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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아놓은 책이다. 출간 당시 바로 읽었더라면 현장성을 느꼈겠지만, 한참 뒤에 읽은 나로서는 날짜가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당 내용과 현 시점에서의 연관성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더군다나 읽고나서 두 달 뒤에 쓰는 리뷰라니...;;;) 때문에 감흥 면에 있어서 한 박자씩 늦는 느낌이 들었다. 구체적인 키워드라도 있다면 조금 지난 이야기라도 그때 그 사건들을 떠올리며 연결을 시킬 텐데, 아쉽게도 그리는 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읽어서인지 고종석의 '발자국'과 자꾸 비교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고종석의 발자국은 날짜가 계속 박혀서 나오고, 꼭 '역사'에 한정시키지 않고 더 넓은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장단점이 서로 다르지만, '컨셉' 자체는 꽤 비슷하다고 본다. 또 하나, 고종석의 칼럼은 곧잘 읽었지만 단행본은 처음 읽는 나로서는 일단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덕일 씨의 글은 워낙 자주 접했던지라 늘 반복되는 이야기들에 조금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졸작이거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재미 면에서는 조금 싱거웠달까.
그래도 도움이 되는 내용들은 많이 뽑아놓았다. 필요할 때 적절히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은 소설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열하일기 ‘옥갑야화’ 편에 실린 야사다. 박지원이 윤영이란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허생은 “이 섬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며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태우고 떠났다. 허생이 보기에 지식인은 화근에 불과했다. -44쪽
유성룡은 이조판서 이이로부터 “이순신을 만나고 싶다”는 언질을 받는 데 성공했지만, 이순신은 “율곡은 나와 같은 문중(덕수 이씨)인데, 인사권을 갖고 있으니 만나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149쪽
고종의 재위 기간은 만 44년으로 조선 시대의 임금 27명 중 영조(52년)와 숙종(46년) 다음이다. 대원군 섭정 10년을 빼도 선조(41년), 중종(38년) 다음이니 짧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망국에 고종의 책임이 가장 큰 것은 사실이다. -158쪽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으로 추정되는 괘릉의 아랍인 무인상도 아랍 상인들이 신라에 다수 정착했다는 물증의 하나이다.
헌강왕 앞에 나타났던 처용을 조선 초 학자 성현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신선도 아니다”라고 보았는데, 역사 학자들은 그를 신라에 정착한 아랍 상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79쪽
경주 최부잣집 역시 “1년에 1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흉년에 남의 논밭 사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 없게 하라”는 등의 가훈이 있었기에 부를 12대 300년간 유지했다. 변승업의 조부는 거지 차림의 허생에게 1만 냥을 선뜻 꿔 줄 정도로 타인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정당성은 청부(淸富)에서 나온다. -224쪽
신라의 여성 지위를 보여주는 유적이 경주 황남대총이다. 남분과 북분이 서로 이어진 표주박형 무덤인데, 북분에서 ‘부인대’라는 명문이 나왔다. 피장자가 왕비라는 뜻이다. 국왕의 무덤인 남분에서는 은관과 금동관만 출토된 반면, 북분에서는 국보 191호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황남대총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5세기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주인공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17대 내물왕, 18대 실성왕, 19대 눌지왕 부부 중의 한 쌍으로 추측된다. 이 중 왕비는 미추왕의 딸인 데 비해 왕 자신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로서 격이 낮았던 실성왕일 가능성이 높다. 실성왕은 또 눌지왕을 제거하려다 되레 죽음을 당했으므로 무덤이 호화로울 수 없었다. -230쪽
조선 시대 성폭행 사건은 대명률 범간 조의 적용을 받았는데, 강간 미수는 장 100대에 3000리 유형, 강간은 교형(교수형), 근친 강간은 목을 베는 참형이었다.
화간(和姦)은 남녀 모두 장 80대였기에 여성은 강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 여성의 처음 의도가 판단 기준이었다.
피해 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종 15년(1469) 좌명 1등 공신 이숙번의 종 소비는 강간하려는 주인의 이마를 칼로 내리쳤으나 무죄 방면되었다.
기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이 없었어도 여성의 동의가 없었으면 강간으로 처벌했는데, 피해 여성이 처벌을 원하는지 여부는 형량의 참작 대상이 아니었다. 절도 도중 강간까지 한 경우는 참형이었고, 유아 강간은 예외없이 교형이나 참형이었다.
성범죄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인식은 조선이 아니라 일제 때 비롯된 것이다. -272쪽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은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귀족들은 조선시대의 ‘매화틀’에 해당하는 이동식 화장실을 갖고 다녔다. 천하무적 잡학사전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무려 26개의 매화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 귀족이나 몸종들은 궁전의 정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악취가 진동했다. 이를 막기 위해 정원에 세운 출입 금지 표지판의 이름이 ‘에티켓’이었다. 에티켓은 매화틀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였던 셈이다.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