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품절


掌篇 2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12쪽

수문 양반 왕자지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속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31쪽

감꽃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60쪽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79쪽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러고 나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119쪽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158쪽

월식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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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09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론 부페음식 같은 이런 옴니버스 시집도 괜찮죠~
전 정끝별이 선별한 '밥'이라는 시선집도 괜찮았어요~^^

마노아 2011-04-10 01:48   좋아요 0 | URL
헤헷, 생각보다 좋았어요. 정끝별 시인의 책도 지금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궁금해졌어요.^^

루쉰P 2011-04-0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대단한 독서의 양이시네요. 만화, 시집 등 끝을 알 수 없는 독서십니다. ^^ 시는 별로 읽지를 않아서 휘트먼이나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찬찬히 올려주신 시를 읽었는데 과연 자신의 생각을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하는 것은 대단한 힘이라고 느껴요. 특히나 '호랑나비돛배'란 시를 읽고 놀랐네요. 리뷰 속도가 그나저나 엄청나세요. 잠도 잊으시고 리뷰를 쓰시는 듯...음...독서오타쿠이삼.

마노아 2011-04-10 01:49   좋아요 0 | URL
만화는 무척 좋아하지만 시집은 가끔 읽어요. 시를 금방 읽는 것은 부끄럽지만 저는 급하게 읽을 때 시집을 선택하는 편이긴 해요.^^
저는 두꺼운 책은 무서워서 웬만하면 잘 안 건드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