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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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냄새 구수한 연작 소설집이다. 작가 자신은 경기도 수동면 광대울 산중에 살고 있지만 작품의 배경은 충청도 어느 마을로 설정해 두었다. 진한 사투리가 어찌나 눈길을 사로잡는지, 그 말투와 어감을 살려 읽다 보면 천천히 넘어가는 책장에 애가 닳기까지 했다. 충청도 사람들이 말은 느려도 성질은 급하다는 얘기가 이해가 되는 기분이랄까. 

11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각각의 주인공들은 서로 한 마을 사람들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난 이야기의 조연이 이번 이야기의 주연이 되고, 이번 이야기의 엑스트라가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그런 구조. 그래서 하나도 허투루 넘길 이야기가 없다. 마을 사람들의 관계도를 머릿 속에 그려보면서 책을 읽는데 단순히 풍자 소설로 읽기에는 갑갑할 때가 많았다. 작품 속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FTA의 내용상, 일단 농촌은 버린다는 얘기 아니던가. 널뛰기하는 배추값을 보며 느꼈듯이, 농촌의 내일은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인다. 도시에 사는 내 눈에도 답답한데, 거기서 흙냄새 맡고 사는 분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조우' 편에서 그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 닥달해서 서울로 떠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도시로 가서 그 살벌한 세계에서 어찌 살아남을지는 아들 역시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어떡해서든 살아보겠다고 유기농, 비육우, 생태마을, 산촌마을에 정보화마을까지... 온갖 사업에 앞장 서서 발품도 팔아보았지만 결실은 없어 꼴만 우스워지기 일쑤였다.  

답답한 농촌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순진하기만 한 사람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지난 해에 같이 근무했던 어느 선생님은 서울 아이들에게 온갖 정 다 떨어져서 고향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는데, 시골 인심도 못지 않다고 한탄을 하셨다. 으레 기대하는 순진한 눈망울은 아니더라는 것. 왜 아니 그럴까 싶다. 작품 속 인물들도 앞의 말 다르고 뒷의 말 다르고, 남의 등 처먹는 일도 서슴지 않고 표리부동할 때가 많았다. 시골이나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이 세계'를 사는, 또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세상 속 풍경이지 싶다. 더불어 새마을 운동 시절의 진한 향수에 젖어 독재자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이건 풍자가 아니라 현실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 작품이 또 심각하기만 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과, 그 안에서 엉키어 있는 인간들의 욕심 사나운 모습 사이사이 해학적인 면모도 짙게 드러난다. 제 차가 진흙 구덩이에 빠졌는데 말쑥한 양복에 흙묻을까 멀찌감치 구경하는 교감 샘과, 그 양반 대신 논두렁에서 고생하던 인물이 넘어지면서 교감의 넥타이를 잡아채어 같이 흙물 뒤집어쓴 장면은 깨가 쏟아지기까지 했다. 환경운동가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농촌 문제에 나섰던 것이 사실은 짜고 치는 게임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대목은 너무 씁쓸해서 한숨이 나온다. 모두 다 그렇진 않겠지만, 그런 운동가들이 선한 의도까지 똥물을 끼얹고 있으니... 

가장 최고의 엔딩은 마지막 편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였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엔딩의 소설들이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그것이다. 마지막 한 줄이 소름 돋도록 만드는 명 엔딩 장면을 가졌는데, 이 책도 마지막 대사에서 띠용~ 소리가 나도록 만드는 대미를 갖추었다. 울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해학과 풍자와 비판과 아이러니가 다 겹쳐진 완벽한 마무리! 

추천사에서도 강조하지만, 이 책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이시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입담꾼에 대한 입소문은 왜 이리 더딘겨? 라고 고개도 갸우뚱해 본다. 마지막으로,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의 한 대목 옮겨본다. 씁쓸하면서도 즐거운 책읽기였다. 

"피차 양반이여. 거기두 잘헌 거 웂어. 해병대 아니라 특공대라두 으른은 으른인겨. 아무리 삼강이 무너지구, 오륜이 사까닥지를 치는 시상이라 혀두, 아즉까정 우리게는 위아래 장유유서가 번듯허구, 예의범절을 목숨츠럼 여기는 청풍명월의 예향인겨. 근디, 얼굴 모르는 타관 뜨내기두 아니구, 뻔히 집안 으른들끼리 장에서 만나믄 허리 꺾구 서루 절 나누는 처지에, 멕살잽이를 허는 건 또 어느 나라 군대 벱이여?" -53-54쪽 복(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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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27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짜고치는 고스톱에 광분하는 편이라서,망설였는데 말이죠~
그래도 별 다섯이라니...성석제나 이기호의 연장선상 정도로 보면 되려나요?

마노아 2010-10-27 23:12   좋아요 0 | URL
이기호 책은 보지 못했고요, 성석제의 재기 발랄함보다는 약하지만, 보다 진중했어요.
어느 분 추천을 무심코 발견해서 읽게 되었는데 무척 좋았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