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0일
바르트 무이아르트 지음,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제목이 독특했어요. 12월 32일은 (노래로) 들어봤는데 1월 0일은 처음이었거든요. 원제는 '맨손'이래요. 그러고 보니 표지의 하얀 빛은 바로 맨손이었군요. 다시금 바라봅니다. 1월 0일이라고도 불린 맨손을요. 

두 소년이 나옵니다. 바르트(작가의 이름이기도 하군요!)와 베니. 두 아이는 쫓기고 있습니다. 때는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의 마지막 날. 게다가 해도 저물었어요. 춥고 두렵고 위험합니다. 쫓아오는 어른은 베트예만. 그는 한쪽 팔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무지막지한 어른으로 묘사되어요. 아이들은 대체 왜 쫓기고 있는 걸까요. 누가 아이들을 해하려는 건지, 아님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지 처음엔 알 수가 없습니다.  

동물도 나옵니다. 오리와 개. 오리는 아이의 손에서, 그리고 개는 어른의 손에서 죽습니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상대방에 의해 죽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지금 아이들은 쫓기고 있고, 한 어른은 쫓고 있는 겁니다. 당장 내일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데, 이들은 한 해의 마무리를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치르고 있었어요. 대체... 누구 잘못일까요?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앞서 말했듯이 1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것은 알겠는데 날짜 외에는 어느 시간대인지 모르겠어요. 성냥불을 그어서 렌지에 불을 붙인다고 나오니 아주 옛날도 아니지만 요즘도 아닌 것 같아요. 느낌 상으론 우리네 석유곤로 피우던 그런 배경이랄까요? 아무튼 해는 이미 저물었고, 날은 춥고, 아이들은 지쳐 있고, 게다가 상처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베트예만 아저씨의 오리를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요? 오리를 높이 던져버렸는데... 날지 못하는 오리를 높다랗게 던져서 떨어뜨렸는 걸요. 받아줄 생각이었다지만, 애초에 오리를 던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요. 아이들은 왜 죄없는 오리에게 화풀이를 했을까요? 거기엔 또 다른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크리스마스 날 밤의 저녁 식사 말입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까닭을 짚어나가다 보면 거기에 해당되는 어떤 이유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이가 화가 난 이유, 아저씨가 화풀이를 한 이유, 아이가 미워하는 이유가 모두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화가 난다고 해서 아이를 손찌검 하면 안 되는 것처럼, 화가 난다고 해서 남의 집 오리를 던져서는 안 되었어요.  자기집 오리라고 해도 마찬가지죠. 내 오리가 죽었으니까 너의 소중한 개를 죽이는 것도 당연히 안 되는 일이었어요. 당신이 아이이든 어른이든, 당신이 상처를 받았든, 오래오래 외로운 사람이었든...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또 네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네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또 다시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마저도 못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철없는 아이의 즉흥적인 생각이라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말고 입밖에 내서는 더 안 되었어요. 어리고 무지하다는 게 언제나 모든 일의 방패가 되어주지는 않아요. 좀 더 자라서 자신이 내지른 행보의 의미를 깨달을 때가 되면 더 많이 부끄러워질 거예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 아파질 겁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어떤 일의 절대적 이유가 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는 법이거든요. 

한 명은 칼로, 한 명은 맨손으로 공통의 원수를 손봐주기로 아이들은 결심합니다. 살려주는 대신 '벌'은 주어야 한다나요. 맙소사.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요. 게다가 그 명분을 죽은 개 엘머를 위해서라고 갖다 붙입니다. 폭력은 필연적으로 비겁함을 동반하지요.  

확실히 사랑하는 개 엘머를 잃은 바르트는 좀 더 주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쪽이 베트예만 아저씨와의 은원이 직접적으로 쌓여 있으니 동기도 더 가깝지만 그래서 냉정해질 수 없습니다. 아이의 외투 속에는 차갑게 식은 엘머가 품에 갇혀 있고, 아이는 충분히 지쳐 있습니다. 신발의 한 켤레 같은 단짝 친구지만 베니의 장단을 제 속도로 맞춰줄 수가 없어요. 반면 베니는 좀 더 그 시간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것을 하나의 '모험'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아님 사냥? 

베니는 자신에게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베니의 어머니죠. 따뜻하고 현명한, 무엇보다도 어른스러운 엄마예요.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은 새해이니까 지금 이래서는 안 된다고 차분히 말해줄 줄 아는 분이었어요. 아무리 잘못한 게 있어도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었죠. 뿐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그런 가족 울타리가 없는 베트예만 아저씨의 외로움도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말해주는 이도 없고, 고쳐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에 대한 연민을 지닌 분이에요. 그렇게 따뜻한 엄마의 보호를 받는 베니는,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좀 더 버릇도 없고 무책임하고 철도 없습니다. 슬픔을 달래고, 잘못을 반성하고 복된 새해를 맞이하려는 결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너의 그 치기 어린 행동은 우정이 아니라 '독'이라는 것을, 아이도 언젠가는 알게 될까요?  

작품은 길지 않습니다. 142쪽이 끝이에요. 하루도 아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등장인물도 몇 되지 않고, 사건도 단 하나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지요. 그렇지만 짧은 이야기 끝에 깊은 생각을 낳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오고 간 폭력에 대해서... 그들의 미움과 설움에 대해서...  인간의 도리로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해서... 그리고 몸이 아닌 마음의 성장, 참 어른됨에 대해서 말입니다.  

문장도 참 좋았습니다. 허세와 허영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솔직한 문장들이었어요. 동시에 해당 인물의 실제 목소리로 들렸다는 게 더욱 좋았습니다. 번역의 힘도 들어가 있을 거예요.  

   
  딴 생각을 해봐. 아무거나 말이야. 그래도 훌쩍거리지는 마. 네가 울면 이 모든 게 네 잘못이라고, 네가 후회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랑 똑같은 게 되니까. 어차피 베트예만은 네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베트예만은 네가 미안해하든 말든 널 때릴 거야." -33쪽  
   

양파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기듯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을 지켜보는 것도 몹시 흥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났다고 해서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들은 서로에게 잘못했고, 똑같이 나빴어요.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 차가 조금 있겠지만요.  

베니의 엄마가 그랬지요. 새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동의합니다. 마침 글밖 세상의 시간도 새해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요. 1월 1일이 되면 몸도 마음도 새출발 하는 게 좋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마음가짐은 훨씬 다르지요.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게 옳아요. 그게 반듯한 겁니다.  

아직은 1월 0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늦은 것도 아니에요. 정신을 차려봐요. 일단은 슬퍼하는 게 맞습니다. 소중한 누군가가 영영 이별을 고했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의 책임이 제일 크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슬픈 만큰 저 사람의 슬픔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잘못을 했건, 누가 먼저 상처를 주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같이 상처를 치유하는 게 중요합니다.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당신이 힘든 걸 알아요. 모두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그래도 해야 해요.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당신만큼 아픈 저 사람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면, 그 울림과 떨림이 느껴진다면 1월 1일은 보다 가까워진 겁니다. 새출발 할 수 있어요. 지금, 듣고 있어요? 이건 폭력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리고, 당신과 나의... 우리의 이야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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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2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너무나 근사한 리뷰에요. 굉장히 식상한 표현이지만 저는 '책 보다 마노아님의 리뷰가 더 좋네요.' 게다가 문장 하나하나 다 제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에요.

폭력은 필연적으로 비겁함을 동반하지요, 라는 문장은 특히 더요.
아이들은 아저씨의 오리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였어요. 아저씨도 아이들의 개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였지만요.

마노아님의 이 리뷰가 정말 무척 좋아요!

마노아 2011-01-25 12:47   좋아요 0 | URL
헤엣... 다락방 님이 좋아해 주시니까 막 우쭐해져요. 뿌듯하고요. 어깨 쫙 펴고 머리 좀 쓰다듬어야겠어요. 베시시^^;;

다락방 님의 40자 평도 좋았어요. 등장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껴요. 오리와 개에게도요. 아이들 불러다가 때쮜! 해주고 싶었어요.(>_<) 이 책은 내용도 좋았지만 짧아서 더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