掌篇 2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12쪽
수문 양반 왕자지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속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31쪽
감꽃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60쪽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79쪽
호랑나비돛배
고진하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 가파른 목조계단 위에 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 문득 개미 한 마리 나타나 뻘뻘 기어오더니 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 그러고 나서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 어쭈, 날개는 근사한 돛이다. (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을 받는 돛배처럼 기우뚱 기우뚱대며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 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119쪽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158쪽
월식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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