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 그림으로 보는 히로시마 이야기
나스 마사모토 지음, 니시무라 시게오 그림, 이용성 옮김 / 사계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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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에 관한 연구와 설계․조립은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에 있는 비밀 공장에서,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폭탄을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은 모두 20억 달러쯤으로, 전쟁을 치르는데 들어간 총비용 가운데는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미국 자동차 산업 전체의 규모와 맞먹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16쪽

포츠담 회담을 시작하던 7월 17일 하루 전날, 뉴멕시코 주의 앨러모고도에서 첫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습니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이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는 협상에 참가하는 트루먼에게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7월 26일, 이미 두 개의 원자폭탄이 티니안 섬으로 운반되어 있었습니다. 트루먼은 하루 전에 이 폭탄들을 사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미국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힘을 온 세계, 특히 소련에 보여 주기 위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들어간 비용과, 앞으로 이어질 연구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나랏돈으로 충당하는 일에 대해 국민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21쪽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의 4개 도시로 압축되었는데, 이 가운데 교토는 일본의 옛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당시 전쟁 장관이던 헨리 스팀슨이 반대하여 나가사키로 바뀝니다. (...) 목표 도시들은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신중하게 가려 뽑았는데, 인구 밀집 지역과 중요한 군사 시설이 있는 곳, 또는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큰 공장들이 있는 곳을 먼저 꼽았습니다. 재래식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도시들 또한 우선 검토하였는데, 이것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어 일본인들과 온 세계에 충격을 더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히로시마를 비롯한 몇몇 도시들이 연합군의 폭격을 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뒷날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까닭이었습니다.

-21쪽

일본 시각으로 8월 6일 새벽 1시 45분, B29 폭격기 ‘에놀라게이’가 원자폭탄을 싣고 티니안 섬의 공군 기지를 떠났습니다. 이 폭격기는 두 대의 다른 비행기와 함께 비행했는데, 한 대는 폭발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대는 촬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놀라게이’는 조종사였던 폴 티베츠의 어머니 이름이었습니다. 석 대의 비행기가 출발하기에 앞서 다른 석 대의 비행기들이 일본으로 날아가 히로시마와 고쿠라, 나가사키의 날씨를 살폈습니다. 오전 7시 25분, 앞선 비행기들이 에놀라게이로 날씨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히로시마, 날씨 맑음." 히로시마의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2쪽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 부상자들은 열폭풍에 녹아 너덜거리는 살갗으로 마치 유령처럼 팔을 앞으로 내민 채 걸어갔습니다. 팔을 아래로 내리면 너무나 아팠습니다. 한여름이었지만 그들은 추위에 덜고 있었습니다.

-36쪽

9월 17일, 태풍 ‘마쿠라자키’가 도시를 강타했습니다. 태풍이 몰고 온 큰비 덕분에 원자폭탄이 터진 뒤 도시를 겊고 있던 먼지와 오물들이 깨끗이 씻겨 나가긴 했지만, 태풍은 분명 또 하나의 비극이었습니다.

-45쪽

히로시마 상공 580m 높이에서 일어난 폭발은 1조4천억 칼로리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뿜었습니다. 폭발 당시 폭심의 순간 온도는 섭씨 몇백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폭발한지 0.1밀리초(1밀리초는 1,000의 1초) 뒤 지름 30m짜리 불덩이가 생겨났습니다. 불덩이의 바깥 온도는 섭씨30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불덩이의 지름은 순식간에 500m로 커졌습니다. 불길은 10초 동안 눈부시게 타올랐습니다. 불덩이가 내뿜은 열선 때문에 폭심 근방의 온도는 섭씨3천에서 4천 도까지 치솟았습니다. 공중폭발로 생긴 충격파가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충격파와 땅에서 반사되어 생긴 충격파가 합쳐졌습니다. 폭심 부근에는 폭풍의 압력이 평방미터 당 30t에 이르렀고, 이런 상태는 약 1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재래식 폭탄이 폭발할 때 일어나는 폭풍의 압력이 겨우 몇 밀리초 동안 유지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청난 위력입니다.

-46쪽

1945년 8월 6일 아침에 히로시마에는 대략 35만 명쯤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폭격 뒤에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서 히로시마로 들어왔기 때문에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히로시마 밖의 많은 사람들도 검은 비를 맞고 방사능 낙진에 오염되었습니다. 이렇게 피해를 입은 외부 사람들은 1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한 기의 원자폭탄이 45만 명을 방사능에 오염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8쪽

폭발 때문에 직접 피해를 입었든, 나중에 히로시마로 들어와 방사선을 쏘였든, 방사능에 오염된 45만 명 가운데 13만에서 14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석 달 안에 죽었습니다. 요컨대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들은 세 명에 한 명 꼴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족증, 백내장, 재생 불량성 빈혈, 급성 백혈병, 유산, 불임과 여러 종류의 암에 평생 동안 시달려야 했습니다.

-50쪽

원자폭탄에 사용하는 플루토늄은 방사능이 반으로 줄어드는 데 24,000년이 걸립니다. 반감기가 짧은 물질들은 긴 물질들보다 방사능이 빨리 줄어드는 대신에 더 강렬합니다.

-51쪽

원자폭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1940~1950년대에, 미국의 몇몇 병원과 의료기관에서는 환자들에게 각기 다른 양의 방사능 물질을 투여하는 여러 가지 의학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의사들 가운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했던 유명한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의 영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방사능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생존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작을 것이라는 발표만을 되풀이했습니다.

-56쪽

일본은 앞장서서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왔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원자력 발전소는 짓고 있는 것까지 합쳐서 530개쯤 됩니다. 핵연료를 이용하여 발전을 할 때에도, 무기용으로 플루토늄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우 모두 이것을 안전하게 보관해야만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 물질이 원자로 시설에서 새어나올 위험도 있습니다.(...)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 때문에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어림잡아 모두 350만 명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옛 소련 사람들로 248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미국 사람들은 88만 5천 명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습니다.

-57쪽

핵무기를 가진 나라들은 늘 그것이 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전쟁 억제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이나 옛 소련은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군사 예산 또한 어마어마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모순이 됩니다. 핵무기가 빌미가 되어 핵전쟁이 일어날 번한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1995년에 미국과 옛 소련이 갖고 있던 전략 핵탄두는 모두 1만 7천 개에 이르렀는데, 그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52만 개와 맞먹었습니다.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대형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권 밖으로 발사된 뒤에, 목표물을 추적하여 대기권으로 다시 들어오도록 만든 미사일. 초속 6km로(사냥총의 총알 속도는 초속 1~2km) 최고 10,000km를 (지구 둘레의 1/4)30분 안에 이동합니다. 목표 지역의 사람들은 미사일이 날아오는 것을 보거나 소리를 듣기도 전에 폭격을 받게 됩니다.
-58쪽

핵무기가 널리 퍼지는 현상은 옛 소련이 망하여 냉전 시대가 끝난 뒤로 더욱 심해졌습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일에 예전의 맨해튼 계획에서처럼 엄청난 돈이라든가, 알려지지 않은 기술이 이제는 더 이상 필ㅇ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원자로가 크게 늘어나 플루토늄을 얻기도 훨씬 쉬워졌습니다.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울지 몰라도,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할 뜻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심각하게 위험한 일입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방사능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핵탄두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하에서 성능 실험을 해야 합니다. 방사능은 낡은 핵탄두를 해체할 때에도 새어나옵니다. 이 모든 사실을 합쳐서 생각해 보면, 핵무기가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59쪽

1945.9
맨해튼 계획의 조사단이 히로시마 방문. 단장인 토마스 페렐 박사가 방사능으로 죽을 사람은 이미 모두 죽었으므로 더 이상 방사능 피해로 고통 받을 사람은 히로시마에 없다고 주장
1946.5
일본의 ‘일본영화사’가 1945년 9월부터 만든 기록 영화 ‘원자폭탄의 영향: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미국이 압수(1967년에 돌려받음)
1947.7
미국에서 암환자들에게 플루토늄 이용한 생체 실험을 함
1949.4
미국 대통령이 필요할 경우 다시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
1949.10-12월
미국이 핸포드 상공에서 방사성 물질을 뿌리며 방사능 전쟁 연습을 함
1950.1
미국 대통령이 수소폭탄을 개발하라고 명령. 맨해튼 계획을 지휘했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이에 반대.
1950.6
한국전쟁 발생. 미국이 일본에 미군 기지를 두고 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를 생산, 조달하여 태평양전쟁 뒤 망가진 경제를 회복하는 데 힘을 얻게 됨
1950.8
연합군 사령부가 히로시마 평화의 날 행사를 취소시킴
1950.11.
미국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한국전쟁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발표
1951.10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
-60쪽

1953.8
소련이 중앙아시아에서 첫 번째 수소폭탄을 실험. 소련은 이 실험에서 방사능의 영향을 비교 조사하기 위해, 근방 여섯 마을의 주민 191명을 고의로 마을에 남기고 다른 2만 명의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게 함. 뒷날 한 마을에 남아 있던 40명 가운데 37명이 사망했으며, 그 중 30명은 백혈병을 비롯한 암으로 죽음. 이 실험 내용은 1993년까지 공개되지 않음.
(1953년부터 67년까지 CIA가 인체에 대하여 방사능 실험을 함. 실험 관련 서류는 73년에 파기.)
1954.1
미국이 세계 최초의 핵 잠수함인 노틸러스 호를 진수
1954.3
미국이 마셜 제도의 롱겔라프 섬에서 수소폭탄을 실험하여, 많은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이 방사능의 영향을 받음.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복룡환 호에 타고 있던 어부들이 방사능 낙진에 오염됨. 뒤에 미국은 인근 바다를 오염시켜 수산사업에 손해를 입힌 데 대한 배상금으로 7억 2천만 엔을 일본에 지급함
1954.5
일본에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 일어남. 처음에는 어머니들의 모임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년 동안 3천 2백만 명이 서명.
-61쪽

1955.7
버트란드 러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평화를 촉구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1957년에 열릴 첫 번째 퍼그워시 회의를 준비하기 시작
1955.10
천마리의 종이학으로 잘 알려진 사다코 사사키가 백혈병으로 사망
1956. 5월-7월
미국이 마셜 제도의 비키니와 에니웨톡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함. 실험 내용 가운데는 비행기를 몰고 버섯구름 속을 지나간 뒤 조종사의 방사능 오염도를 측정하는 것도 있었음.
1957.7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세워짐. 이 기구는 핵에너지를 군사용으로 쓰지 못하게 하고 평화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일을 함.
1958.2
미국의 트루먼 전 대통령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함. 히로시마 시의회가 이에 대해 항의함.
1958.3
소련 최고위원회가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선언.
1958.8
미국과 영국도 10월 말부터 1년 동안 핵실험을 중지하기로 결정
(미국이 마셜 제도의 핵실험을 중지하고, 콰잘레인 섬에서 미사일 실험을 시작)
1961.10
소련이 58메가톤급(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보다 파괴력이 4,000배 강한) 수소폭탄 실험을 함.
-61쪽

1962.7
알제리가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벗어남. 하지만 프랑스는 1966년까지 알제리에서 핵실험을 계속함.
1963.8
핵실험에 반대하는 국제 사회의 압력이 커지자 미국과 영국, 소련이 일부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을 체결(1996년까지 125개 나라가 이 조약에 서명). 이 조약으로 땅위와 물속에서 하는 핵실험은 금지되었지만 땅속의 핵실험은 계속됨. 그러나 프랑스는 모루로아 산호섬에서 땅위 핵실험을 계속하겠다고 발표.
1964.10
중국이 신장 지역에서 첫 핵실험을 함
1964.11
히로시마 시의회가 한국에 살면서 치료를 위해 일본을 찾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 원폭 피해자 건강 카드 발급.
1965.12
베트남을 떠나 요코스카로 가던 미군 수송기 ‘티콘데로가 호’가 운반하던 전투기 한 대를 실수로 떨어뜨림. 전투기에는 조종사와 핵무기 한 대가 실려 있었는데 핵무기는 오늘날까지도 찾지 못함
1966.6
일본의 첫 원자력 발전소인 토카이 발전소 가동 시작
-62쪽

1967.1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를 지구 궤도 위로 쏘아 올릴 수 없다는 내용의 ‘우주 평화 이용 조약’이 체결. 다만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허용하기로 함
1967.12
일본의 사토 수상이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들여오지도 않겠다’는 비핵3원칙 발표.
1968.7
56개 나라가 서명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조인. 이 조약에는 핵무기를 이미 갖고 있는 나라는 기존의 핵무기를 그대로 갖고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앞으로도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는 불평등한 측면이 있음.
1969.2
일본 정부가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쓰는 것은 헌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
1969.6
일본의 핵 선박 ‘무추’ 진수
1970.4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히로시마에 세워짐
-62쪽

1972.3
1960년부터 1963년까지 미군이 30차례에 걸쳐 혼슈와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로 핵무기를 운반했다고 한 미군 병사가 증언.
1973.12
한국에서 원폭 피해자를 위한 병원이 문을 열다.
1974.9
일본의 핵 선박인 ‘무추’에서 원자로를 시험가동하다가 방사능이 새어나오는 사고 발생
1974.10
예비역 미 해군 장교가 의회에서 미국 군함이 핵무기를 싣고 일본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증언
(프랑스가 1975년부터 지하에서만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
1975.6
미국 국방장관이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함
1975.10
일왕 히로히토가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원폭 투하는 당시 상황을 볼 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말해 많은 논란이 일어남
1976.10
미국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에놀라게이의 기장이었더 폴 티베츠가 원자폭탄 투하를 재현. 일본의 원폭 피해자 단체가 이에 항의
1976.11
중국이 신장 지구에서 4메가톤급 수소폭탄 실험을 함
-63쪽

1977.7
소련의 인공위성이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서 핵실험 시설을 찾아냄
미국 대통령이 미국에서 중성자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내비침
원폭관련 피해자들을 일컫는 말로 ‘히바쿠샤’라는 낱말을 다같이 사용하기로 결정
1978.1
핵실험에 참가했던 34명의 병사들이 방사능병을 앓고 있다고 미국의 한 과학자가 미 하원 의회에서 증언
1978.11
오스트리아가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함.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중단.
1979.8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히로시마 시장이 :"방사능 피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라고 말함
(팔라우공화국이 3번의 국민투표 끝에 세계 최초로 반핵 조항이 들어있는 헌법 채택. 주민의 79%가 새 헌법에 찬성)
(일본 수상 오히라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보다 많지만 않다면 핵무기를 갖는 것이 일본 헌법에 위배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함)
-63쪽

1980.3
스웨덴이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여 12기의 원자로만을 건설하되, 2010년까지는 이를 모두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
(영국의 맨체스터 시가 도시 안에서는 절대로 핵무기를 들이거나 만들거나 설치하거나 할 수 없다는 비핵화 도시 선언을 함)
1981.3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가 건설하고 있던 원자로를 폭격함. 이에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이스라엘을 비난함.
1981.4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에서 전쟁을 벌임. 이 전쟁은 여러 가지 새로운 무기들의 실험장이 됨
1981.11
유엔 총회에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군사 공격을 금지하기로 결의
1983.11
미국과 소련의 과학자들이 만일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뒤에 따를 길고 어두운 핵겨울이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음
1985.2
뉴질랜드의 수상이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미국 전함의 입항을 금지
태평양의 13개 섬나라들이 남태평양을 핵이 없는 지역으로 삼는다는 라로통가 조약 채택. 프랑스, 영국, 미국은 1996년까지 이 조약에 서명을 거부
-64쪽

1986.1
1965년에서 1977년 사이에 미 해군에서 361건의 핵 관련 사고가 있었다고 미국의 한 민간 단체가 폭로
1986.4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핵무기 제조와 발전용으로 쓰던 원자로에 사고가 나서 원자로가 파괴되고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새어나옴. 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병에 걸리고 유럽 전역에서 음식물이 오염됨
1986.9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나라의 유일한 원자로였던 츠웬텐도프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기로 결정. 이 발전소는 1977년에 완성되었으나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1987.9
필리핀이 비핵 헌법 채택
1988.10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일본이 플루토늄을 선박으로 운송할 수 있다는 데 동의
-64쪽

19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핵무기 6기 개발(1993년 공식 발표)
1991.1
걸프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이라크의 핵 시설 공격
1991.8
히로시마 시장이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저지른 가혹한 범죄들에 대해 일본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함. 히로시마 시장은 또한 히로시마가 전 세계의 핵실험 피해자와 핵 시설 관련 사고의 피해자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강조.
1992.3
일본이 아오모로 현 로카쇼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가동
1992.6
히로시마에서 열린 유엔 군축 회의에서 미국의 한 대학 교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백만 명이 넘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라고 주장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은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우라늄을 농축하거나 플루토늄을 제조하지 않겠다고 밝힘
1992.11
일본의 화물선 아카츠키마루가 프랑스에서 일본으로 플루토늄을 싣고 와 세계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음
1992.12
남한과 북한이 한반도를 비핵화하기로 뜻을 모음
-65쪽

1994.1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를 비핵화하기로 약속
1994.2
유엔 핵 사찰단이 이라크에서 40kg의 농축 우라늄 압수
1994.6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핵 폐기장 일부가 파손되어 방사성 물질들이 새어나옴
일본 정부가 ‘핵무기가 반드시 국제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제출하려 하였지만, 나라 안팎에서 비난이 일자 ‘핵무기 사용은 국제법의 인도주의 정신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고침
1994.10
농축 우라늄 600kg이 카자흐스탄에서 미국으로 비밀리에 빠져나감
1996.7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그 위력을 과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국제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발표. 그러나 방아 목적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
1996.11
미국이 앞으로 5년 동안 옛 소련의 핵무기에서 나온 132톤의 농축 우라늄을 구입하여 원자력 발전소에 보내기로 결정
1996.12
제20회 세계 문화유산 위원회가 열려 원폭 돔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킴
1997.6
프랑스가 1985년에 지어진 원자로 슈퍼피닉스의 가동을 중단
-65쪽

1997.8
히로시마 시장이 일본 정부에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라고 처음으로 요구. 이러한 요구는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일본의 핵 정책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짐.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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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0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인가 히로시마 원폭 다큐멘터리를 받는데 참 세상에 있을 물건이 아니란 생각이 부쩍 들었습니당 ㅡ.ㅜ

마노아 2011-04-07 00:08   좋아요 0 | URL
기록을 보니 일본 정부 측에서는 저 무서운 걸 그 무서운 경험을 하고서도 적극 반영해 왔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어요. 요새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기형 사진을 많이 봤더니 무척 심난합니다. 정말 세상에 없어야 할 물건이에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