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시티 -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
케빈 브록마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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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프리카 공동체에서 인간은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사샤sasha, 그리고 자마니zamani 이렇게 세 부류로 나뉜다. 본인은 죽었지만 그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경우, 그는 사샤, 즉 살아 있는 죽은 자가 된다. 사샤들은 완전히 죽었다고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예술작품을 통해 그들을 표현할 수도 있고, 이야기 속에서 다시 그들을 삶으로 데리고 올 수도 있다.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사람마저 죽고 나면, 그 조상은 사샤이기를 그만두고 자마니, 즉 죽은 자가 된다. 일반화된 조상으로서 자마니는 잊히지는 않고 경외의 대상이 된다. 많은 이들이…… 그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죽은 자는 아니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제임스 로웬,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9쪽

어린 아이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아이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곧잘 해주는 이야기가 네 마음 속에 그 사람이 살아있으니 영영 이별은 아닌 거라고, 그런 얘기들을 곧잘 하기도 하고 또 들어보기도 하면서 우린 살아온 것 같다. 그것이 단지 위안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사는 공동체가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사는 시티를 구상한 소설가도 있다. 케빈 브록마이어의 소설은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시티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의 순간도 기억한다. 또 자신이 이 시티에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이 살다가 온 그 지상에 누군가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은 시티에서 생전에 마무리 짓지 못했던 것들을 마무리 짓기도 하고, 끊어졌던 관계를 잇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하고 줄곧 꿈꿔왔던 꿈을 이루려고 도전도 한다. 시티의 인구가 무한대로 증가할 것 같지만 지구의 인간들도 꾸준히 죽기 때문에 시티는 인구 과잉으로 몸살을 앓지 않는다. 더군다나 현재 지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전 인류가 거의 전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오히려 시티의 사람들이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지금 시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 '로라 버드'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현재 남극에 있다. 코카 콜라 직원으로 남극에 파견을 갔지만, 같이 갔던 사람들도 모두 죽고 그녀 혼자만이 남았다. 기지와 연락이 두절되면서 사정을 알아보러 갔던 두 남자 직원이 돌아오지 않자 기지로 찾아나섰던 그녀는 그곳에서 전 대륙을 뒤덮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세상에 단 홀로 남아있는 원천적 고독에 시달려야 했다. 혹시나 어딘가에 누군가가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못하지만, 시시각각 닥쳐오는 시련들은 그런 기대를 덧없음으로 바꿔버린다.  

이렇게 로라의 현재 상황과 그녀의 기억이 이루어낸 시티의 사람들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교차한다. 처음엔 그저 한 사람의 등장 인물로 보였지만, 뒤로 가면 그가 로라의 기억 속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언급되어 다시 마주친다. 게 중에는 로라의 첫사랑도 있고, 어릴적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잠시 스쳐갔던 사람들도 있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인물들이 하나의 시티를 이룰 정도라니 그 숫자에 놀라게 된다. 작품 속에서 로라는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 산 사람도 아닌데도 말이다.  

거의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은 로라의 남극에서의 동료 두 명이었다. 그 중 퍼켓은 자신이 아주 어릴 적에 자전거 사고로 죽은 형을 찾아 나선다. 자신이 시티에 도착함으로 인해서 시티에서 곧 사라져버린 자신의 형이었다. 그는 형을 기억해줄 수 있는 지상의 마지막 사람이었는데 이제 자신마저 죽었으니 형은 시티에서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라가 그의 형을 알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형의 자취를 찾아 나서고 그 흔적을 느끼는 부분이 참 아련하고 애틋했다.  

빌레 톨바넨은 매일 밤 8번 가와 바인 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술집에서 당구를 쳤다. 술집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만나오던 친구들이었다. 핀란드의 오울루에 있는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 그들은 종종 "우리 죽어서 다시 만나세, 8번 가와 바인 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술집에서"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 명씩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한 후, 그들은 정말 8번 가와 바인 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술집을 찾았다. 반신반의하며 조심스럽게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구대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마침내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9-30쪽 

습관처럼 농담삼아 하던 말을 그들의 입장에서 현실화되던 장면이다. 이런 모습도 참 애틋하니 먹먹하다. 죽어서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친구들과 가족이 있다는 건 참 벅찬 일이지만, 이들이 모두 로라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신일 테니 이들의 행복한 재회는 복불복이다. 코카콜라의 홍부 부사장 린델이 그랬다. 로라는 그를 알지만 그의 가족을 모르니 그가 보고 싶은 엄마도 아내도 아들도, 누구도 만날 수 없다. 시티에서 린델은 그런 로라를 원망하기도 한다.  

로라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버리는 것을 싫어해서 평생 온갖 것들을 주변에 두고 살았던 그녀. 경우에 따라서 그런 습관은 무척 답답해보일 수도 있지만, 그 덕분에 시티 안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찰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추억과 삶이 공존했다.

그런데 시티 안의 사람들은 추억을 재생시키며 자신들이 죽은 이후 세계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느라 애를 쓰지만, 그런 시티의 존재도 모르고 남극의 얼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로라의 처지는 가엾기만 하다. 그녀가 가장 극적인 위험을 만났을 때 시티에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나쁜 기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언뜻 김강원의 '여왕의 기사'가 떠올랐다. 여왕이 사랑을 잃고 마음에 겨울이 오면 온 나라가 겨울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야기 말이다.  

작품 속에서 한국이 두 번 나오는데 하나는 코끼리가 멸종되고 한국의 공장에서 만 개씩 대량생산된 플라스틱 상아 목걸이 이야기를 할 때였고, 시티 안에 한국 식당이 있어서 김치와 국수를 판다는 얘기였다. 코끼리와 고릴라가 모두 전멸한 지구라고 하니 지금보다는 더 앞서나간 미래 사회이지만, 그때도 전 세계에 대량생산된 물건을 뿌릴 대상으로 한국은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거라고 생각하니 아주 나쁘지는 않다. 

코카콜라라는 거대 자본의 기업이 해낼 수 있는 광고와 홍보 효과, 그리고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치명적 위험에 대해서 아찔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반자본주의 적 감성으로 다가갈 일은 아니다.  

작품이 <뉴요커>에 게재된 뒤 바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더 로드' 같은 느낌의 영화가 나올 지, 혹은 '러블리 본즈' 환상적 느낌의 영화가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로라의 이야기를 할 때면 한없이 안타까울 것이고, 시티의 이야기를 하면 대조적으로 밝은 이야기도 가능할 것이다.  

근래에는 어릴 적에 있었던 일, 마주쳤던 사람, 혹은 내가 했던 말들 등등... 이런 걸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싶은 기억들이 조각조각 자꾸 나를 건드린다.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자세히 기억나는 바람에 양심이 자꾸 아프기도 했었다. 그런 내 기억들을 다 담아내면 로라가 만들어낸 시티와 아주 흡사할 것 같다. 가족의 가족으로 올라가고, 친구의 친구, 친구의 가족으로 이어지고, 어쩌다 알게 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등등... 많은 카테고리가 마인드 맵처럼 주렁주렁 가지를 칠 것 같다. 그 세계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따뜻한 구역에서 서로 옹기종기 모여서 내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상상을 해보면 어쩐지 시큰하다. 이 책과 같은 가정이 성립하려면 그들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할 테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우리는 말하는데, 경계를 넘어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만난다고 가정을 한다면, 역시 허투루 넘길 사람이 하나도 없다. 기억하는 자와 기억되는 자, 그 공통 분모인 기억이 다만 아름답기를 원할 뿐이다.  

덧글)오타가 몇 개 있다. 

105쪽 매리언와 필립에게>>매리언과 필립에게
241쪽 린델는 거지가 다음 >>>린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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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0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보니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때의 애틋함과 먹먹함이 다시 막 떠오르네요. 그러면서 지금 내가 누군가와 관계를 끊는다고 한들, 만약 이 책속의 도시가 존재한다면 그 누군가는 여전히 그곳에 있겠구나, 싶어져요. 그렇다면 관계를 맺고 끊는건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걸까요? 어렵네요. 그곳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먹먹해져요, 마노아님.

마노아 2011-07-08 15:33   좋아요 0 | URL
로라는 마지막 사람인데, 로라가 죽으면 시티에 아무도 없을 텐데, 로라는 어쩌지요? 로라 생각에 정말 먹먹해요. 그녀의 공포와 추위와 외로움이 너무 가여워요. 내가 잊고 싶어하는 동창이 하나 있는데, 나와 그 아이를 같이 기억하는 누군가가 분명 있을 테니,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시티에 가면 만날 수밖에 없게 되네요. 시티에서조차도 왕재수면 어쩌지요?
아무튼, 이거 영화로 나오면 엄청 슬플 것 같아요.ㅜ.ㅜ

다락방 2011-07-08 15:35   좋아요 0 | URL
일단 소재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기 때문에 이건 영화로 나와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아요. 영화를 보다 보면 펑펑 울지는 않아도 주루룩 눈물이 흐를 것 같아요. ㅜㅡ
근데 말이죠, 로라의 남자친구요, 물론 전(前)남자친구..지만, 다른 여자랑 사귀는 거 보니까 막 서운하더라구요. ㅜㅡ

마노아 2011-07-08 16:00   좋아요 0 | URL
그 관계도 로라가 엮어준 건가 싶어 참 아이러니 했어요.
근데 그 남자 너무 동문서답해서 좀 얄밉더라고요.
왠지 연애하면 여자 고생시킬 것 같아서 말이죠. 흥!

다락방 2011-07-08 16:09   좋아요 0 | URL
흥! 남자들이란.. -_-

마노아 2011-07-08 16: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흥, 킁!!

굿바이 2011-07-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라는 부제에서 덜컹합니다.
물론 가정이겠지만 죽어도 또 시작되는 삶이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참담할 수가 있나요.
이 세상에서 유통기한이 다 하면 그걸로 영영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ㅡㅜ

마노아 2011-07-08 16:56   좋아요 0 | URL
아아, 유통기한이라고 하니 시들어가고 상해가는 제가 보이네요..ㅜ.ㅜ
부제가 이 책의 대부분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진정 덜컹!하는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