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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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록 정조를 편애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책이 끌렸던 것은 제목의 정조가 아니라 '불량선비' 때문이었다. 불량식품이 꾸준히 인기를 끄는 것처럼 반듯할 것 같은 선비의 불량함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이천은 표암 강세황의 손자다. 김홍도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강세황은 문인이면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진 이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강이천은 조부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자연스레 자유분방한 가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이사항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눈이 애꾸였고 종기 때문에 다리도 불편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일찍이 정조의 눈에 띠어 실력을 보인 바 있고 성균관 유생 시절 학점도 좋은 편이었다. 북인 명가의 후예였던 강이천은 1797년 혹세무민의 죄로 유배형에 처해졌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청나라에서 밀입국한 주문모 신부와의 연계성으로 재조사 받는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혹세무민'이라고 명명한 그의 죄명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는 정감록 류의 진인을 기다렸고 조선이 곧 멸망하고 새 나라가 세워질 거라고 기대했다. 특유의 언변으로 사람을 끌어들였고 자금도 모으고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도 꿈꾸었다. 이쯤 되면 불량하다기보다 '불온'해 보인다. 그의 이상은 큰 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발각되어 접혀졌지만 성리학 질서의 조선 사회의 전복을 꿈꾼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강이천 사건은 발생 당시 그 전모가 비교적 빨리 수습되었고 정돈되었다. 관련자들이 유배를 가는 선에서 끝내고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실 확대시키지 않으려는 모종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이천과 같이 회합을 가졌던 김건순이 같이 걸렸고, 김건순은 천주교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김건순을 처벌하자니 노론 명문가가 타격을 입고, 더불어 천주교를 많이 믿고 있던 정조가 키우는 남인 세력들도 같이 위험해졌다. 형평성에 어긋났지만 정조는 사건을 키우지 않음으로 인해 정치적 부담을 덜어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조는 강이천이라는 인물이 가진 상상력의 크기, 그 몽상의 여파가 장차 큰 해일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동을 걸기로 작정했다. 이른바 '문체반정'이다. 물론, 정조의 문체반정은 강이천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대대적인 '문화투쟁'을 기획/실시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소품은 글의 성격상 글쓴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더러 그런 마음을 글로 옮기다 보면 글씨체 역시 글의 내용에 상응하여 비뚤고 기울어지고 나부끼는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정조는 이런 풍조를 참지 못했다. -127쪽 

 일찍이 소품문을 경계했던 정조는 이제 아예 글씨체까지도 단속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시험에서 굵고 반듯하지 않은 글씨체의 글은 아예 받지도 않게 했던 것이다.

정조가 청산 대상으로 여긴 소품문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글의 형식과 내용 면에서 종래 선비들의 애호를 받아온 “고문”과 어떻게 달랐을까.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형식 면에서 볼 때 소품은 고문에 비해 문장의 길이가 짧다. 구어를 많이 섞어서 사용한다. 그리고 고문과는 글의 구성 방법도 달랐다. 소재와 내용도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소품은 고문에서 불문율로 되어 있는 금기 사항을 무시했다. 사회적 소외와 개인의 비밀,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등을 주로 다뤘다. 요컨대 생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소품의 가장 큰 특징은 글쓰기의 주관성에 있다. 감성적인 글쓰기, 자기 고백적이고 감정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이 소품의 대종을 이루었다. 자기 고백적인 산문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소품의 문학사적 기여였다. 소품을 좋아하면 자연히 성리학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해진 격식을 떠나 글쓴이의 눈으로 사물을 직접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치의 다원화가 이루어진다. 중국에서 양명학파의 사상이 소품에 깊이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정조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다. 왕은 이단의 문이 한 번 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이라며 걱정했다. -115쪽 

이 책에서는 '소품'과 같은 단어 정도는 독자가 이미 알 거라고 여긴 것인지, 아니면 찾아서 확인하라는 것인지 친절한 설명 같은 것은 없다. 소품은 산문류의 글쓰기로 받아들이면 적당하겠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대중들이 정조라는 국왕에게서 기대하거나 혹은 설정해둔 이미지에서 꽤 벗어나는 검열의 칼이었다. 그에게 덧입혀진 개혁군주라는 이름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적이었다. 그리하여 정조를 개혁군주라 부르고 그 시대를 르네상스라 부르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들에게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증거물이 되곤 한다.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런데 그가 살고 있던 시대와, 또 그의 삶의 궤적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조선의 임금은 본시 권력이 약했다. 양반 개개인과 비교하면 왕 개인의 권력이 강하겠지만, 양반 전체로 묶어버리면 임금은 약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사람이다. 즉위 전부터, 또 즉위하자마자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온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보수적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아닐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으로 무장해야만 하는 임금으로서 그의 사상적 한계는 뚜렷했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왕의 자리를 지킬 수도 없고, 왕으로서 개혁을 추진할 수도 없고 그가 소중히 키워내고 길러내고 밀어주던 인사들마저도 지킬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천주교와 접촉하고, 나아가 진인의 도래를 기다리며 왕조의 멸망을 내다본 강이천 같은 인물은 지극히 위험분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예민하고 꼼꼼하고 치밀했던 국왕이 내민 카드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참에 원수 같은 노론을 쓸어버리겠다고 사건을 확대했으면 어땠을까. 그의 최후가 연산군을 닮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저자의 상상력은 무척 재밌었다. 역사의 소수자이며 그늘에 가려질 법한 인물을 재조명해서 거기에 얽힌 정치, 사회, 경제, 종교에 걸친 조선의 문화투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으니까. 보통 역사학자들은 어떤 주제를 연구할 때 참고문헌을 일단 모두 읽고 조사한 뒤 작업에 들어가기 마련인데 본인은 미리 가설을 만들어 놓고 접근하는 습관을 가졌다고 한다. 관련 논문이나 참고도서를 다 읽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므로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보이는데 우려도 든다. 본인이 세워둔 가설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관성이 많이 개입되지 않을까 하고. 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어떤 주장들에 자꾸 갸우뚱하게 되었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흔히 신유박해의 원인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가 많은 남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탄압을 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남인은 어차피 권세가 약했고, 굳이 집권층인 노론이 천주교 박해 사건을 일으켜 남인의 일부를 처단해야 했냐는 것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미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고 해서 권력을 더 독점하려는 마음이 없을까? 숙종 때의 환국만 보더라도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 한쪽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있는 데로 밟아주던 것이 그들의 암묵적 룰이었다. 저자는 신유박해의 원인에 대해서 설득력이 약하다고만 해놓고 그러면 자신은 어떤 게 원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밝히지도 않았다.  

저자는 천주교가 평등사상을 전파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는 말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이고, 그때 천주교는 프랑스 혁명의 적이었는데 그런 천주교가 조선에서 평등사회 건설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글쎄, 그게 왜 말이 안 되는지 이 문장에서 나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격변기에 황제가 되려 했지만, 그의 정복 전쟁이 오히려 프랑스의 혁명 정신을 유럽에 퍼뜨리게 된 것처럼 역사의 아이러니는 얼마든지 있다. 이 책에서도 나온다.  

마테오 리치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해주되 단순히 유능한 신부가 아닌 정말 탁월한 신부만 엄선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선교 대상인 중국인들이-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고관대작과 황실 인사들이겠지만-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에 파견된 초기 예수회 신부들은 하나같이 특출했다. 언어적 재능은 물론이고 인문과학적 박식함을 넘어 자연과학과 기술 또는 예술에 정통한 선교사들만 중국으로 건너왔다.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생겼다. 교황이 이끌던 서양의 천주교회는 과학과 근대에 대한 반동 세력이었지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기계문명의 애호자, 창달자로서 기능했다. -188쪽 

정조의 보수성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으레 역사상 뛰어난 인물들은 진보 성향을 띠기 마련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했다. 동의한다. '진보'라는 단어가 주는 시대적 과제가 또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곤 한다. 그런데 원래 '보수'라는 게 나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보수의 외피를 뒤집어 쓰는 반동이 나쁜 것이지 보수 자체를 욕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정조가 정약용이, 박지원이... 그들이 보다 진보적이어서 시대를 견인해 가는 훌륭한 바퀴가 되어주었더라면 더더더 좋았겠지만, 기대하는 진보성향이 부족하면, 그들은 더 이상 훌륭한 인물이 되지 않는 것일까?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그것을 성토하는 것은 좀 마뜩찮아 보인다. 심지어 정조의 문체반정이 고종의 개화정책의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소급하는 것은 지나친 침소봉대라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강이천이 새로운 문화를 지향했으며 그것이 동정심과 자애가 가득한 세상이라고 본 것도 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추정해 본 강이천이 꿈꾸는 새 나라는 정치형태상 여전히 왕조 체제를 답습할 것이고, 차별적인 신분제 역시 폐지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새나라의 가치체계는 성리학 지상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왕조 국가에 신분제도 그대로인데 성리학 지상주의만 벗어나면 그 나라는 새나라인가? 백성들도 그런 나라를 새나라로 여기고 기다리고 행복해할까? 내가 보기에 강이천은 '혹세무민'이라고 했던 그의 죄명이 그대로 들어맞는 그저 몽상가 쯤으로 보인다.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휴거설을 믿는 어떤 종교집단의 사람들이 재산을 다 처분했던 해프닝이 떠오른다.(강이천도 김신국에게 말세를 얘기하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쌓아두고 있으니 자금을 내놓으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신이 되지 않는 사람이 평천하를 어찌 할까 싶었다. 책에서 소개된, 그러니까 강이천이 심문과정에서 보여준 행보 등은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어떻게든 역적의 이름은 쓰지 않으려고 죄를 축소시키기 위해 얼마 전까지 동지였거나 자기 때문에 끌려들어온 사람들을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다. 그뿐 아니라 김건순의 배교 과정도 몹시 실망스러웠다. 천주교에서 순교자로 추앙하는 인물이라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천주교와의 관계를 축소하거나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에 대한 실망은 주문모에 대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애초에 이 사건은 정조가 의도적으로 축소해 버려서 몇몇의 유배형으로 끝날 일이었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때 무수한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걸려들어간 것은 제발로 자수한 주문모가 관련자 명단을 죄다 불었기 때문이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도 받지 않은 주문모가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일 사람들의 이름을 다 댔다는 것은 도무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자의 추정대로 누군가에게 속거나 어떤 타협이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망이 가시지 않는다. 그의 무지나 혹은 무분별로 넘어가기에는 흘린 피가 과하기 때문이다.  

강이천의 사건을 계기로 정조가 예민한 촉수를 들어 문화투쟁을 벌였다는 저자의 가설에 설득력이 있다. 그 파급 효과까지는 쉬이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뭐랄까... 그런 기분이다. 정조에 대한 과도한 미화와 이상화에 대한 반발로 과하게 깎아내리는 인상? 그러니까 '빠'가 싫어서 '까'가 되는 그런 느낌. 속된 표현에 조금 죄송하지만...^^ 

어떤 부분은 몹시 재밌었고 또 설득력도 있었다. 그런 반면 또 어떤 부분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고 좀처럼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와 접근은 반갑다. 다음 기회에는 정조와 이옥에 대해서 공부해봤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문체반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보는 거다. 

덧글) 책에 오타가 있다.  

191쪽 18세기 후반에는 한동안 신지식을 중시하는 사대적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 맞는 것 같다.
226쪽 전에 배우던 육임 등에 관한 책을 무도 불살라버렸다고 합니다. >>>'모두'가 맞지 싶다.
329쪽 순조원년(1801)>> 순조는 1800년에 즉위했으니 1800년이 순조의 원년이다. 표기나 연도 둘 중 하나가 틀린 듯. 

264쪽은 무려 제본 불량이다. 



고작 저것 때문에 책을 교환해야 하는가? ㅠ.ㅠ 

좌우 여백이 너무 넓은 것도 흠이다. 보통은 북다트를 끼우면 글자가 가려지는데 끼우고도 공간이 남는다. 좌우 여백을 조금만 줄였더라면 종이를 많이 아꼈을 것이다. 책값도 조금 줄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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