚫린 사과와 함께.
“오오!”
“역시 윌리엄이 해냈어!!”
“우리의 승리야! 잘했네, 윌리엄!”
뒤에서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울렸다. 굳었던 어깨가, 그리고 심장이 조용히 풀려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윌리엄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활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활시위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떨리기 시작한 그의 손 근육 때문이리라.
“자,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이제 관리님 측 분께서 쏘실 차례입니다만.”
“아, 알고 있어! 재촉 안 해도 알아서 해!”
입만 딱 벌린 채 - 설마 그 거리에서 명중시킬 줄은 몰랐던 게지 - 멍하니 서 있던 관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성질 다 드러내며 큰 소리만 치는 건 천성이 그런 건지, 자리가 그렇게 만든 건지. 겨우 돌아온 여유가 불러온 헛생각을 휘휘 날리며 윌리엄은 다시 소년 쪽을 바라봤다. 역시 여유가 생긴 건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소년의 입꼬리가, 그러나 차츰 굳어져 갔다. 그의 머리 위에 사과 하나를 더 올리는 손길 때문이다. 오자마자 급히 떠나는 여유의 날갯짓 소리, 풀리자마자 다시 굳어가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어쩌겠느냐. 겁 없이 내기를 건 내 업보인 것을….”
“뭘 그렇게 구시렁대고 있는 게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행하자고! 우리 쪽 명사수 대령이시다~.”
어느새 자신만만한 본모습을 찾은 관리의 음성과는 걸맞지 않은 중늙은이 하나가 등장했다. 느릿하게 발을 끄는 폼이 아무리 봐도 ‘명사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윌리엄은 다시 돌아오려는 여유를 애써 밀어냈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활을 가르친 스승도 남 보기에는 그저 그런 노인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명사수’의 어깨에 당연히 걸쳐져 있어야 할 물건이 없는 것이다. 활과 화살 말이다.
“활…은?”
“나는 활을 쏘는 사람이 아니오.”
대신 이걸 쓸 거요. 사수가 주머니를 뒤져 꺼낸 물건은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시커먼 덩어리였다. 눈이 동그래진 윌리엄의 마음을 읽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물건의 전체 형상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엔 작은 통 두 개를 붙인 형태다. 앞에는 스위치? 옆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들여다보던 관리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이상한 물건은 뭐지?”
“내게 활이 없으니 쏠 물건이 필요하지 않겠소?”
“아니, 그건 아는데…. 그 허접한 물건을 갖고 무얼 하려는 겐가?”
“보면 아오.”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적이던 사수는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강하게 올라오는 냄새에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으, 술 냄새. 네 놈, 이 신성한 자리에 술을 마시고 오다니 정신이 있는 게냐?!”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오늘은 마시지 않았소. 닥치고 보기나 하시오.”
검은 물체의 뚜껑을 열고 병을 신중하게 기울여 액체 한 방울을 조심스레 떨어뜨린 사수는 재빨리 물체의 뚜껑을 닫았다. 뚜껑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흔들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휘휘 저어 주변 사람을 물린 사수는 자세를 바로 펴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두 발짝 뒤로 물러선 윌리엄은 그 눈빛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 내기, 자신이 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의 목숨이 함께 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부정(父情)이 공명정대한 마을 대표자로서의 마음을 이겼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공중에 뿌려질 정도의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려던 순간, 사수의 손가락은 인정사정없이 스위치를 눌렀다.
‘펑!’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윌리엄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에 사과를 얹고 서 있어야 하는 소년만이 온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막을 희생했을 뿐이다. 한동안 먹먹한 정적과 싸한 ‘술 냄새’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머리를 징징 울리는 소음의 잔해를 떼어내고 겨우 몸을 일으키던 윌리엄의 귓가에 나지막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걱정 마시오. 당신의 아들은 멀쩡하오.”
“무슨…?!”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윌리엄의 눈에 아까와 같은 포즈로 서 있는 소년이 들어왔다. 아까의 소리 때문인지 표정이 조금 멍한 걸 빼면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의 사과도 형태가 조금 변했을 뿐 그대로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던 윌리엄의 귓가에 아까와 비슷한, 그러나 좀 더 크고 좀 더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흘렀다.
“내가 넣은 건 술이 아니라 알코올이외다.”
“알코올? 술 만들 때 쓰는 그것 말인가요?”
“알코올은 끓는점이 매우 낮기 때문에 기화가 잘 되오. 게다가 내가 넣은 알코올은 단 한 방울. 이 통을 이렇게 살짝 흔들기만 해도 금세 기체로 변해 통을 꽉 메우게 되지. 액체보다 기체의 부피가 훨씬 크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외다.”
“허어, 그럼 그 알코올 기체가 통 뚜껑을 밀어냈다는 이야깁니까? 그만한 힘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데?”
“물론 이 정도 양으로 통 뚜껑을 그렇게 강력하게 날릴 순 없소이다. 그렇기에 장치 하나를 더 해뒀소. 여기 보이시오?”
자연스레 시작된 설명에 또 자연스레 끌려간 윌리엄은 사수의 손길에 따라 통 안쪽을 들여다봤다. 눈에 익은 물체 두 개가 정답게 마주하고 있었다. 옆에서 귀를 계속 문지르던 관리도 아닌 척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역시 아닌 척 자리를 양보해 준 윌리엄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척척 끼어든 관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물체의 이름을 뱉었다.
“못?”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못이지만, 또 그렇게 흔하지만은 않은 못이라오. 정확히 말하면 전선을 연결해 둔 철 못이오. 전선의 끝은, 보시오. 스위치가 달린 압전기에 연결돼 있지 않소. 이 스위치를 누르면….”
목을 길게 빼고 통 안을 들여다보던 관리가 순간 풀쩍 뛰어 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몸 밑에서 낙엽 먼지가 자욱하게 올랐다. 함께 공기 중으로 뻗어간 마을 사람의 박장대소가 체면도 뭐도 버리고 부들부들 떨어대는 몸짓과 정확한 박자로 울렸다.
“어이쿠, 아까 쓴 알코올 기체가 조금 남아있었나 보오. 스위치를 누르면 이렇게 나사 두 개 사이에 불꽃이 일어나거든. 알코올 기체가 남아 있으면 당연히 아까처럼 불이 붙겠지. 그러게 좀 조심하시지 그러셨소. 머리카락 괜찮으시오?”
“네 이놈, 일부러 그랬지?”
“남의 설명을 끝까지 안 듣고 위험한 짓을 한 사람이 나쁜 거요.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내기를 무르고….”
“아니, 아니다! 그 같잖은 설명인지 뭔지나 얼른 끝내!”
귓구멍을 후벼대며 관리를 ‘놀리는’ 사수의 모습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설명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불꽃 때문에 알코올이 폭발하게 되고, 그 압력으로 통 뚜껑이 날아가는 거요. 알코올의 인화점, 즉 불이 붙는 온도는 약 섭씨 12도. 즉 통 안의 온도가 12도 이상이면 알코올에 불이 붙어 폭발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사람 체온이 36.5도 인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낮은 온도에서 타오르는 거지. 폭발력의 크기는 뭐, 아까 보셨듯이 꽤 크오. 절대 사람을 향해 날리면 안 되는 물건이지.”
댁에게는 참 미안한 짓을 했소. 뒤에 붙은 말은 윌리엄의 귀에나 들릴 정도로 나지막했다. 아닙니다, 애초에 아들의 목숨을 건 건 저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윌리엄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봤는지 못 봤는지, 반응 없이 돌아선 사수는 손을 저었다.
“여기까지 하겠소. 저쪽은 사과를 꿰뚫었고 나는 떨어뜨리지도 못했으니 저쪽이 이겼소.”
“아니! 그것의 위력이라면 충분히 사과를 날릴 수 있지 않은가! 왜!”
“알코올이 한 방울 밖에 없었소. 그 뿐이오.”
“한 방울은 무슨! 아까 병으로 있지 않…, 으악?!”
침을 튀기며 흥분하던 관리의 옷이 순식간에 얼룩졌다. 싸한 알코올 냄새가 아까보다 훨씬 강하게, 하지만 훨씬 친근하게 퍼져갔다. 아까 ‘인화점’ 이야기에 지레 겁먹은 건지 손을 마구 휘저어 옷을 말리며 펄쩍펄쩍 뛰는 관리를 지나쳐 가던 사수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확실히 한 방울만 있었지. 그렇지 않나?”
“…그렇군요.”
윌리엄도 마주 웃었다. 관리의 다른 능력은 인정 못해도, 사람 뽑는 능력 하나는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저 모양, 어쩐지 보기 좋지 않으오?”
난 가리다, 뜻 모를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입을 딱 벌린 채 그 쪽을 바라보는 관리와, 의미도 모른 채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과, 바닥에 놓인 활로 차례차례 돌아가던 윌리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향했다. 역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의 머리 위에는 사과 하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놓았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단지 아까와 다른 점은 한쪽이 둥글게 베어져 나간 채, 맑고 달콤한 즙을 흘리고 있다는 것. 마치 딱 한 입 베어 낸 형태로,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