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양장본의 느낌은 좋지만 이중 커버는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요새는 띠지가 표지의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어서 더 귀찮아졌는데 디자인도 좋지만 낭비가 심한 것 같다. 이 책은 양장본에 이중커버인데 표지를 벗겨낸 속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보통 작가와 역자 정보는 커버에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이 저 두꺼운 표지 뒤에 가 있으면 좋겠다. 커버를 잘라서 속에 붙이는 것도 참 매번 못할 짓이다. 

장영희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막 출간됐는데, 그러고도 다 엮지 못한 글들이 남아 있었나 보다. 고맙게도 이렇게 다시 그 흔적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에세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도 장영희 선생님 글들은 잔잔하고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어주어서 좋았다. 지나치게 교훈적이지도 않고, 너무 개인적이어서 공감을 못하게 하지도 않고 딱 적당히 보편적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중용의 힘이 있었다. 이 책의 에피소드들도 그랬다.  

대부분의 글들은 문학전도사 답게 영미 소설이나 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 컨셉의 칼럼 연재를 하셨던 건데 그 신문들이 모두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여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참 강경조의 신문들인데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살가운 느낌의 글을 채워주셨던 건 아닐까, 선생님의 글은... 

교단에 계셨던 분인지라 학생들과의 이야기도 많이 있다. 그 학생들과의 일들은 다른 기억들을 찾아내게 하고, 그 안에서 그날의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선생님이 느꼈던 어떤 감동과 깨달음은 그렇게 신문 독자들에게, 다시 이 책의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영감을 주었던 그 대상자들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 자신도 흐뭇하겠지만 몰라도 좋다. 그렇게 퍼진 향기는 저절로 본인에게 돌아갈 테니까... 

66쪽에 소개된 피자 배달 청년의 인터뷰 내용이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진행자가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좋은 냄새가 나는 가정을 갖고 싶다고 답한 것이다. 피자 배달을 하기 위해서 현관문에 들어섰을 때 집집마다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단지 화학적인 냄새가 아닌 정서의 냄새였다. 아늑하고 따뜻한 사랑의 냄새가 나는 집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냉랭하고 서먹한 냄새가 나는 집도 있는 것이다. 그가 원한 건 아늑한 냄새가 나는 집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게 어떤 냄새인지 알 것 같다. 지금처럼 추운 계절에 맞닥뜨린 냄새라면 더더욱 절실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가정의 냄새도 그렇거니와 개인의 냄새도 생각해 보게 한다. 나에게서 나는 향은 어떤 것일지... 누군가 꺼리는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혹은 무색 무취에 무미건조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본다. 선생님이 돌아보신 것처럼... 

 

75쪽의 이야기도 참 좋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제이미는 연말 학예회 연극에서 배역을 맡고 싶어했다. 엄마는 아이가 배역을 맡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는데 학교 정문을 나오는 제이미의 두 눈은 자부심과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엄마는 무슨 대단한 역을 맡았나보다 기대를 했는데 아이의 대답이 걸작이다. "엄마, 나 손뼉 치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뽑혔어요!"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교과서에 실린 수필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수풀 역할이었는데 엄마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서 끝나고 나서 뭐라 말해줄 것인지 걱정했는데 아이는 엄마가 보지 못해서 제 실수를 못 알아차린 걸 다행으로 여겼다는 그 이야기...  

제이미의 이야기에서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감동적이었고, 동시에 아이에게 그런 자부심을 준 선생님도 놀라웠다. 배역을 맡지 못한 친구들이 더 많았을 터인데 그 아이들에게 너희는 손뼉 치고 응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주셨을 테니 말이다. 이 이야기는 '가능하면 자주 감동을 한다'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얘기에 수록되어 있었다. 벅차고 거창한 감동도 물론 좋지만, 삶에서 마주치는 이런 소소한 감동이 진정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백신이 될 것이다.  

선생님이 미국에 머물 적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보통은 '사과'하면 빨간 동그라미에 꼭지 한 개 달린 것을 떠올리는데, 한 입 베어 먹은 반쪽 사과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남과 '다르게' 생각한 재미있는 발상이다.
'다르게 생각하라'(...)집단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보다 조금 더 창의적으로, 한 번쯤 다른 방향으로, 조금은 엉뚱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한 집단에서 이질감, 소외감, 부조화를 불러일으키고 소위 '왕따' 당할 수 있는 요인도 되므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말도 된다.
다양성을 기초로 시작한 나라니만큼,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할 뿐 아니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권장하는 것은 아마도 미국이 미국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일 것이다. 다른 모습, 다른 문화, 다른 언어 그리고 다른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다름' 속에서 통일성을 찾으며 변화의 기조로 삼는 것이다. – 108쪽


유난히 심한 길치였던 선생님은 미국에서 길을 너무 헤매다가 문학적 감각을 살려서 길찾기에 응용한다. 그때 건물을 찾아가면서 되짚었던 애플의 로고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격과 색깔을 드러나게 해주는 예였다. 나쁜 사례에도 워낙 많이 이름을 올리는 나라지만, 배울 것도 물론 많은 나라다. 어느 나라인들 안 그렇겠냐마는...  

시애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미국 친구가 연구실에 맡기고 간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에게 '둥근 새'라는 제목의 동화를 읽어주었는데, 이 새는 몸이 동그랗고 날개가 작아서 날 수가 없었다. 무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둥근 새는 나는 것에 실패한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선생님은 둥근 새가 다른 새처럼 날아가는 끝이 아니어서 아쉽지 않냐고 묻는데 시애나가 의아한 듯 대답했다.  

"왜요? 둥근 새는 날지 못하지만 아마 둥글둥글 잘 구를 걸요." 

우문현답이다. 우리는 모든 새는 날아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문화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면 펭귄더러도 날라고 하고 타조랑 닭한테도 날라고 강요하지 않을까. 나부터도 그러고 살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같이 소개된 루스 시먼스 인터뷰 내용의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해서 노력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로 포기도 미덕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도 함께... 

 

137쪽의 경호 엄마 얘기도 먹먹하다. 경호는 키가 5,60cm 밖에 되지 않는 왜소증 환자다. 엄마가 휠체어에 태워서 공부를 시켰는데 한국 중학교에서는 교실이 3층에 있어서 1층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해서 전학을 가야 했다. 전학 간 학교는 화장실이 건물 밖에 있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야 했고 층계도 있어서 학교 다니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경호를 위해 공무원 아버지는 집을 팔아 경호 동생과 함께 본가로 가고, 경호 엄마는 경호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아침에 경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낮 동안 이집 저집 청소를 하면서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한다고 한다.  

"경호를 학교에 두고 나올 때 자꾸 뒤돌아보곤 하지요. 일을 하다가도 경호 학교 쪽을 쳐다보기도 하고요." 
"왜요? 걱정이 돼서요?"
"아니요. 우리 경호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공부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뻐서요." 

남들은 우린라 교육이 잘못 되어서, 돈 잘 벌고 크게 성공하라고 자식들 데리고 미국에 온다는데, 경호 엄마는 단지 아들에게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기쁨을 주기 위해 이 먼 나라까지 와서 남의 집 마루를 닦고 있었다.-137쪽 


지탄 받는 문제성 유학도 많지만 저리 애절한 유학 이야기도 분명 많을 것이다. 요즘은 공공기관에서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화장실과 엘리베이터 설치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장애인의 활동을 평범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물리적인 불편과 심리적인 불편 모두 다... 

뒤쪽으로 영시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영시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경우는 장영희 선생님 책을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셸 실버스타인의 시들은 동심 그 자체였는데 시인의 정보를 보니 1950년대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군복무를 했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영국의 시인 퍼시 B.셸리 는 요트 항해 중 익사를 했는데 시신을 화장할 때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고 소개되어 있다.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책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한 시인의 두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때도 시인에 대한 정보는 아래 쪽에 작은 글씨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시들은 시인에 대한 소개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249, 265, 281쪽에서 말이다. 누락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책의 곳곳에 꽃 그림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책의 분위기와 몹시 잘 어울린다. 제목처럼 꽃비가 내리는 것만 같다.  

뒷부분에 이해인 수녀님과 박완서 작가님의 추모 글이 담겨 있고, 장영희 선생님의 일생을 펼쳐보게 만드는 여러 사진들도 소개되어 있다. 

 

첫번째 사진은 도도한 영화배우처럼 보였다. 무척 날씬하셨을 때의 모습이다. 두번째 사진은 미국문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인데 1967년판 너대니얼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이라고 한다. 낡은 책장에 선생님의 손길이 잔뜩 묻어 있다. 학생들에게 힘이 되는 명언을 쓰고 직접 스티커를 붙여 만든 책갈피에서 소녀적 감성이 보인다. 과제를 잘 완수한 학생들에게 하나씩 선물하고 학기 말에 가장 많이 모은 순으로 상을 주기도 했단다. 나의 온라인 애인도 책갈피를 곧잘 만들어 선물하곤 하는데... ^^ 

세번째 사진을 보면서 탤런트 김여진과 심은경이 생각났다.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네번째 사진은 김점선, 장영희, 이해인 수녀님 사진인데 이때 셋 모두 암투병 중이었다. 수녀님 발목이라도 잡고 천당에 같이 들어가야겠다고 써놓은 덧글이 예쁘면서도 아팠다. 이 중 두 분이 벌써 운명을 달리하셨다.  

만화를 좋아해서 직접 그리기도 해서 선물하셨다는 선생님, 그 따뜻한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노래 선물도 담겨 있다. 작은 시디마저도 꽃비가 내리는 모습이다. 벅스에서도 들어볼 수 있다. '서율(書律)'이라고 적혀 있는데 '율'자가 저게 맞나? 붓률 자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음, 모르겠다...;;; 

이 책은 '내가 살던 용산'을 읽고 난 뒤 정서적으로 힘들어서 고른 책이었다. 뭔가 마음을 다독여줄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장애를 안고 살면서 암 투병 중에 돌아가셨던 선생님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소망이 되어주셨던 선생님을 떠올리며 즐겁게 읽었다. 선생님은 하늘에서도 여전히 방향치 길치이실 것 같고, 그럼에도 씩씩하게 문학의 향기에 취해 밝게 웃고 계실 것만 같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여전히, 여전히 따뜻하다. 글도, 사람도, 추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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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10-12-2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예쁜 책이예요.
저도 이중표지, 띠지 모두 싫어요.
책을 볼 때 아주 불편해요. ^^

마노아 2010-12-24 02:08   좋아요 0 | URL
물자 낭비로 이중표지 띠지는 일등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