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이양호 지음, 박현태 그림 / 글숲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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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면, 아이 동이라는 글자에서 보듯 어린이가 지은 것이거나 어린이가 짓지 않았더라도 어린이에게나 어울리는 내용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만을 마음에 두고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엮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래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선, 전래동화의 엄지손가락이라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그림 형제는, 그들이 엮은 책 제목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이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른도 그 책의 독자로 여긴 것입니다.-12쪽

<동화학>이라는 두툼한 책을 지은 루돌프 가이게르. 그는 자기 책 머리말에 "메르헨, 즉 동화는 본래 어른을 위한 이야기였다. 그렇긴 하나, 동화의 위대함은 어린이에게도 그것을 들려줄 수 있다는 데에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경북대 독문과 교수인 김정철 님도 <그림 형제의 동화>에서 "동화가 원래는 성인들을 위해, 성인들이 구연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셨습니다.-13쪽

우리 말 '동화'로 옮긴 독일어 낱말은 메르헨인데, 그 낱말은 단지 '작은 이야기'라는 뜻일 뿐 거기에 '어린이'를 뜻하는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다.-14쪽

그림 형제가 편찬한 사전 이야기를 좀 더 할게요. 형은 1785년에 태어나서 1863년에 죽었고, 동생은 1786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죽었는데, 두 형제는 '독일이라는 본디꼴(정체성)'을 이뤄내려고 무척 애썼어요. 그것을 위해 두 형제는 200여 편에 이르는 옛이야기를 모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이라는 책을 내고, 독일어 사전을 편찬했어요. 그런데 그 사전의 규모가 워낙 컸기에, 아(a)부터 에프(f)까지 밖에 못하고 그들은 세상을 떠났어요. 나머지는, 형제가 죽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갈무리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사전의 규모는 깨알만한 글씨로 A4 용지를 가득 메웠는데, 그 쪽 수가 3만을 넘는 사전. 더구나 두 형제가 다산 정약용과 함께 공기를 마셨던 같은 시대 사람임을 생각한다면 두 형제의 어마어마한 뜻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지금도 두 형제가 이루어낸 사전이 독일어 사전 중 가장 크고, 권위가 있어요. -129쪽

산이건 평지건 상관없이, 나무들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곳을 그들은 발트wald라고 해요. 이 단어를 그냥 '숲'이라고 옮기기엔 맞지 않는 것 같아, '엄청난'을 덧붙여서 옮겼어요. 우리말 '숲'은 크다는 생각을 별로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낭만적인 느낌을 자아내잖아요? 그런데 독일의 발트는 우리말 산맥에 해당할 만큼 큰 규모이거나, 우리나라 한 도시만한 넓이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을 말하거든요. 당연히 잘못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워요. 지리산에서 길을 잃은 거나 다름없어요. 우리의 새하얀 눈 아이는 뒷동산이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큰 산맥을 헤쳐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것도 혼자서. 그곳에서 우리의 아가씨가 맞닥뜨린 건 돌, 가시덤불, 짐승이었어요.-135쪽

이야기꾼이 얼마나 섬세한가를 우리는 여기서도 알 수 있어요. 단 셋으로 숲에 있는 것, 즉 세상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몽땅 말했으니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아시겠죠? 돌은 생명이 없는 것을, 가시덤불은 생명은 있되 옮겨 다닐 수 없는 것을, 짐승은 생명도 있고 옮겨 다닐 수도 있는 것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해 새하얀 눈 아이는 숲에 있는 모든 것 즉 세상에 있는 온갖 험상궂은 것을 맞닥뜨리면서 살았던 거예요. -135쪽

일곱이라는 수는 도대체 서양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일곱 켜를 가지고 한 옥타브를 만들고, 7일을 일주일이라 하는 걸로 봐서, 숫자 7은 무엇을 의미한다 할 수 있죠? 그래요. 일곱은 매듭을 짓는 수라 할 수 있어요. 매듭을 지은 다음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니까, 되풀이의 수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 아이의 나이가 일곱 살이라는 것을 생물학적인 나이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 이제 아시겠죠? 생물학적인 나이라기보다는, 여태까지를 매듭짓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길목에 서 있는 아이의 정신을 그렇게 말한 거라고 보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143쪽

창세기에 따른다면, 하느님이 세상을 며칠 만에 창조하죠? 엿새만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하루를 쉬었다 하니까, 하느님이 일하기를 시작할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며칠이 걸린 거죠? 쉬는 것도 거기에 넣어 생각해야 하니까, 이레가 걸린 거예요. 음악에서도 쉼표까지 함께 넣어서 박을 계산한다는 것 알고 있죠? 이렇게 일곱이라는 숫자는 서양인에게 아주 특별한 수예요. 왜 이 이야기에서 일곱 살 먹은 새하얀 눈 아이가 일곱 고개를 넘어, 일곱 난쟁이가 사는 오두막집에 이르렀다고 하는 줄 이제 눈치챘죠?
일곱 살은 상징성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사람에게 특별한 뜻이 있어요. 일곱 살을 앞뒤로 젖니가 빠지고, 간니가 나오기 시작하거든요. 발도르프 교육의 샘을 판 슈타이너는,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데 있어, 이갈이를 매우 큰 매듭으로 보았답니다. 이갈이를 할 즈음에야 어린이는 지적인 것을, 그것도 이론의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성의 길을 통해서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된다고 그는 말했어요.-144쪽

광석이 다른 돌이나 흙과 달리, 가치가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죠? '빛난다'는 점에 있지 않나요? 이제 앞의 물음, '광석을 캐러, 왜 산으로 다닐까?'를 풀 수 있겠네요. '빛'이라는 낱말이 그 열쇠예요. 즉 광석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빛을 내는 거예요. 옛 서양 사람들은 광석은 별에서 온 것이라고 믿었어요. -149쪽

산을 거룩함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비단 기독교만 그런 것은 아니예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 대부분이 산꼭대기였으며, 지금도 무당들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공자도 "태산에 올라서야 이 세상(에 있는 부귀가)이 참으로 자잘한 것임"을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유학에서 최고 경지인 "仁者는 산을 좋아할"밖에요. -150쪽

우리 옛 분들은 사농공상이라고도 하고, '농사는 천하를 먹여 살리는 큰 뿌리'라고도 하여 농부를 꽤 좋게 여겼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성 안에서 사는 도시인과 성 밖에 사는 사람으로 나누고, 성 밖에 사는 농부를 천민이나 다름없이 여겼어요. 장사치나 수공업자들은 성 안에 사는 도시인이기에, 아무리 볼품이 없어도 그들을 농사꾼보다는 윗길에 놓았죠. 그러니 이 여자가 농사꾼 마누라가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볼품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로 보아야 해요.-161쪽

난쟁이들은 사방에서 환히 보이는 유리로 된 널에 그 주검을 넣은 다음, 그 관에 금으로 그 애의 이름을 쓰고, 그애가 왕의 딸이었음을 밝혔어요. 새 하얀 눈 아이가 '왕의 딸'이었다는 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기서 나와요. 독일어에 공주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이야기꾼은 그 낱말을 쓰지 않고 굳이 '왕의 딸'이란 말을 여기서 쓰고 있어요. 기독교에서 쓰는 '하느님의 아들/딸'이란 말을 떠올린다면, 여기서 쓰는 "그녀는 왕의 딸이었다"는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글을 널짝 위에 쓴 다음, 일곱 난쟁이는 그 널을 산 위에 가져다 놓았어요. -181쪽

올빼마, 까마귀, 그리고 작은 비둘기가 널 속에 누워있는 새하얀 눈 아이를 슬퍼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세 날짐승이 상징하는 것. 우선 셋 모두 하늘을 난다는 점. 우리의 아가씨 안에서 하늘다운 것이 구실을 하지 못하자, 하늘을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하늘다운 새들이 그 애의 죽음을 슬퍼하는 거라 말할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미네르바(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야 날아오른다"는 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일이 끝날 무렵에야 알게 된다는 '앎의 비극성'을 시적으로 나타낸 말이지요. 여기서 올빼미는 앎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스 신화에서 올빼미는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의 속성으로 나오고 있거든요.-183쪽

세 가지가 무더기 짓는 것을 한 번 세어볼까요? 눈처럼 새하얀, 피처럼 붉은, 창틀처럼 검은;피 세 방울; 뾰족뾰족한 돌, 가시투성이, 사나운 짐승; 띠, 빗, 사과; 세 날에 걸친 난쟁이들의 울음; 올빼미, 까마귀, 작은 비둘기까지 여러 번 나오지요?-185쪽

기독교에선 이른바 삼위일체를 말한다는 것 들어봤죠? 하느님, 예수님, 성령이 이름은 달라도 바탕이 하나라는, 다시 말해 '셋인 하나'라는 게 그거예요. -186쪽

뛰어넘다가 흔들렸지. 온 시간이 흔들렸어. 온 시간이 흔들렸으니, 알곡 아닌 쭉정이 다 날아갈 밖에. 제 몸 아닌 것, 떨어지지 않고 배겨낼 수 있겠나? 종들이 큰 품 들여 하늘과 땅을 흔들었고, 그 덕에 우리의 아가씨도 번쩍 눈을 떴구나.-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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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동양의 사상과 접목하려 한 것은 제 취향은 아니지만, 새하얀 눈 아이를 처음으로 올바르게 번역한 책이어서 제가 정말 사랑하는 책이어요. 왜 백설공주냐구요! 백설이 뭐여요 백설이 ㅠㅠ

마노아 2010-02-25 10:52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기 전에 이미 번역이 무지 잘못됐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암튼 제가 이 책을 만난 건 전적으로다가 Jude님 덕분이에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