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속이 충만해지는 소설을 만났다. 영화 개봉 소식을 듣고 원작을 미리 읽고 싶어서 책을 구입했지만 영화보기 전 날까지도 한 장을 못 읽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읽기 시작했고, 영화 시작 전에 2/3 정도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말은 영화를 통해서 미리 만났다. 일견 궁금증을 빨리 해소해서 속이 시원했고, 차분히 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아쉽기도 하다.  

작품은 두 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진행시킨다. 주인공 제이콥이 스물 세 살에 서커스단을 처음 만났던 1931년의 시간과, 그 시간을 양로원에서 회상하는 아흔 세 살의 나이-그러니까 아마도 2001년-가 그 축이다.  스물 셋의 제이콥은 코널 대학 수의학과에 재학 중이었으며 졸업 시험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애석하게도 부모님이 불시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에게는 남겨진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가 돈을 예금한 은행은 파산했고(때는 경제공황 기간이다), 그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대출을 받은 은행에는 집이 저당잡혀 있다. 아버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돈 대신 닭이나 달걀을 진료비로 받던 덕망 높은 수의사이셨지만 이제 그는 빈털털이가 된 채 정처 없이 길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운명처럼 무임승차한 기차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전환시켜 버린 '벤지니 형제 지상 최대의 서커스'였다.

노인이 된 제이콥은 자신의 나이가 아흔인지 아흔 셋인지도 확실히 구분이 가지 않고 어제와 오늘의 일도 잘 떠오르지 않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양로원에서의 그는 괴팍한 노인네이고 심술 맞기도 하고 꼬장꼬장한 영감님 그 자체다. 어느 날 그를 격분시킨 것은 같은 양로원에 있는 어느 노인의 과장된 허풍 때문이었다. 자신이 서커스에서 코끼리에게 물을 줬다고 말을 하는 노인에게 제이콥은 거짓말쟁이라고 역정을 냈다. 그가 서커스단에서 7년을 일했고, 꽤 오랜 시간 코끼리와 함께 생활해 왔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제이콥을 예의도 모르는 정신 나간 노인으로 여길 뿐이다.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 보지만 오히려 우울증 환자로 지목되고 기운이 쭉 빠지는 약을 처방받기까지 한다. 이 양로원에서 제이콥의 마음을 만져주는 이는 간호사 로즈메리 뿐이다. 지혜로운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이를 먹다 보면-얀콥스키 씨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얘기에요.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요. 아무튼, 나이를 먹다 보면,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 오랫동안 소망해온 것이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정말로 인생의 일부가 되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거짓말 말라고 다그치면-나는 상처를 받겠지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려도, 누가 나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요. 얀콥스키 씨의 말대로 맥긴티 씨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맥긴티 씨가 왜 화가 나셨는지 이해할 수 있으시겠지요?" – 298쪽  

지금은 성질 팍팍한 노인이 되었지만 젊었을 적의 제이콥은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를 미워하던 월터와 친구가 되는 과정, 건드렸다 하면 누구든 가차 없이 응징하는 오거스트 앞에서도 코끼리 로지를 위해서 저항을 했더랬다. 습관처럼 유태인을 욕하는 것에 발끈했고, 전혀 상관없는 여성일지라도 누군가 치마 속을 들여다보는 파렴치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다급한 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지하려고 나서는 이였다. 물론, 그런 상냥함과 친절함, 온정 때문에 그는 한꺼번에 코끼리와 침팬지와 강아지와 열 한 필의 말과 임신한 아내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자리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런 유태인 새끼는 쓸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입 조심해!" 내가 소리친다.
월터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대체 왜 그래? 이봐, 너는 유태인도 아니잖아? 유태인이야? 이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다들 하는 욕이잖아." 그가 말한다.
"그래. 그냥 다들 하는 욕이야." 나는 고함을 지른다. "다들 하는 욕인데, 나는 다들 하는 욕에 아주 질렸다고. 배우는 일꾼에게 욕을 하고, 일꾼은 폴란드 사람에게 욕을 하고, 폴란드 사람은 유태인에게 욕을 하고. 난쟁이는-자, 말해 봐, 월터. 그냥 유태인과 일꾼이 싫은 거야? 아니면 폴란드 사람이 싫은 거야?"
월터가 얼굴을 붉히며 바닥을 내려다본다.
"싫어하지 않아. 싫어하는 사람 없어." 잠시 후에 덧붙인다. – 355쪽 

서커스 단에서 쌓아가는 일상과 마주치는 건 사탕 봉지를 펼쳐드는 것 같은 설렘을 주었다. 서커스단 최고의 섹시녀 바바라의 쇼는 숨을 멎게 할만큼 긴장감을 주었는데 영화는 15세 관람가인지라 그런 긴장감은 모두 자동 패쓰였다. 무얼 더 바라랴. 코끼리 로지와의 만남은 기승전결이 아주 뚜렷했다. 망해버린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구입하느라 단장은 재정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갔고, 일꾼들과 배우들에게까지 급여가 밀려버렸다. 그럼에도 코끼리는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였다. 게다가 좀 많이 먹고 좀 많이 싸나. 보통 애물단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가 알고 보니 요물이었다. 어찌나 영리한지, 뭇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 뭔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사용한 여러 에피소드가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이었다고 정리해 준다. 역자 역시 코끼리의 놀라운 생태에 대해서 설명을 보탠다. 

코끼리는 지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동물이자, 상당히 똑똑한 동물이다. 거울에 비친 자기를 알아보는 동물은 인간, 원숭이, 돌고래, 그리고 코끼리뿐이다. 가죽도 꽤 두꺼워서(2.5cm), 서커스단 동물 감독 오서스트가 갈고리로 마음껏 찍어도 생명에는 지장 없다. 한편, 코끼리는 술을 좋아하고 복수심이 강한 동물이다. 1998년 12월, 1999년 10월, 2002년 12월, 인도에서는 불만을 품은 코끼리들이 마을을 쑥대밭을 만드는 사건이 있었는데, 최소한 몇 마리의 코끼리는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을 상징인데, 그것이 코끼리의 잘못은 아니다. – 553쪽 

내 기억 속의 코끼리는 아기 코끼리 점보가 큰 귀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런 모양새 뿐인데,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코끼리라니, 정말 뜻밖이다. 언제고 코끼리 등에 올라타보는 체험을 해보리. 말레나처럼은 못하더라도.... 

말레나는 동물 조련을 책임지고 있는 오거스트의 아내다. 열일곱 나이에 띠동갑 오거스트에게 시집갈 때 그녀는 자신의 가족과 척을 져야 했다. 카톨릭 집안의 부모님은 유태인에게 시집가는 딸과의 연을 끊었다. 오거스트는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성질머리가 조울증처럼 극과 극을 오간다. 한없이 친절하고 한없이 폭력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진 남자다. 말레나가 자신에게 한 눈에 반한 상냥한 제이콥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원작 소설은 말레나가 제이콥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지만, 영화 속에서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서 누구라도 그녀를 구해줄 왕자로 보였을 것 같았다. 558쪽에 이르는 긴 내용의 소설을 두 시간짜리 영화로 옮기면서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말레나 역은 아무리 생각해도 리즈 위더스푼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제목을 '코끼리에게 물을'이 아니라 '워터 포 엘리펀트'라고 지은 것. 무의미한 영어 남발이다. 어차피 의미도 같건만...... 

아흔 셋의 제이콥은 지금 무척 실망한 상태다. 양로원 앞에 서커스단이 왔고, 이제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건만 자신만 가족이 오지 않아서 홀로 홀에 버려져 있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하필 오늘, 그를 방문할 차례였던 큰아들이 약속을 까먹었고, 다른 약속을 잡는 바람에 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가족들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누구도 오지 않는다. 제이콥이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데 하필 오늘 이런 실망을 맛보게 되다니, 인생이 얄궂다. 그의 아들도 이미 71세이니, 깜박깜박 정신을 탓할 수도 없다. 다섯 아이가 번갈아 오던 것이 아니라, 제이콥에게는 이미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 어쩌면 고손주까지 있을지도 모르니 그 순서가 얼마나 오래 지나서야 돌아오던가. 늙는 것도 서럽고, 서커스를 보지 못하게 된 것도 서럽기만 하다. 

소설의 주인공 제이콥은 지금 아흔 살 혹은 아흔세 살의 노인이다.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이, 정확히 말해서, 올해가 몇 년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이. 더 정확히 말하면 알 필요가 없는 나이. 내가 있길 기대하며 거울을 볼 때마다 웬 낯모를 노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곤 하는 나이. 희미한 눈동자 뒤에서 아무리 열심히 나의 흔적을 찾으려 해봐도 소용없는 나이. 야단맞는 것에 익숙해지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데 익숙해지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나이. 온전한 정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 되는 나이. "이제부터 내리막길이야. 금방 끝이 나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길 바랐는데. 정말 바랐는데." – 554쪽 

아흔이 넘은 나이는 정말 까마득해 보인다. 물론, 요새는 워낙 장수가 트렌드인 세상이어서-얼마 전 엄마는 친구의 모친상에 다녀오셨는데 그 분은 연세가 100세가 넘었다. -90세에도 정정하신 분들이 많지만 그 분들이 겪고 계실 외로움은 꽤 크고 무거울 것이다. 

노인 제이콥은 한탄한다. "사실 이제 내 진부한 이야기를 가지고는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그것을 그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없다. 내가 겪은 이야기는 모두 다 유행이 지났다. 나는 스페인 독감, 자동차의 첫 등장, 일이차 세계대전, 냉전, 게릴라전, 스푸트닉을 직접 경험했고 그에 대한 경험담을 들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봤자 이 모든 것은 이제 오래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한테는 오래전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제 더이상 새로운 경험을 할 가능성이 없다. 그게 바로 늙는다는 것의 실상이다.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아직 늙고 싶지 않다." – 556쪽 

노인 제이콥은 외롭고 답답한데, 그런 그의 답답한 마음을 뚫어줄 기회가 생긴다. 휠체어를 끌어줄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의 다리를 움직여서 도착한 서커스단, 그러고도 문전박대를 당할 뻔했지만, 아직 그곳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전설과도 같은 그의 서커스단 경험에 솔깃해 할 인물이 말이다. 어제 있었던 일은 가물가물해도 70년 전 그때의 일은 오히려 더 또렷한 법. 추억을 재생시키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청춘을 닮았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운영하면서 그와 말레나의 사랑이 어떻게 마무리가 되어질지에 대해서 오래오래 함구한다. 끝까지 인내를 갖고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만나볼 수 없게끔 말이다. 다행히 그 기다림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잔잔한 여운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  

작가는 다른 소설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서커스 관련 자료를 보게 되었고, 하려던 이야기도 미뤄두고 서커스를 소재로 한 새 이야기 창조에 올인했다. 작품에도 이름으로 계속 언급되는 링글링 서커스 박물관이 실제로 플로리다 주 사라소타에 있어 그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기차 전량을 서커스단으로 쓰는 규모의 서커스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서커스단이 여러 개 있다면 더더욱.... 코끼리를 정원에 풀어놓고 키우는 수의사를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코끼리 공개 처형은 더더욱 다른 나라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일상의 나로서는 만날 수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소설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재미 속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였다면 그 고마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태양의 서커스 바레카이는 22만원에서 6만원까지의 좌석 등급을 갖고 있는데 뭐라도 하나 보고 싶은 마음이다. 과연 6만원 좌석에서도 볼 건 다 볼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내 책은 초판1쇄인데 오타가 몇 개 있다. 

154쪽의 '글세'는 '글쎄'로,
505쪽의 '패트를 뒤지고'는 문맥상 '뒤집고'가 맞을 것 같다.
554쪽에는 역자가 덧붙인 글에 코끼리를 먹은 것이 소화되는 기간이 제일 긴 동물(22개월)이라고 써놓았다. 납득이 안 간다. 아무래도 임신 기간을 잘못 쓴 것 같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22개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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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벌 2011-05-09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이거 보셨군요`~ 이걸 보셨네요~ 저 이걸 우연히 발견하곤 읽고나서 득템했다`~ 소릴 질렀어요. 진짜로요 ㅎㅎ 작가인 새러 그루언은 새러 그루언은~ ㅋㅋㅋㅋㅋㅋ 전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원작만.

마노아 2011-05-09 21:44   좋아요 0 | URL
아아, 정말 좋았어요. 책의 감동이 커서 영화가 가벼웠어요. 좋은 책이에요. '문학'을 가까이서 만났다는 느낌이 강해서 무척 행복했답니다.^^

순오기 2011-05-1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 영화관에 이거 걸렸는데, 조조는 없고 15시부터 네번 상영하네요.
심야를 가고 싶지만, 새벽 세 시에 민경이가 수학여행 떠나요~ 독도로 체험학습가는데, 날씨가 도와줄런지...

마노아 2011-05-11 20:51   좋아요 0 | URL
원작에 비해 영화가 많이 아쉬워요. 영화보다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느낌이 아주 좋아요.
날이 궂었는데 독도 어땠을라나 몰라요. 맑은 날씨로 볼 것 다 보고 느끼고 와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