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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다 1 ㅣ 평화 발자국 4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2006년도에, 36년 동안 수감자 생활을 했던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과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끌어낸 책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었다. 벌써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그 책을 만화의 형식으로 담아낸 책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는 제목을 달고서.
'꽃'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박건웅 씨의 그림으로 재탄생한 이 책은 제목부터 셌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니... 게다가 표지도 빨간색이다(2권 표지)! 와우, 정공법이랄까. 초등 6년까지는 반공 포스터와 글짓기 대회를 해마다 겪으면서 컸다지만, 그닥 반공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목들에서 한 번 더 눈길이 멈추게 되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이다. 그래서 '평화 발자국' 시리즈로 이 책이 나온 것은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평화 발자국'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일상 속에 뿌리박힌 차별과 폭력,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아우르는 시리즈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내가 살던 용산, 파란집, 그리고 이 책이 평화 발자국 시리즈다.)
몇 해 전에 몹시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었는데도 만화의 형식으로 다시 만나보니 꽤 새롭게 다가온다. 당시 내 가슴을 울렸던 선생님의 고백들은 이번에도 역시 진한 감동으로 와 부딪쳤다. 겹쳐지는 밑줄들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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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이 ‘호조반’이었어요. 수준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 돕는 것인데 좋은 성적을 내면 돕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칭송받았지요. 그리하여 모두가 최우등이나 우등이 될 수 있었어요. 자신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랐어요.
– 13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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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한 명을 빼고는 모조리 루저로 만드는 이 사회에선 모두가 승자가 되는 저 시스템을 부러워할지언정 감히 따라가질 못한다.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도 같은 기술이 나오는 걸 보면 허영철 선생님의 과장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서구로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이것만큼은 러시아가 뛰어났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있어요. 그건 재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죠. 서구에선 재능이 자기 개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에선 모든 이의 재산이랍니다. 그러니 이곳에선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해서 어떻게 하면 끌어내릴까 안달이죠. 러시아에선 재능 있는 자는 무조건 사랑받고 모두가 받쳐주는데......" – <프라하의 소녀시대>180쪽
책을 읽으면서 자꾸 곱씹게 되는 부분들은 과연 우리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공산주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냥 막연히, 추상적으로, 으레 그래왔던 대로 습관적으로만 상상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던 듯하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뭔가 덜컹!거리는 기분마저도 느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소련도 무너지고 동구권도 모두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저토록 오랫동안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바보 천치도 아니고 우리에게 강요되어진 생각대로의 독재 체제라면 벌써 무너졌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 혹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뭔가 다른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린 그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지만 관심도 없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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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요. “남파 ‘간첩’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간첩은 적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남조선은 적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파 ‘공작원’이라고 해야 옳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예, 간첩이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사람인데 우리는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온 것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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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란 단어 대신 '공작원'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는 지적도 신선했다. 무심코 쓰는 말이지만 합당한 용례가 아니었다.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왔고, 비록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36년이나 옥고를 치렀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허영철 선생님. 그는 스스로에게 당당했기 때문에 가족 문제에 있어서도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근본적으로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역사의 정당한 편에 섰던 것 뿐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나에게 물어요. 여전히 사회주의가 좋으냐고. 그럼 나는 대답하지요.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드시 새로운 사회가 오는데 어떤 사회가 올 것인지를 모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창조해 가는 과정이에요. 332쪽
솔직히 이 부분은 꽤 충격적이었다.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데, 다 합해봐야 6개월도 같이 살지 못한 남편을 가슴에 담고 그 부인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독자인 나도 헤아려지는데, 바로 그 당사자인 그가 미안하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책임져야 하고 자식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죄인 취급 받는 걸 인지상정이라고 여기던 사고가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그 가족이라면 어찌 원망이 없겠냐마는, 가족들의 편지와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들 역시 선생님이 개인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그리 긴 시간 동안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온 게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게 보인다. 내가 그리 살수는 없을지라도, 이런 삶을 살아온 외로운 혁명가를 향해 숙연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삶을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리하고 있는 이 땅의 역사가 아프게 밟힌다.
박건웅 씨의 그림은 판화 기법으로 선이 굵고 큼직하다. 그래서 섬세한 느낌은 받기 힘들지만 매우 극적인 연출이 잘 잡혀 있으며 이 책의 분위기에는 몹시 잘 어울렸다. 종종 보이는 오타와 띄어쓰기 실수 등은 다음 쇄에서 고쳐졌으면 한다. 많이 읽혀져서 책을 곧 다시 찍을 기회가 왔으면......
길었던 책의 내용을 모두 옮긴 것같지는 않았다. 적당히 생략의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나를 마지막에 울렸던 우리 모두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이 빠진 것을 보면 말이다.
가벼운 책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우울해지는 책도 결코 아니다. 한 번쯤은 생각해보고 고민해 볼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평생을 바쳐온 이런 투사의 삶의 이야기도 한 번쯤 귀기울여 봤으면 좋겠다. 단 한 번도 역사가 비껴가지 않았던 노 혁명가의 고백처럼, 우리 역시 그 역사에서 단 한 순간도 비껴갈 수 없으니 말이다.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