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야말로 참신한 작품이다. 거짓말 학교라고 해서 위선으로 가득 찬 교단을 생각했지, 설마하니 거짓말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 중에서 성적과 면접을 거쳐 학생들을 선발하며, 제주도 너머 무인도에 위치한 섬에 학년별로 30명씩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학생들은 진실학과 거짓학 등 분야별 전문 선생님들께 거짓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배운다. 거짓말 학교는 국가의 안녕과 부강을 위해서 정부가 비밀리에 지원해 주는 학교로,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국가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무상으로 공부를 시켜주는 것은 물론 매 방학 때마다 해외 연수도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아이들도 졸업 후 취업난을 생각하며 무조건 콜~을 외치는 지경.

이 학교의 거짓말 헌장을 살펴보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유구한 역사의 뿌리 깊은 거짓말 전통을 이어받아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자. 이에 창의적이고 이로운 거짓말을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거짓말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창조적인 거짓말을 개척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우리의 거짓말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국가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거짓말의 가치를 드높인다.  

국가와 거짓말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야망과 실력을 갖춘 뛰어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만든 거짓말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7-20)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해야 했던 세대가 아니어서 전문을 다 모르겠지만, 아마도 국민교육헌장을 약간 재단해서 거짓말 학교 스타일로 바꾼 게 아닐까 싶다. 유머로 생각하고 읽으면 재밌는데,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국가는 정말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던가! 

아이들은 거짓말 뉴스를 일주일에 두 차례 시청하고, 교장 선생님의 반복된 거짓말 훈화를 주입받는다. 가끔은 졸업생 중에 훌륭히(?) 거짓말을 수행하고 있는 선배들의 조언도 듣는다. 제약회사에 입사한 선배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회사는 약이 아닌 두려움을 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두려움을 파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게 아닙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현상들을 치명적인 질병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부끄럼 잘 타는 것에 '사회공포증'이라는 전문용어를 붙이면 정말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76쪽)

 
   

이런 종류의 광고는 무척 많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듣고 보니 역시 서늘해진다. 거짓학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보면 이번엔 착잡해진다.  정치가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7단계 전략이다. 

   
 

1단계, 사태를 전면 부인한다.
2단계, 사실은 그러하나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사태를 새롭게 해석한다.
3단계, 사실은 그러하나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에서는 간혹 잘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책임자로 몰려 문책을 당하기도 한다.
4단계, 이 모든 사태는 이번 경우에는 옳은 일이었으며, 최소한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5단계, 비록 사태에 연루되어 있지만, 자신이 원했던 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6단계, 이 모든 사태는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주장한다.
7단계, 앞 단계의 모든 사항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사죄한다.

 
   

이야, 너무 그럴싸하다. 정치인들은 이런 것들을 전략적으로 학습하고 있을까? '거짓학'이라는 제목이 아닌 전술적 차원에서 연구하지 않을까? (정치인뿐 아니라 기업 차원에서도 가능할 것 같다.)

마지막 사죄의 단계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도 놀랍다. 

   
  "대개의 경우 정치인의 사죄는 무의미하다. 사죄하고 거짓말을 인정한다 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 마지막 단계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사죄라는 방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 거다."(158쪽)    
   

대통령의 무의미한 사과를 정말 사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휠체어 타고서 법정에 출두하는 기업인들을 정말 아프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여러모로 혀끝이 쓰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 지금 거짓말 중이야!라고 해도 곤란할 것이다.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그 사람들이 바보라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너라면 대한민국의 국민 1%만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정치가를 뽑고 싶겠니? 만약 정말 1%의 부자만을 위해 자기 한 몸 바치겠다는 정치가가 나온다면 그 말이 진실이라 해도 욕만 잔뜩 얻어먹고 외면당하겠지. 돌 맞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이럴 경우 뻔한 거짓말과 진실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겠니?" (159쪽)   
   

만약 저렇게 대놓고 속내를 드러내면 적어도 가장 가난한 노동자가 한나라당을 연모하며 충성 투표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거짓말은 당당히 유효! 

정치가와 기업가 얘기가 나왔다고 해서 이 책이 사회비판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어디까지나 청소년 대상의 소설이며 또 동시에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인애, 나영, 준우, 도윤 네 학생이 주인공인데, 이야기 자체는 인애와 나영이가 번갈아 가며 1인칭으로 진행시킨다. 준우와 도윤이는 가정 환경에 대한 제시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네들의 고민과 목표에 대해선 잘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애와 나영이의 이야기는 꽤 구체적이다. 왜 이 학교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무엇에 좌절하는지 등등등... 

거짓말 뉴스를 시청하던 학생들이 모두 세 명씩이나 쓰러지고, 그 과정에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파악한 아이들은 진실을 찾고나 나름 탐정 비스무리하게 모험을 펼친다. 누가 진짜 스파이인지, 진짜 음모가 무엇인지 독자들도 같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재미있다.  

작품은 똑 떨어지게 어떤 결론을 보여주지 않은 채 열린 해석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한 단계 성장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거짓말은 내내 세상을 지배해 왔을 것이다. 착한 거짓말도 물론 있지만, 인간을 망쳐버리는 거짓말은 더 많았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완벽한 거짓말 능력자를 양성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는 '인간에 대한 무모한 믿음'과 '쓸데 없는 양심'이라고 강조했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 세상을 유지하게 만들어준 큰 동력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기실, 우리도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가? 혹은 이미 믿고 있다거나...  

문학동네 어린이 수상작들을 몇 차례 읽게 되었는데 소년왕, 책과 노니는 집, 그리고 이 책 거짓말 학교까지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었다. '어린이'란 타이틀을 달고 '청소년'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누가 읽더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들이다. 적극 권장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2-2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12-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무지 공감되고 보고싶은데 갑자기 국민교육헌장이 머리속에 꽉~~ 들어오네요.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직도 기억이 날까? -.-;;;

마노아 2009-12-23 20:49   좋아요 0 | URL
예, 좋은 책이었어요. 울 언니들이 교육헌장 외우던 모습이 기억나요. 첫 문장은 저도 외웁니다. 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