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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목공소 -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김진송 지음 / 톨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인문에세이라고 하니까 또 마음이 달라졌다. 게다가 제목은 얼마나 멋지던가. 상상목공소. 웬지 꿈을 깎고 갈아서 멋진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 같은 기분마저 들고 말았다. 소제목은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고 적고 있다. 상상력과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보다 준비를 하고 읽게 된다. 예상한 대로 역시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에서 집중하게 된다.
인간의 사고 대부분이 언어중추를 통해서 일어나듯이 상상력 또한 대개는 언어작용에 의해 작동된다. 하지만 그 전에 언어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회적 도구다. 아이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사물을 구분하고 대상을 구체화시킨다. 언어적 소통을 통해 타자와 자신을 분리해내는 인식이 발달하며 또 언어를 통해 사회적 교감을 이루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억압에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어는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사물과 현상의 여러 측면에서 얻어지는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다만 하나의 축소된 개념에 갇혀버리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 21쪽
상상력은 언어작용에 의해 작동되지만 언어는 동시에 상상력을 제한하는 사회적 도구라고 그 모순성을 지적했다. 이렇게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관계 속에서 스스로 충돌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예가 많이 등장했다. 인간과 벌레도 마찬가지였다.
벌레와 인간. 그들은 한 번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둘 간의 관계는 늘 적대적이었다. 인간은 수백만 년을 벌레에게 시달려왔음에도 벌레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확신한다. 벌레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목숨을 내어주면서도 자기의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 – 146쪽
상상력에 대한 오해도 그 범주에 속한다.
상상력에 관한 많은 오해가 있다. 그중 가장 흔한 오해는 상상력이 동심의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오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심스러운 현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창의력이 더 높을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른을 뛰어넘은 수준까지 도달한 예는 거의 없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상력이란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상상력은 얼핏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경험이 적은(그래서 순수한) 사람들이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이미 경험했던 대상에서 유추하여 대상의 형태와 성질 등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게 된다.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반응은 빈약한 경험에서 비롯된 연상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쉽다. 경험과 사고의 부족에 기인한 엉뚱한 연상이 어른들의 눈에 기발한 상상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 172쪽
듣고 보기 그렇구나.... 라며 고개 끄덕이게 된다. 동심의 세계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그 상상력, 게다가 창의력의 원천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상상력이 사실은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뜻밖이어서 놀랍다. 경험의 산물이라고 하면 누구든 그 상상력과 창의력의 샘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느끼면서 살지는 못하고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두운 기분이랄까.
상상력은 사회적이다. 창의적인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의적 발상이 뛰어난 한 개인에 의해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적 공간이 없다면 상상력과 창의성 또한 발휘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창의성 혹은 상상력은 통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열린 사고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규준을 넘는 새로운 사고는 사회적 규준으로 평가될 수 없거나 측정되지 않는다. – 178쪽
상상력과 창의적인 작업이 모두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적 공간을 무시할 수 없고, 그것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걸 뛰어넘는 상상력과 창의적인 작업이라면 외면받거나 지탄받기 쉽다.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은 두 개념이 이렇게 사회 속에서 발목이 잡힌다고 생각하니 역시 모순적이다.
목수인 저자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온갖 다채로운 설정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나무로 작업해낸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사이사이의 시행착오 등도 무척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문자로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는 저자의 작업들이 심드렁했다. 당신에게는 유의미한 작업이지만 그걸 책으로 한 다리 건너 문자로 읽어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공감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완성품을 사진으로 보니 꽤 멋졌는데, 그걸 동영상으로 보니 더 근사했다. 아마 실물로 보면 나의 심드렁함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테지만, 그렇지 못하는 독자는 홈페이지의 동영상으로라도 만족감을 더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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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상상력과 창의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모르던 것들에 대한 얘기가 등장할 때 글이 더 반짝반짝 빛났다. 이를테면 저자의 관찰에 의하면 봄꽃은 붉은색, 여름꽃은 흰색, 가을꽃은 보라색이 많은데 이는 주변환경과 보색을 이루기 위해서일 거라는 것이다. 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나무는 싱그럽고 꽃은 예쁘다고만 생각했지 꽃 색깔을 한 번도 눈여겨보지 못했다. 저자의 짐작대로 '보색'대비를 통해서 더 많이 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픈 욕망이 그렇게 발현되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제는 계절마다 꽃을 볼 때 그 색대비를 신경쓰며 보게 될 것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이니 반갑고 고맙다.
책 속에서 나방이 자신의 천적의 천적인 뱀을 닮은 몸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등장했다. 나방의 천적은 새이고, 새의 천적은 뱀이라고 나와서 또 화들짝 놀랐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땅을 기어다니는 뱀에게 잡아먹힌단 말인가! 뱀은 개구리나 먹는 줄 알았지 새까지 잡아먹다니, 갑작스럽게 뱀의 신출기묘한 능력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뱀을 닮은 모양새로 진화한 나방에게도 역시 박수를 보낸다. 자연의 이치란 어찌 이리 기이하고 자연스러울까!
꽃의 섹스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다. 페로몬을 발산하는 꽃과, 종을 넘나드는 꽃의 섹스라니, 단어의 파격성도 그렇지만 꽃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인간으로 대입하면 이건 파격 그 이상이 아니던가!
인간은 왜 꽃을 좋아할까.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꽃잎의 감촉, 도발적인 색채와 매혹적인 향기, 무엇보다 형태적인 면에서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꽃에게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꽃향기는 곤충이 서로를 유인하는 페로몬과 닮아 있고 곤충의 페로몬은 향수의 성분과 유사하다(꽃이 향수의 재료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즉 꽃의 형태와 색채와 향기는 인간의 성적인 충동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섹스에 꽃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다. – 228쪽
좀 더 재밌고 자세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차마 옮기지는 못했다. 제4장 진화와 상상력 편이라는 것만 언급해 둔다.
물봉선과 나도송이풀과 같은 꽃들은 보기에도 너무 야하게 생겨서 차마 따서 분해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 어떤 꽃이기에! 당연히 호기심이 치솟는다. 이렇게 생겼다.
이 꽃이 물봉선이고,
이건 나도송이풀이다. 왜 야하게 생겼다고 했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흠, 뭐지? 뭘까???
다시 처음 패턴으로 돌아가서 모순되고 충돌되지만 그것으로 다시 조화를 이루는 예시는 또 등장한다.
생태공원이나 호숫가의 구조물에도 방부목을 쓴다. 근처가 오염될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방부목을 없애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방부목을 사용한 이후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목재의 양을 엄청 줄일 수 있었다. 숲이 덜 파괴되게 하는 역할을 방부목이 톡톡히 해낸 것이다. – 242쪽
참 아이러니하다. 방부목이 오염을 불러오지만, 그 방보목이 숲의 파괴를 동시에 막아주기도 한다는 것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자연의 양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인간의 삶의 속도는 자연의 삶의 속도마저 뒤바꾼다. 이를테면 돼지의 평균수명은 칠 년이지만 실제로 세상 모든 돼지의 평균수명을 계산해보면 칠 개월에 불과할 것이다. 도축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이가 돼지의 평균수명이다.
닭이나 소, 돼지만이 아니다. 인간이 선택한 대부분의 꽃은 씨를 맺기도 전에 잘려 꽃병에 꽂힌다. 수반 위에 아름답게 장식된 꽃은 일생의 반을 빈사상태로 보낸다. 어시장의 물고기들은 운명을 스스로 마치지 못한, 자연에서 폐기된 시신들이다. – 243쪽
그렇다면 저자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 가장 사악한 존재이고 다른 생명들을 갉아먹는 존재라고 규탄하는 것일까? 그렇게 촌스러울 리가 없다.
자연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비하는 현대의 삶을 조절하지 않고는 사람 사는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자연과의 조화를 방해한 주범으로 지적되는 게 과학이나 물질의 발전이지만 따지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 말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할 수 있는 길은 쉽게 찾아질 것 같지도 않다. 이를테면 화석연료를 대치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은 과학적 발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몽상에 불과하다. 이제 과학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아마 과학기술의 최종 발전 단계는 자연을 가장 적게 소비하는 방법을 찾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또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인가? – 244쪽
자연을 천천히 소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과학의 힘을 빌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의 역할이 클 것이다. 저자는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해준 신의 선물이라고 멋진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뭔가 판을 아주 크게 벌려놓고 마무리는 테두리 안에 끼워 맞추려고 애쓴 느낌이 다소 들지만, 상상력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붙이지 않겠다. 우리에게 더 많은 상상력이 있다면 이 사회가 덜 각박해질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디자인이 무척 예쁘다. 띠지의 꽃분홍색이 책을 더 빛나게 해주는데, 띠지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바로 분리해버리니 그건 시각적으로 꽤 아쉬웠다. 사이사이 속표지의 어지러운 도면들도 분위기에 걸맞는 연출을 해주어서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옥의 티는 역시 오타다.
276쪽 마지막 줄에 불안해 견지지 못한다면>>>견디지 못한다면
296쪽 성깔 있는 목수가 몽니를 부리는 이유이라는 걸>>이유라는 걸이 맞지 않나? 문장이 어색하다.
그밖에 전반적으로 띄어쓰기 오류가 무척 많다. 그것까지 다 말하진 못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