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도 ‘의리’를 안다? [제 1055 호/2010-03-29]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아빠만 만나면 어떻게든 장난을 쳐보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태연이 퇴근해 집에 들어오는 아빠를 보자마자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학교에서 난생 처음 성교육이라는 것을 받고는 아빠 얼굴 보기가 민망해졌던 것.

“태연아,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야.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고.”

“아빠 몸에도 그 올챙이같이 생긴데다 이름까지 촌스러운 정자란 것들이 잔뜩 꾸물거린단 말이잖아요! 징그러워요!!”

“음…. 아마도 정자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면 그런 기분이 훨씬 적게 들 것 같구나. 이 정자란 녀석의 목적은 딱 하나! 난자와 결합해 아기를 만들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 남기는 일이란다. 그래서 난자를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보통의 경우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한 번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정자를 생산해서 난자를 만날 확률을 높이는 거란다. 인간도 마찬가지야. 한 번에 약 5,000만~5억 마리의 정자를 몸에서 내보내거든.

“허걱~ 너무 많아! 너무 징그럽다고!”

태연, 겉으로는 징그럽다고 하면서도 엄청난 호기심을 주체할 길 없다. 귀를 나팔처럼 키우고는 아빠의 말에 절대 집중하는 태연.

“그런데 간혹 다다익선의 방법을 쓰는 대신 엄청나게 큰 슈퍼정자를 만드는 것들도 있단다. 대표적인 것이 ‘드로소필라 비푸르카’라고 하는 초파리인데, 자신의 몸길이 보다 무려 20~30배나 더 기다란 슈퍼정자를 만든다고 해. 수mm밖에 안 되는 초파리가 6cm나 되는 정자를 만드는 거지. 사람을 이 초파리라고 가정하면 정자 길이가 무려 40m가 넘는다는 거야. 또 어떤 패충류는 슈퍼정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 몸통의 3분의 1을 정자 생산에 할당했다고 하는구나.”

“우와, 정말 길다! 아니 왜 그렇게 긴 정자를 만드는 거에요?”

“아까 말했잖니. 그래야 난자와 만날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렇지. 또 정자들끼리 단체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단다. 동물 중에는 한 마리의 암컷이 여러 수컷과 교미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엔 A수컷 정자끼리 B수컷 정자끼리 따로 따로 무리를 지어 난자를 향해 돌진하지. 실제로 이렇게 뭉쳐서 다니는 정자들은 그렇지 않은 정자들 보다 유영속도가 50% 이상 더 빠르단다. 물론 100마리가 뭉쳐갔다고 해도 그 가운데 난자와 결합하는 건 단 한 놈뿐이야. 그렇더라도 기왕이면 같은 수컷에서 나온 놈을 밀어주고 싶어서 끼리끼리 단체행동을 하는 거지”

태연, 어느새 아빠의 말에 흠뻑 도취됐다. 징그럽다고 난리법석을 치던 건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다.

“어맛! 나름 의리도 있네. 정자 귀엽다~~”

“그렇지? 너도 아빠의 어떤 귀여운 정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귀여운 것이고 말야. 뿐만 아니라 정자는 아주 지혜롭기도 해. 남자의 몸속에 있는 동안 정자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지내. 그러다 여성의 몸에 들어가자마자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난자와 만나기 직전엔 최고 속도로 돌진을 한단다.

“와! 벤쿠버 올림픽에서 본 우리나라 스케이팅 선수들과 똑같네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리면 골인지점에서 힘이 부족해지고 그렇다고 너무 힘을 아끼면 질게 빤하니까, 처음엔 천천히 가다가 나중에 바짝 속력을 내는 경우가 많잖아요.”

“맞아, 어쩜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아는 것이니! 우리 태연이를 만든 아빠 정자가 아주 똑똑한 놈이었던 게 틀림없어.”

“아빠, 전 절대로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솔직히 엄마가 아빠보다 키도 크고 날씬하고 얼굴도 예쁜데다 머리까지 좋잖아요. 전 완전 100% 엄마 난자 판박이라고요. 그나저나 지금부터 본격부터 궁금해지는걸요.”

“아니 뭐가?”

“정자에 대해서는 이제 정확히 알겠어요. 그럼 정자는 어떻게 남자 몸 밖으로 나가서 난자한테 가는 거여요? 뛰어가는 거여요? 아님 날아가나?”

아빠, 더듬더듬 당황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 산만 바라본다.

“소, 솔직히 말하면 말이다. 음…. 너는 엄마와 아빠의 딸이 아니고, 할머니 댁 옆에 있는 그 아슬아슬한 다리 있지? 거기서 주워왔단다. 너, 그 다리 밑에서 물놀이하고 삼겹살 구워 먹는 거 좋아하지? 거기가 네 고향이라 땡기는 것이 아닐까? 뭐 아님 말고. 아, 그러니까….”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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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4-0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수습 못 할 거면 처음부터 정자 이야기를 하지 말던가~

마노아 2010-04-02 12:39   좋아요 0 | URL
순식간에 줏어온 딸이 되어버렸어요. 어쩜 좋아요.ㅋㅋㅋ

루체오페르 2010-04-0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마지막에 빵 터졌습니다.ㅋㅋ

마노아 2010-04-04 13:51   좋아요 0 | URL
저 칼럼니스트가 매번 재밌게 쓰시더라구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