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할머니 평화그림책 1
권윤덕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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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현대사로 꼽을 수 있는 시간들을 아프게 출발했다. 짓밟혔던 나라를 어렵게 일으켰고, 전쟁과 침략의 폐허 위에서 숨가쁘게 달려왔다.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했던 시절이었고, 어디가 어떻게 고장나고 아팠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던 세월이었다. 그 속에서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미안한, 가장 아팠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할머니 같은 분말이다. 

 

할머니의 골깊은 주름 사이사이에 살아온 시간들, 겪어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엄마에 대한 기억, 언니 동생과의 기억, 전쟁의 참혹한 상처와 꽃누르미 작업을 하는 모습까지. 꽃누르미는 눌러서 말린 꽃과 잎으로 그림을 구성하는 일을 말한다. 흔히 압화라고 부르는... 

할머니가 일을 당했을 때의 나이는 고작 열 세살 무렵이었다. 일본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고, 나라 밖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온갖 물자를 빼앗기고 힘들게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꽃할머니는 언니와 함께 나물을 캐다가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왜 잡혀가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끌려온 또 다른 소녀들과 함께 배에 태워져 먼 나라로 보내졌다. 군인들은 덜 선명한 실루엣으로 표현되었지만 어른거리는 커다란 그림자가 오히려 더 무섭게 보인다. 배 안에 갇힌 소녀들, 넘실거리는 파도는 소녀들이 처한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막사의 작은 방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소녀들. 군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그들의 군복과 무기만 보이는 것이 공포감을 더 가중시킨다. 흩날리는 꽃잎들은 마치 바스러지고 짓밟히는 소녀들의 처참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으로 보인다. 이런 기막힌 일들을 왜 겪어야 했을까. 그들이 대체 왜? 

 

'일본군 위안부'는 1930년대 중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이에 일본 군대에 끌려가 반복하여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말한다. 한국,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UN 등 국제기구를 포함한 영어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라 공식 표기한다. 어떻게 부르든 그들이 당한 일은 모두 똑같았다.  

 

위안소의 시간표과 할당표가 보이는가? 하급 병사와 장교의 이용 시간과 요금이 구분되어 있고, 요일별로 어떤 부대가 이용할지도 정해져 있다. 진료소조차도 저 소녀들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병들의 안전과 효율을 위해서 운영되었다. 인간이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기계적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린 가엽고 가여운 여자들. 꽃할머니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많은 여인들이 희생되었다. 폭력에 쓰러지고, 치욕에 만신창이가 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보고 싶은 가족들, 가고 싶은 고향산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꿈결 속에서 스쳐가는 모습들은 모두 닿고 싶고 만나고 싶은 따뜻했던 기억들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서러운 추억들이다.  

 

가로 그림을 세로로 돌려봤다. 지도의 위치로는 세로로 보는 게 더 감이 빨리 온다. 이 지도는 '위안부' 피해자와 당시 일본군 병사들,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과 일본군 및 일본 정부와 관련된 각종 공문서의 기록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1932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본군이 주둔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는 통계에 따라 최소 4만에서 최대 30만으로 추정되는데, 80~90%가 식민지 조성의 여성들이었으며 대만, 중국, 동티모르, 필리핀 여성들과 소수의 네덜란드 여성들, 일본 여성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돈을 벌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 후 전쟁은 끝났지만 많은 여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또 다시 버림받았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도 산 게 아닌 목숨으로 연명했다. 꽃할머니는 극적으로 가족을 만났다. 20년 동안을 헤매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던 꽃할머니. 누군가의 도움으로 한국의 어느 절에 맡겨졌던 꽃할머니를 불공 드리러 갔다가 마주친 여동생이 알아보았다.  

 

동생이 병을 얻어 죽고 나서야 꽃할머니는 정신이 돌아왔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고국 산천에 고향 땅이었지만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셨고 반겨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갈래 머리 쫑쫑 땋고 학교도 가고 시집 가서 예쁜 아이도 낳고, 그렇게 자연스레 인생의 황혼기를 맞았어야 했던 할머니의 삶은 돌이킬수도 없었고 보상받을 수도 없었다. 누구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고, 이해받기도 어려웠다. 할머니의 잘못이 아닌데, 피해 여성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렇게 그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세상의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50년이나 지났다. 침략자들은 뻔뻔했고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어느 용기있는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을 밝혔고, 그렇게 오랜 속울음을 울어내던 할머니들이 자신도 여기 있노라며 진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꽃할머니도 용기를 내었다. 다시는 세상에 그런 일 없게 하려고, 다시는 자신같은 아픔 겪는 사람 없게 하려고... 

그 마음을 일으켜 할머니는 세상 밖으로 나와 친구가 되었다.  

동생이 남긴 손자와 함께 살면서 몸이 아픈 이웃도 돌보고 일주일에 하루는 원예 치료사와 꽃누르미를 하신 할머니.  

꽃 사이에 둘러싸인 할머니의 표정이 아름답다. 꽃과 같은 세상을 염원하는 갈망도 절실히 읽혀진다.  

할머니는 전시회도 몇 차례 여셨다. 

 

2007년도 작품인 이 꽃잎은 마치 폭죽을 수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다. 똑같은 불꽃임에도 폭격의 불꽃과 불꽃놀이의 불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반드시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그 이름 전쟁, 그러나 할머니가 겪은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 중에는 우리가 이름 올려놓고 발 턱 걸쳐놓은 부끄러운 역사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모두가 동시에 간절히 바라고 바라도 멀기만 한 평화인데, 끊임없이 전쟁을 외치는 사람들이 버젓이 힘을 갖고 있어서 더 답답했던 근간이었다. 차가운 이성을 발휘해야 하는 언론이 나서서 오히려 국민을 부추기는 모습들에 뉴스를 보기 힘든 요즘이었다. 며칠 전(12월 6일) 별세하신 꽃할머니는 하늘에서 이 모습들을 보며 또 얼마나 가슴을 뜯으실까. 

그래도 다행히, 꾸준히 평화를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분들도 계시다. 이 책은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 시리즈 중 하나다.  

 

평화를 촉구하며, 평화를 열망하며 서로 다른 언어지만 같은 마음으로 외치는 그림의 언어가 연이어서 쏟아질 예정이다. 우리가 이미 만난 책은 이 책 '꽃할머니'와 이억배 작가님의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이 있고, 그후로 올해와 내년에 걸쳐 10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얼마 전에 '끝나지 않은 겨울'이라는 그림책에서도 위안부 문제와 만났지만 메시지의 전달이 약했다고 느꼈다. 이 작품과 '위안부 리포트'를 함께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읽고, 누구라도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함께 귀를 기울여주고, 우리가 같이 해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같이 고민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책 말미의 글을 옮겨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 

전쟁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폭력으로 굴복시켜 이익을 얻으려 하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늘 폭력을 피하거나 저항할 힘이 없는 약자들에게 큰 고통을 주지요. 대개 가난한 사람과 여성과 어린이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보통의 폭력에 더하여 성폭력의 피해까지 당할 위험에 처하니까요. 전쟁이 일으키는 성폭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병사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불만을 없애려는 목적의 성폭력도 있고, 상대 집단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어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의 성폭력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여성의 기능을 망가뜨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종을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도 성폭력을 자행합니다. 근대 이전의 숱한 전쟁들에서 그랬고, 이후에도 태평양 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내전, 콩고 내전, 르완다 내전, 이라크 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전쟁과 관련한 성폭력은 국가의 승인이나 묵인, 방조 아래 이루어집니다. 더 큰 폭력으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최고의 목적인 전쟁에서, 그리고 그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에게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의 인권은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꽃할머니는 약자 중에서도 약자였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식민지에 사는 가난하고 어린 여성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고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은 또 다른 전쟁 지역의 제2, 제3의 '꽃할머니'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쟁에 반대해야 합니다. 인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인권을 짓밟은 자들과 그 일을 승인하거나 묵인, 방조한 국가들로 하여금 사죄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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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그대가, 그대를 2013-10-28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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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0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순오기님 서재에서도 봤었는데 말이죠.
그림 다 좋은데,특히 꽃잎 그림 아슴아슴한걸요~

마노아 2010-12-09 15:50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언니가 샀는데 평소 감상을 잘 말하지 않던 언니도 먹먹하다...라고 하더라고요.
아슴아슴하다... 덕분에 좋은 표현을 알았어요.^^

차좋아 2010-12-09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어요 마노아님. 일상이라는 거대한 짐에 눌려 자꾸 잊게 되는 이런 우리 역사들... 제 가슴도 아슴하네요.


마노아 2010-12-09 19:53   좋아요 0 | URL
지금 '운명이다' 읽고 있는데, 이 책도 아슴하게 만들어요. 아슴아슴한 저녁이에요.^^;;;

글샘 2011-01-1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덕택에 좋은 글도 읽고 갑니다. ^^

새해엔 뜻하시는 일 활짝 피시길 바랍니다.

마노아 2011-01-13 19:37   좋아요 0 | URL
헤헷, 축하 감사합니다.^^;;; 책이 훌륭한 덕분에 제가 당선의 기쁨을 얻었네요.
새해 덕담도 감사해요. 글샘 님의 2011년도 만족과 보람으로 충만하기를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