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 Just Stories
박칼린 지음 / 달 / 201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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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합창 편은 내가 본 남자의 자격 첫 번째 이야기였다.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 석에 앉은 예쁜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같은 여자가 봐도 참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이후 합창단이 결성되고 연습을 하고 거제도에서 합창대회에 참석하기까지 빠짐 없이 챙겨보았다. 원래 노래가 주는, 게다가 합창이라는 하모니가 주는 감동이 있는 법이지만, 오합지졸에서 시작했던 그들이 그렇게 어우러져 멋진 무대를 장식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방송 이후 박칼린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쉴 새 없이 번쩍였다. 십 수년 전 명성황후 신문 기사도 포털의 메인을 장식했고, 그녀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도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 무렵에 이 책이 나왔다. 출간 시기만 본다면 인기를 확 끌고 있을 무렵에 덩달아 나온 것 아닐까 생각하기 쉽지만 내용을 읽어 보면 급하게 써서 나온 책은 아닌 것 같았다. 혹 좀 더 다듬어 나중에 나올 수도 있었던 책이 마케팅 차원에서 이 무렵에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또 나쁜 것도 아니지만, 암튼 밀도가 떨어지는 책은 아니었다. 음악 실력만큼 문장 실력도 우수하진 않았어도...^^ 

천천히 읽었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소설처럼 빠르게 읽히거나 빨리 읽고 싶어지는 장르도 아니니 서두를 것 없이 조금씩 야금야금 읽어내려갔다.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무릎팍 도사처럼 어린 시절부터 순차적으로 시간 순서로 이야기를 뽑아낸 것이 아니라 딱히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내키는 대로(내 생각에)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적은 느낌이었다. 그녀를 알게 해준 남자의 자격 이야기는 책 말미에 아주 조금 나온다. 왜 그런 설정으로 구상을 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 답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력이 정말 화려하다. 그녀를 구성하고 있는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모든 환경이 다양한 것처럼 살아온 족적도 그만큼 다양하고 다채롭고 화려하다. 한 사람이 하나의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익히고 또 뿌리며 살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로울 만큼! 

박칼린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아주 어릴 적에 한국으로 돌아와 열살 무렵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고등학교 때 1년 간 한국(부산)에서 학교를 다녔고, 다시 미국에서 대학을, 그리고 한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했다. 첼로를 전공하면서 마칭 밴드에서 테너 색소폰을 배웠고, 콘서트 밴드에서 오보에도 배웠고 퍼커션도 배웠다. 한국에서는 무려 박동진 선생님께 판소리를 사사받았다. 그밖에도 그녀가 어려서 만난, 또는 일하면서 알게된 인연 중에는 숱한 거장들이 있었고 놀랍게도 '우연'에 기반한 이끌림이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런 행운아를 보았나! 하며 감탄하게 된다. 열심히, 적극적으로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그같은 길의 앞잡이가 되어주었겠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행적들에 기가 죽을 지경이다.  

어머니는 리투아니아인인데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그 어머니가 소련이 무너지면서 드디어 고향 땅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에 있던 박칼린은 미국의 어머니가 리투아니아에 가져갈 선물로 손수 만든 십자가를 어렵사리 부쳤다. 두 손을 모두 다쳐가며 가족의 이름을 모두 새긴 나무 십자가가 극적으로 어머니께 도착했고, 어머니는 그 십자가를 고향 땅에 가져갈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먼저 이 책을 읽은 분께 이야기로 들었는데 들으면서도 막 눈물이 났더랬다. 얼마나 감동적이던지... 그런 생각을 해낸 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온통 십자가로 뒤덮인 언덕을 보니 그네들의 문화였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엌칼로 나무를 다듬어 이름을 새긴 그 정성과 땀방울의 가치는 결코 바래어지질 않는다.  

또 나를 감동시킨 에피소드는 송일곤 감독과 함께 폴란드 여행을 했던 이야기다. 폴란드를 거쳐 리투아니아로 함께 가기로 했는데 폴란드에서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나 겨우겨우 극적으로 리투아니아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된 시간을 하루 넘겼을 때였다. 게다가 기차역도 아닌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마중 나오기로 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공항에서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내민 빵 한 덩어리!  

"폴란드가 파업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지. 기차역이 마비되었을 테니 혹시 비행기로 오지 않을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먼 길 오는 손님이 마을에 도착하면 우리는 마을 앞까지 마중을 나가. 이 빵을 줘야지. 오느라 배고플 테니 어서 먹어. 우리는 원래 그래." -124쪽 

낯선 곳에서 뜻밖에 마주친 파업과 어긋난 도착으로 발을 동동 굴렸을 그녀와 일행이 맞닥뜨린 구원은 참으로 따스했다. 빵 한 덩이를 준비했다가 먼저 내미는 그들의 문화도 훈훈하기 그지 없다.  

박칼린의 이야기 속은 넓다. 물리적인 거리도 대륙과 대륙을 오고 가고,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세를 그려낸다. 음악과 미술과 과학과 상상의 세계, 무대와 음악과 연주, 그리고 배우들의 이야기까지... 정말 종횡무진이다.  

글 속에서는 딱히 힘들거나 괴로웠던 순간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다. 어려서 겪은 첫 인종차별에 대한 쇼크가 잠시 언급되었고, 청학동 한풀 선사와의 우정이 이간질로 인해 장벽을 만난 이야기 등이 다소 안타까웠지만 그밖의 다른 이야기들이 지나칠만큼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어서 금세 잊혀지고 만다. 아이가 언어를 쉽게 익힐 수 있는 나이를 고려해서 교육 환경을 바꿔주시는 부모님, 아침에 아이를 포옹과 키스로 잠을 빼워주는 엄마, 여행의 참 재미를 알려주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엄마와 언니들, 성장 과정에서 함께 하숙하며 알게 된 무수한 세계인들까지... 그 모든 게 그녀의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삶의 텃밭과 거름이 되어주었다.  

타고난 그녀의 복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그녀가 검은 피부를 가진 채 우리나라에서 성장을 했더라면, 악기라고는 전혀 배울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더라면, 여행은커녕 하루하루 밥벌이에만 급급한 생활 환경이었다면... 의미 없는 질문이기는 한데 이런 생각들이 이 화려한 빛깔의 영롱한 그녀에게서 자꾸 거리감을 갖게 한다.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고, 이런 정보가!!하며 눈을 크게 뜨게 만드는 재미난 이야기도 많고, 평소에 알지 못한 무대 뒤 이야기까지 모두 재밌기만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하다. 너무나 공통점이 적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덜 되는 것도 이유일 것이고, 부러움에 눈이 먼 질투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책임을 전가하여 그녀의 부족한 필력 때문일지도..^^ 

그냥...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감동적이고, 적당히 자극도 되는 그런 책이었다고 마무리를 지어본다. 읽어 나쁜 책은 아니었는데 딱히 아주 큰 장점도 별로 못 느꼈다. 그녀에게 느꼈던 매력을 이제 덜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이다. 삶 자체가 후끈후끈하다. 작가와 독자로서의 만남은 그냥... 정도였지만, 무대 감독의 그녀와 관객으로서의 만남은 이후로도 계속 기대를 가득 담을 작정이다. 그녀 역시 그걸 가장 원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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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2-1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읽고 나면 제목 한 번 잘 지었다 생각되지요~ 딱 거기까지. 그냥~ ^^
십자가 이야기가 최고의 감동을 불러왔지만... 낚여서 책 사신 거 같아 조금 미안해지는.ㅋㅋ

마노아 2011-02-15 10:54   좋아요 0 | URL
헤헷, 순오기님께 얘기 듣기 전에 산 거예요. 그러니까 '알사탕'에 낚였던 거죠.^^
뭐랄까... 이번 논쟁의 김영하스런 입장.. 그런 느낌이었어요. ;;;

마녀고양이 2011-02-1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김빠진 맥주 같죠, 이 에세이? ㅠㅠ
나름 이쁘긴 하지만, 박칼린이라는 카리스마에 비하면 좀... 좀.... 그냥 그런.
그래서 제목이 '그냥' 일까요? 아하하.

마노아 2011-02-17 13:51   좋아요 0 | URL
충분히 떠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되어 있는 사람이 너는 왜 아직도 안 떠나니? 당장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하여간 제목은 참 잘 지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