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가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다. 낮 기온이 섭씨 35도를 우습게 넘고, 해가 져도 대지는 뜨거운 열기를 품어댔다. 박 형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의사인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더운 날씨에도 여전히 활기찬 얼굴의 친구가 나타났다.
“자네, 얼굴색이 좋지 않군. 더워서 잠을 못 잤나?”
“이런 열대야에 잠을 제대로 자는 사람이 있겠나. 하지만 내 고민은 그게 아니라네. 최근 원인 모를 사망사고가 이어지고 있어. 방문과 창문이 모두 닫혀 있고 침입한 흔적도 없는데 아침이면 죽은 사람들이 연일 발견되고 있지.”
“자연사 아닐까?”
“전날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으니 수긍하기 어렵다네.”
“그렇다면 살인이라고 보는 건가?”
“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현장에 있던 건 선풍기뿐이라네.”
“아니 그럼, 선풍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건가?”
사실 경찰 내부에서는 선풍기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선풍기 주의보를 내려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늘고 있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면 산소 부족, 호흡 곤란, 저체온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선풍기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의견이 많지. 회전 기능이나 타이머를 사용하지 않고, 신체의 특정 부위에 집중적으로 장시간 바람을 쐴 경우에 그 위험이 커진다는 걸세.”
박 형사는 의사인 친구의 견해가 궁금했다.
“글쎄,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장소라면 선풍기 때문이 아니라도 산소 부족이 생기겠지만, 선풍기가 산소 부족을 유발할 만큼 공기 압력을 바꾸진 못할 걸세. 난로를 오래 켜둔다면 공기 중의 화학성분이 바뀌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선풍기 날개는 그저 바람을 일으키지 공기의 화학성분을 바꾸지는 못하지. 방문이나 창문이 닫혀서 공기의 흐름이 차단된다고 해도 방 안의 산소량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질식하긴 어려워. 첫 번째 원인은 제외해도 좋을 것 같네.”
“그럼 호흡 곤란은 어떤가? 얼굴에 집중적으로 강력한 바람을 쐬면 산소가 희박해지고 의식이 점차 흐려지게 되고 결국 죽을 수도 있지 않겠나?”
사실 박 형사 본인도 잘 때는 선풍기를 절대 얼굴 쪽으로 두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선풍기 바람을 얼굴 쪽으로 고정해두고 자다가 가위에 눌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선풍기를 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신이 몽롱하고 숨을 내쉬는 것마저 곤란해 한참 뒤에야 쿨럭 기침을 하며 간신히 일어났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 뒤로는 선풍기를 멀리하게 되었다.
“선풍기 바람 때문에 호흡기 근처의 압력이 낮아져 공기를 들이쉬기 힘들어진다는 얘기로군. 하지만 이 논리가 성립되려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사람들은 심각한 호흡 곤란을 겪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지. 달리는 자동차에서 얼굴을 내미는 경우도 마찬가지야. 선풍기 때문에 호흡곤란이 온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네. 하지만 술을 많이 마셨다거나 몸에 병이 있고 허약한 사람이라면 그런 증상을 겪을 수도 있긴 있겠네.”
박 형사는 선풍기 때문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저체온증에 대해 물어봤다.
“선풍기 바람이 저체온증을 유발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체온증이라. 우선 저체온증이 뭔지 설명해주지. 저체온증은 체온이 섭씨 35도 이하로 떨어지는 걸 말하는데, 사망에 이르려면 체온이 27~28도까지 내려가야 하지. 2~3도 정도 체온이 떨어지는 걸로는 죽지 않아. 8도에서 10도는 떨어져야 사망에 이르게 된다네. 사실 저체온증은 추운 겨울에도 잘 일어나지 않는 증상이네.”
하지만 박 형사는 쉽게 수긍이 되지 않았다.
“선풍기를 틀고 바람을 쐬면 몸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나. 그걸 좁고 밀폐된 방에서 밤새도록 틀어둔다면 체온이 많이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밤에는 신체 대사가 더뎌지고, 술을 마신 상태라면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을까?”
“물론 방이 밀폐되어 있고, 술을 많이 마신 상태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저체온증을 유발할 환경이 조성되니까. 하지만 창문과 방문을 닫았다고 방이 밀폐되었다고 보긴 어렵고, 밀폐되는 방은 실제로 거의 존재하지 않을 거야.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더운 방에서 자다가 사망했다면 폐색전증이나, 뇌혈관성 사고, 또는 부정맥 등 여러 가지 다른 원인이 작용했을 수 있어. 그것을 선풍기의 탓으로 돌리긴 어렵지 않겠나.”
의사는 박 형사에게 선풍기가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간단한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실내 온도를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선풍기 바람이 실내 온도를 떨어뜨리는지 확인해보자는 뜻이었다.
실험 결과는 의사의 견해에 힘을 실어주었다. 선풍기는 시원하다는 느낌은 줘도 온도 자체를 낮추지는 못했다. 박 형사도 실험 결과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더운 날 선풍기를 틀면 더운 바람만 나오지. 선풍기가 자체적으로 차가운 바람을 내뿜지 못하니까 오래 틀어둔다고 체온을 많이 낮추기는 어렵겠군.”
“그래, 이제야 얘기가 좀 되는군. 오히려 좁은 방에서 선풍기를 오래 틀어두면, 선풍기가 과열되면서 실내 온도를 높이는 역할도 하게 될 걸. 선풍기가 과열될 정도로 오래 틀어둔다면 저체온증보다는 선풍기 과열에 의한 화재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박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제로 최근 1~2년간 선풍기 과열에 의한 사망사고도 몇 건 보고된 바 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네. 선풍기 바람이 닿는 피부 표면은 혈관이 수축해 체온이 조금 내려갈 수 있지만, 인체의 심부는 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풍기 바람으로 심혈관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체온이 떨어지기는 어려워. 인체는 놀라운 자기 체온 조절 기능을 갖고 있다네.”
박 형사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꾸 죽고, 유일하게 방에 있던 선풍기가 범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은 왜 죽은 걸까?”
의사는 조용히 답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선풍기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었던 거네. 돌아보게나, 이런 날씨에 선풍기를 켜지 않고 자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간밤에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누구나 선풍기를 켜고 잤을 걸세. 죽은 사람 중 선풍기를 켜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겠나.”
하지만 박 형사는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지난밤 사망한 사람의 방에 혼자 돌아가던 선풍기가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더울 때 밤새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자나?”
의사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네. 선풍기에는 타이머 기능이 있지 않나. 사람은 깊은 잠에 빠지기 전인 수면 유도기에 체온이 올라가는데, 이 시간은 30분~1시간 사이라네. 그 시간 동안은 선풍기가 참 유용하지. 아까도 몇 번 말했지만 술을 마셨거나 병이 있는 허약한 사람이라면 선풍기는 독이 될 수 있어. 자네도 몸에 자신이 없다면 선풍기를 밤새 틀어 놓지는 말게.”
형사는 선풍기 타이머를 맞추는 의사를 상상하며 속으로 빙긋이 웃었다.
‘문을 닫은 채로 선풍기를 밤새 틀어 놓고 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몸에 좋을 리는 없어. 감기라도 걸릴 수 있으니까. 저 친구 말대로 타이머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겠군. 참, 창문도 꼭 열어둬야지.’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 과학향기 제786호 ‘열대야 속 의문의 사망사고, 범인은 선풍기?(2008년 7월 8일자)’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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