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마음 - 루시드 폴 詩歌
루시드 폴 지음 / 안테나북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루시드 폴의 공연을 갔던 적이 있다. 친한 언니가 표가 생겼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갔는데 '음유시인'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잔잔한 노래에 한껏 취해버렸다. 게다가 브라질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듣는 노래인 것은 둘째 치고 처음 들어보는 언어의 그 낯설음이 주는 충격이 꽤 컸더랬다. 저렇게 낯선 언어의 노래를 어떻게 외웠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공연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회자하지 못했던 건, 돌아나오기 전에 언니가 결혼 소식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날이 만우절이었다는 것이다. 난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고, 언니는 진심이었다. 세상에... 형부가 될 사람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늘 공연을 같이 다니곤 했는데 종종 데리러 와주던 사람이었다. 사귀냐고 몇 번 물었지만 번번이 친구라고 해서 난 정말이지 친구인 줄 알았다. 게다가 착하고 상냥하고 죽도 잘 맞고 해서 그럼 저 소개시켜 주세요!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던 것이다. 어이쿠... 말 안 하길 잘했지... 거기까지 말했으면 그 다음부터 두 부부를 어떻게 보았을꼬. 그래서 그 날 받은 충격으로 인해 루시드 폴의 음악과 공연에 대한 감흥이 많이 옅어졌었다. 두 달 뒤 언니는 시집을 갔고, 그 부케는 내가 받았다. 벌써 6년 전 일이다. 털썩... 

최근에 퍼즐을 맞추면서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내내 틀어놓았었다. 작년 방송을 많이 보았는데 '만지작'에서 '만지다'로 옮겨가는 고정 코너에서 루시드 폴을 자주 마주쳤다. 스위스 개그의 선두주자를 달리며 어설픈 유머를 구하사지만 이 사람 좋게 생긴 천상 순둥이 뮤지션이 편곡해내는 곡들은 늘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 루시드 폴의 음악을 다시 오랜만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의 가사를 시집처럼 낸 책으로 인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스웨덴에서 석사를 마치고 스위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이 스마트한 청년은 유학 시절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백석의 시와 마종기의 시에서 위로를 얻었다고 한다. 그의 노랫말도 시를 닮았다. 아니, 그 자체로 시다. 난해하지 않고 속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낸 자연스러운 시.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물이 되는 꿈 

물. 물이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꽃. 꽃이 되는 꿈. 씨가 되는 꿈. 풀이 되는 꿈.
강, 강이 되는 꿈. 빛이 되는 꿈. 소금이 되는 꿈.
바다. 바다가 되는 꿈. 파도가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별. 별이 되는 꿈. 달이 되는 꿈. 새가 되는 꿈.
비. 비가 되는 꿈. 돌이 되는 꿈. 흙이 되는 꿈.
산. 산이 되는 꿈. 내가 되는 꿈. 바람이 되는 꿈.
다시, 바다.
바다가 되는 꿈. 모래가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물. 빗물이 되는 꿈. 냇물이 되는 꿈. 강물이 되는 꿈.
다시, 바다. 
바다가 되는 꿈. 하늘이 되는 꿈.
물이 되는 꿈. 

우리 말이 참 곱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해주는 노래다. 물이 되고 꽃이 되고 씨가 되고 강이 되고 소금이 되고 내가 되는 꿈이라니.... '나'가 아니라 川이라니... 공학도에게서 나오는 이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에 부러움을 담뿍 느껴본다. 

무척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놓은 '국경의 밤'은 이제 고인이 된 루시드 폴의 친구를 생각하며 가사를 만나니 이국 땅에서 친구를 떠올리며 곡을 써냈을 루시드 폴의 젖은 마음이 떠올라 짠하기만 하다. '청년이 된, 그러나 내겐 소년인 내 친구, 그대여'에서 왈칵 슬픔이 솟는다. 친구의 시간은 이 땅을 떠나던 그 때에 머물러 있고, 홀로 세월을 맞닥뜨리고 있다. 소년의 추억을 함께 간직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8분이 넘는 긴 트랙 '사람이었네'는 방송에서 들려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이틀 곡을 고집했다. 가사를 보니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떠올라서 또 다시 왈칵! 

사람이었네 

(......)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란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 

'세상에서 나는 네가 제일 좋아'는 모든 가사의 문장을 다 붙여 썼다. 흡사 이상의 오감도가 떠오르는 연출이나. 가사는 손가락이 오글거리는 애정을 과시하지만, 얼마나 좋으면 이렇게 좋다고 할까 싶고, 이렇게 서로 좋다고 하니 젠장 부러운 걸! 소리가 절로 나온다. 

책의 뒷표지에는 싱글 디스크가 하나 꽂혀 있다. 책의 제목인 '물고기 마음'과 '여기서 그대를 부르네' 두 곡이 담겨 있다. 딱 루시드 폴다운 감성의 노래들이다.  

나의 개인적 성향을 반영한다면 그의 노래는 지나치게 잔잔하고 조용해서 때로 지루할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가 표방하는 '치유의 음악'에 이보다 더 적합한 음색이, 노랫말이 있을까 싶다. 물리적인 약 대신 심리적인 약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바람대로, 오래오래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는 그런 명약 제조자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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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5-0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발의 타이밍을 앞서가서 소개시켜 주세요!라고 말했고 그 뒤의 사태는 일파만파...질투쟁이에 소심쟁이인 그녀는 저에게 왠만하면 연락하지 않습니다^^;
이 가시내야! 별생각없다매!! 친구래매!!!

마노아 2011-05-06 21:29   좋아요 0 | URL
으하하핫, 가시내야!하며 덤비기엔 우리가 나이 차이가 좀 있습니다.ㅎㅎㅎ
암튼, 그 간발을 겨우 피했어요. 휴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