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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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에야 금성에 다다랐다. 고을 수령 김목중이 내게 술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나를 만나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모두들 내게 다가서면 큰 병이라도 옮는 듯 몸을 움츠렸다. 유배 길은 배움의 길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냉혹하고 무심한 세상을 보았다.-56쪽

강을 다 건넜어도 죽음의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맞이한 것은 얼어 죽은 시체였다. 채 자라지도 못한 소년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진저리를 쳤다. 죽은 것은 소년 하나뿐이 아니었다. 얼어 죽은 시체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검은 새가 아쉬운 마음에 입을 쩝쩝거리며 하늘로 날아갔다. 무심한 세상이었다. 내가 어깨에 힘을 주고 글을 쓸 때 세상은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임금의 의중을 짐작하려 애쓸 때 세상은 눈과 바람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이 거친 세상에서 글이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김려는 무엇이며, 이옥은 또 무엇이며, 임금은 또 무엇일까.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세상이 사라지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58쪽

남이곤과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세상 끝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임금에게 낙인찍힌 죄인을 그는 죄인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선 것은 죄인이 아니라 죽어 가는 사람이었다. 다시 이옥을 떠올렸다. 나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62쪽

내게 글 쓰는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네. 지루해서 할 일이 없기에 쓴 것일 뿐.
이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다. 글에 목숨 건다는 말보다 그냥 쓴다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옥에게 글은 공기요, 물이요, 밥이었다. 그의 곁에 그냥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116쪽

조선 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문학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가졌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은 모두 문인이었고, 그들의 일상은 문학으로 이루어졌다. 문학 작품은 인간의 일상과 교직되어 있었으니, 친구가 찾아와서, 누가 죽어서, 술을 마시며, 한가해서, 흰머리가 나서 시를 지었다. 꽃을 보고, 달을 보고 시를 지었다. 이뿐인가? 집을 지으면 기문을 썼고, 친구가 책을 쓰면 서문을 썼다. 누가 죽으면 행장을 짓고, 제문을 짓고, 비문을 쓰고, 묘지를 썼다. 문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글쓰기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금전적인 대가가 주어지지 않지만 문인으로 명성을 날린다는 것은 생을 걸어 볼 만한 일이었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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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16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내내 속상하고 깨닫게 되고 그러더라고요

마노아 2011-05-16 21:32   좋아요 0 | URL
그 입장이 되어보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