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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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투쟁’에 비해 군사적 측면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에 비해 투쟁은 무력충돌이 아닌 다양한 대립과 대결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점을 고려해 나는 문화전쟁이 아니라 문화투쟁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문화투쟁에서 말하는 문화란 정치, 사회, 경제 등과 같이 세분화된 특정 분야가 아니라 그 총합으로서의 문화다.
-62쪽

정조가 청산 대상으로 여긴 소품문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글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종래 선비들의 애호를 받아온 "고문"과 어떻게 달랐을까.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형식 면에서 볼 때 소품은 고문에 비해 문장의 길이가 짧다. 구어를 많이 섞어서 사용한다. 그리고 고문과는 글의 구성 방법도 달랐다. 소재와 내용도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소품은 고문에서 불문율로 되어 있는 금기 사항을 무시했다.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비밀,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등을 주로 다뤘다. 요컨대 생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115쪽

소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글쓰기의 주관성에 있다. 감성적인 글쓰기, 자기 고백적이고 감정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이 소품의 대종을 이루었다. 자기 고백적인 산문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소품의 문학사적 기여였다. 소품을 좋아하면 자연히 성리학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해진 격식을 떠나 글쓴이의 눈으로 사물을 직접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치의 다원화가 이루어진다. 중국에서 양명학파의 사상이 소품에 깊이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정조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다. 왕은 이단의 문이 한 번 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이라며 걱정했다.
-115쪽

소품은 글의 성격상 글쓴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더러 그런 마음을 글로 옮기다 보면 글씨체 역시 글의 내용에 상응하여 비뚤고 기울어지고 나부끼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정조는 이런 풍조를 참지 못했다.

-127쪽

그는 만물의 생육을 주재하는 조선의 왕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달마다 강우량을 기록했다. 적어도 신해년(1791) 이후 9년째 강우량을 기록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대궐에서 측정한 서울의 강우량이었을 것이다. 왕이 이런 기록을 사적으로 작성, 보관한다는 것 자체가 신하들에게는 하나의 ‘경이로움’이었을 것이다. 왕의 꼼꼼함과 치밀함은 조정 신하들을 감복시킬 때가 많았다.
-133쪽

박지원은 노론의 핵심가계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와 장인은 박지원이 명분 없이 출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또한 정조 초년의 정치적 상황은 박지원에게 대단히 불리했다. 예컨대 홍국영과 박씨들의 긴장관계가 문제였다. 박지원은 준론 탕평이 본격화되자 음직을 통해 벼슬길에 나아간다.
-151쪽

마테오 리치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해주되 단순히 유능한 신부가 아닌 정말 탁월한 신부만 엄선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선교 대상인 중국인들이-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고관대작과 황실 인사들이겠지만-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 파견된 초기 예수회 신부들은 하나같이 특출했다. 언어적 재능은 물론이고 인문과학적 박식함을 넘어 자연과학과 기술 또는 예술에 정통한 선교사들만 중국으로 건너왔다.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생겼다. 교황이 이끌던 서양의 천주교회는 과학과 근대에 대한 반동 세력이었지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기계문명의 애호자, 창달자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그런 흐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천주교회의 세계관이 이를 용인하지 못했다. 중국의 경우 18세기 후반경 선교사들의 기술적, 과학적 기여가 사실상 막을 내린 듯하다.
-188쪽

사료를 읽는 역사학자의 눈은 흐려지기 쉽다. 함부로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기도 어렵다. 역사학자인 나는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 기록을 통해 다른 기록의 거짓을 밝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자와 역사학자는 영원히 술래잡기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때로 그들 둘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기록자와 역사가의 문제는 영원하다.

-233쪽

18세기 서양에 공산혁명과 거리가 먼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있었듯, 강이천도 이를테면 그런 "공상적" 지식인이었다. 생시몽(1760-1825) 같은 이는 사적 소유 제도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했다. 하지만 아직 노동자계급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적 한계를 인식해 노동자계급을 단순한 구제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강이천도 비슷했다. 그는 한편으로 중국과 조선의 기성 왕조가 붕괴될 시운이 박두했다고 믿었고, 그날이 오면 자신을 비롯해 동지들이 뜻을 펴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고 예언과 소문 그리고 몇 가지 징후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242쪽

강이천은 정치조직을 만들어본 경험이 전무했다. 정치투쟁 이력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꿈꾸는 능력, 상상의 힘이었다. 그는 현실의 혁명가로서는 부적격했다. 그저 몽상적인 지식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몽상에 파괴적인 힘이 있었다. 당시 몽상의 힘을 바로 인식한 이는 아마 국왕 정조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강이천의 제어되지 않은 상상력이 현실과 단단히 결합될 경우 그것은 국가를 전복시키고 성리학 중심의 조선 문화를 여지없이 파괴시켜버릴 수 있다는 걱정, 왕은 바로 그런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246쪽

먼 훗날 일이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1909년 겨울,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이유로 신자인 안중근을 파문시킨 적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공동체의 안전과 사회적 평판을 위해서라면 강이천 같은 이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314쪽

왕은 자신의 처지에서 휘두를 수 있는 최강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하나의 답을 찾았다. 바로 문체반정이요, 글씨체의 통제였다. 왕은 지식계층을 상대로 한 사상검열과 세뇌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효과적인 장치는 과거시험이었다. 과거시험은 권력에 다가서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왕의 방침은 현명한 것이었다.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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