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사마천이 직접 쓴 원본이 전하지 않는다. 후세의 필사본을 토대로 작성한 많은 판본이 전할 뿐이다. 사기 '조선열전'의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으로 삼았다"는 구절 자체가 후세에 가필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36쪽
조선과 한의 전쟁은 서기전 108년에 끝났는데, 사군의 명칭은 한 화제 영원 원년(서기 89년) 주요 부분이 완성된 반고(서기 32-92)의 <한서>무제본기에 처음 나온다. "겨울에 조선에서 그 왕 거의 목을 베고 항복하니,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 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전쟁 목격자인 사마천이 적지 못한 내용을 200여 년 후의 인물인 반고가 적은 것이다. -37쪽
한사군 설치 25년 후에 낙랑군만 존재했다는 것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과 16년(315)에 현도군을 공격한 기사가 거듭 나온다. 현도군은 이때도 존속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다. -58쪽
일찍이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 천지문 '조선사군조'에서 동천왕 때 고구려를 침략한 위 유주 자사 관구검의 진격로와 퇴각로를 검토한 결과 현도, 낙랑 두 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삼국사기에는 관구검이 현도에서 나와서 공격하다가 낙랑으로 물러갔다고 되어 있었다.
......
현재 주류 사학계의 한사군 위치비정에 따르면 현도군은 압록강 북부 지역에 있었으며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 그런데 위나라 유주자사는 현재의 북경 북부와 그 서쪽을 다스리는 벼슬이다. 이런 유주자사가 현도군에서 고구려를 공격해 낙랑군으로 퇴각했으면 현도군과 낙랑군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이익의 위치 비정이다. 요동(현도)에서 와서 요동(낙랑)으로 퇴각했다는 설명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런 위치비정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의 변질된 도그마이기 때문이다. -59쪽
진번군과 임둔군 소속 현들을 설치 25년 만에 낙랑군에 붙였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고조선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과장하기 위해 4개의 군을 설치했으나 불과 5년 만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군 지역이 그다지 넓지 못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진번과 임둔은 낙랑 현도와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낙랑 진번 임둔 현도 군은 모두 비슷한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사군이 근접해 있었으므로 서로 통합할 수 있었다. -62쪽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견해는 고려 중기 이후 유학자들이 은나라 출신 기자를 민족의 시조로 여기며 확산되었다. -91쪽
중국인들의 고대 동북 지역에 대한 역사지리인식은 뒤죽박죽이다. 앞의 사료와 뒤의 사료의 위치비정이 서로 모순된다. 그 핵심 이유는 요동군의 위치비정이 잘못된 데 있다. 요동군을 원래의 위치보다 훨씬 동쪽으로 비정했기 때문이다. 고대에 한반도까지 점령한 것으로 하려다 보니 요동군을 원위치보다 만주 동쪽으로 그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위치비정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92쪽
갈석산과 장성이 있는 수성현의 이름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결국 현재의 창려현 지역이란 뜻이다. 이것이 중국 여러 고대 사서들을 추적한 결과 나타난 결론이다. 이나바나 이병도의 수안설은 단 한 가지의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그들 머릿속의 환상일 뿐이다. -97쪽
1. 왕험성이 험독성인데 창려현에 있었다.(서광) 2. 험독성은 위만 조선의 옛 도읍지다.(응소) 3.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고 패수의 동쪽에 있다.(신찬)
세 가지 내용을 종합하면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은 창려현에 있었고, 패수의 동쪽에 있었으며, 왕험성의 서쪽에 패수가 흐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낙랑군 수성현이 있던 창려현의 서족을 흘는 험한 강은 난하다. 곧 지금의 난하가 패수가 되는 것이고, 이 강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 -99쪽
갈석산까지 갔다가 바다를 끼고 남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은 아들 호해도 부친 시황제처럼 동쪽 갈석산까지만 진나라 영토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한서>의 무제가 "태산에 행차했다가 다시 동으로 바다 위로 순행해 갈석에 이르렀다"는 구절도 한나라의 동쪽 영토가 갈석산까지임을 말해준다.-102쪽
<중국역사지도집>은 현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한반도 북부까지 연장해 놓았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이병도 등의 역사지리인식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사기>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요동이라고 했다. 만리장성을 황해도 수안까지 연결시키려면 황해도가 요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평안도, 황해도가 요동이라면 굳이 최영은 요동 수복이란 말을 쓸 필요도 없었고, 압록강 이북까지 군대를 보낼 필요도 없었다. 황해도가 요동인데 무슨 요동수복이 필요하겠는가?-104쪽
그런데 현재의 요하와 과거의 요수는 그 위치가 다르다. 현재의 요하는 심양 서쪽으로 흘러 요동만의 영구시로 빠져 발해와 합류한다. 그러나 진시황시대의 요수나 요하는 글자 그대로 '먼 강'을 뜻했지 현재의 요하가 아니다. 당시 낙양과 서안 등을 중심으로 여긴 중국인들은 '먼 강'이라는 뜻으로 요수/요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104쪽
한나라 때 인물인 유향이 요수를 현재의 난하로 비정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한나라 때는 현재의 난하가 요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난하가 요하라면 난하의 동쪽이 요동이 되는 것이다. -105쪽
진/한 시대의 요동을 현재의 요동보다 1천km 이상 서쪽으로 옮겨 비정하면 대부분의 위치가 들어맞는다. 물론 그 지역은 한나라가 끝내 차지하는 데 실패했던 고조선의 옛 땅이다. -107쪽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시대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며 이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곧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사마천시대에는 요동이라 부르던 난하 지역이었지만 현재의 지리개념으로는 요하의 서쪽인 것이다. 현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갈석산에서 조금 더 동쪽인 진황도 부근의 산해관이다. 그러나 산해관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명 태조 1년(1381) 때부터다. 연/진/한 나라 시기의 장성 흔적인 석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갈석산과 진황도 사이의 무녕이다. 명 태조 때에야 겨우 현재의 산해관에 관문을 쌓은 것이고, 과거에는 그보다 더 서쪽이었다. -109쪽
주류 사학자들은 313년에 미천왕의 공격으로 낙랑군이 멸망하면서 한사군이 비로소 모두 소멸되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조'는 고국양왕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 기록했다. 주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사군의 멸망 시점보다 72년이 지난 후에도 고국양왕은 요동과 현도를 공격했던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사군은 모두 만주 서쪽에 있었기에 끊임없이 고구려와 충돌했던 것이다. -135쪽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북한은 고조선 연구에 관한 한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많은 글을 발표했다. 고조선의 중심지는 만주 서쪽이었고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주체사관이 강조되고 북한 전체 역사를 평양 중심으로 재해석하면서부터 이런 연구 결과도 정치적으로 왜곡되었다. 예를 들어 1993년 평양 지역에 이른바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는 것이 그렇다. 고조선 강역이 마주까지 걸쳐 있었다는 견해를 바꾼 것은 아니지만 그 중심지에 대한 견해는 과거 요동에서 평양으로 크게 수정되었다. -148쪽
고조선 다음의 초기 국가들을 서술한 국사 교과서의 ‘여러 나라의 성장(36-40)’을 살펴보자. 이 항목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에 대해 기술했다. 고대 국가를 설명한 것 같지만 ‘신라와 백제’가 누락된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빼버린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건국된 B.C. 37년을 전후해 신라와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전하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우키치가 만든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하는 대신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으로 대치했다. 삼국지 동이열전은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ㄹ, 예, 한(삼한)’의 순서로 기록했는데, 여기에서 읍루를 제외했을 뿐 나머지는 같다. -175쪽
현행 국사교과서 36쪽의 지도는 강원도 지방에 동예를, 한반도 남부에 삼한을 그려놓았다.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은 동예가 아니라 그냥 예라고만 했으며, 그 지역에 대해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서술했다. 한국 주류 사학계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으로 비정했으니 예는 그 동쪽인 강원도쯤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제멋대로 위치비정이다. 주류 사학계는 삼국지가 중국의 삼국시대를 기술했다고 해서 동이열전도 3세기 때를 기록한 것으로 주장하는데,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예 지역이다"는 구절은 3세기 때의 상황이 아니라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인 서기전 2세기 이전의 상황을 기록했음을 말해준다. 물론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한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것도 있다. 이는 진수가 동이열전을 기록했지만 동이족 국가의 시말과 강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이열전은 엄밀한 사료 선택과 비판과정을 거쳐 쓴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사료를 대충 조합해 쓴 글이다. 게다가 삼국지는 한나라와 위나라에 맞선 동이족에 대한 반감도 가미된 책이다. -175쪽
국사 교과서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이 기록은 고구려가 태조왕 때 고대 국가로 발돋움했다는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 그나마 비교적 이른 세기의 인물인 태조왕을 써준 이유는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을 느껴서가 아니라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궁(태조대왕)이 죽고 아들 수성(차대왕)이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 고대 국가의 국왕은 삼국사기에 나와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 기록에 등장해야 비로소 실존했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 기록에 나온다고 모두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모본왕은 삼국사기와 후한서에 모두 등장함에도 인정받지 못했다. -179쪽
모본왕이 현재의 북경과 태원 부근을 공격했다는 이 기록은 주류 사학계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고구려의 서쪽 강역은 자고로 현재의 요하를 넘어가지 못했다고 보는데 이 기록은 중국 내륙 깊숙한 곳까지 공격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180쪽
국사 교과서가 태조대왕부터 인정한다고 해서 태조대왕의 사적을 자세하게 적어놓은 것도 아니다.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고 모호하게 써놓았다. 어디를 상대로 정복활동을 펼쳤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로 동옥저, 갈사왕의 손자 도두 등을 복속시킨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태조대왕조’는 태조대왕의 주된 공략지가 서쪽 중국 영토임을 말해준다. -184쪽
고구려의 왕위계승 원칙은 개국 당시부터 부자상속이었다. 다만 선왕의 장자가 너무 어리거나 정변이 일어났을 경우 다른 왕족이 계승했다. 제3대 대무신왕이 사망했을 때 맏아들 모본왕이 너무 어렸으므로 대무신왕의 아우 민중왕을 즉위시킨 것이다. 또한 모본왕은 정변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그 아들 대신 왕족인 태조대왕이 즉위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때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고국천왕 때 왕위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한발 더 나아가는 근거로 제시한 것은 주류 사학계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얼마나 논리가 허술한지를 보여준다. 주류 사학계의 논리대로라면 고국천왕은 왕권이 허약했던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 -189쪽
고구려는 기마무사가 주축인 정복국가였다. 정복국가는 국왕 중심의 효율적인 군사 체제를 가추고 있지 않으면 유지하기 어렵다. 고구려는 개국 초부터 주위 소국을 정복하는 것은 물론 서쪽 한나라 군현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효율적 군사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면 존속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고구려는 북경과 태원을 공격한 모본왕 때 이미 한나라가 위협을 느낄 만큼 강력한 고대 국가였다. -190쪽
김부식보다 약 100년 후의 인물인 이규보(1168-1241)도 동명왕편의 서문에서 "나는 지난 계축년(1193)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았다"고 했다. 김부식이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이규보가 살아 있을 때도 구삼국사가 존재했던 것이다.-198쪽
삼국사기는 주몽을 '천제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지만 동명왕편은 '천제의 손자'라고 달리 적었다. 동명왕편에서는 천제의 아들은 해모수이고 그의 아들이 동명이라고 보았기 때문인데 구삼국사에 그렇게 적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은 모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건넜다'는 동일한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구삼국사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는 뜻이다. 이 내용은 광개토대왕릉비문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김부식과 이규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존재를 몰랐다. 비문은 19세기 말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의 사쿠오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의 것이란 사실이 알려졌다. -200쪽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엄사수가 아니라 엄리대수로 나온다. 또한 다리를 만들어준 '물고기와 자라'가 비문에서는 '갈대와 자라'인 것도 조금 다르다. 삼국사기는 강물에 가로막힌 추모왕이 강물에다 "어찌해야 좋겠느냐"고 하소연하고, 동명왕편은 황천과 후토에게 "나 고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은 떠오르라"고 명령한다. 하소연과 명령의 차이는 크다. 고구려인들은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 자연물에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문도 갈대와 자라라는 자연물의 도움으로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김부식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보지 못했으나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에 거의 그대로 나온다는 것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김부식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다.-201쪽
삼국사기를 조금만 연구하면 김부식이 초기기록을 창작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왜곡에 지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김부식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고대 사료를 반영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것이다. 다만 유학자이기 때문에 합리주의에 기초해 약간의 윤색을 거쳤을 뿐이다. <사기>는 한나라 시조 유방의 모친 유오가 교룡과 관계한 후 유방을 임신했다고 전한다. 사마천이 이렇게 쎃다고 해서 사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 사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학자들이 유독 삼국사기에 대해서만 시비를 거는 것이다. -201쪽
삼국사기의 정확성은 1971년 우연히 발견된 충청남도 공주시의 백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 릉이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삼국사기 덕분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조'는 "왕의 히는 사마인데, 혹은 융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어서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재위 23년(523) 5월 "세상을 훙하셨다"고 전하는데, 무덤에서 나온 지석에는 "계묘년(523) 5월 7일 임진일에 붕하셨다"고 적혀 있다. 김부식은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만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으로 바꾸었을 뿐 내용 자체는 사망월까지 정확게 기재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허구성과 악의적 왜곡을 여실히 알 수 있다.-203쪽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다.(기원전 57)-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50쪽
먼저 신라가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했다는 전제가 일제 식민사학에서 나온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사로국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사로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진한과 변진의 24개 소국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204쪽
소우키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연구한 것은 신라사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우키치는 일본 고대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왜와 관련된 기록과 비교하기 위해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살펴본 것이다. 그런데 소우키치는 삼국사기의 풍부한 왜 관련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고사기, 일본서기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강력한 고대 국가이고 왜는 작은 정치세력으로 본 반면 고사기/일본서기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란 식민통치기관을 운영했다고 썼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른 기술을 한 것이 분명했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소우키치는 일본서기의 제14대 쥬아이 천황까지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고 제15대 오진 천황부터 실재한 국왕이라고 주장했는데 동일한 잣대를 삼국사기에도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신화 비슷한 고사기/일본서기 등과 달리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의 편년체 사서이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206쪽
삼한의 원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흠정 <만주원류고>를 주목해야 한다. 흠정이란 말은 황제가 직접 지은 서적이나 황제의 명으로 지은 책을 뜻한다. 만주원류고 역시 청 고종(건륭제)이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연원에 대해 역사지리적으로 고찰하라는 명을 내림에 따라 청 고종 42년(1777) 만들어진 역사지리서다. 만주원류고는 비단 삼한뿐만 아니라 숙신, 부여, 말갈, 신라, 발해 등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여기에서는 삼한만 살펴보자.
-213쪽
삼한의 위치에 대해 만주원류고는 "삼한의 방향과 위치는 대개 지금의 봉천 동북에서 길림 일대까지 준해 있었고, 그 지역은 조선 땅과 접해 있으며 우리 국조가 처음 터를 잡았던 곳과 가까운 곳이다"고 기록했다. 청나라 때 봉천은 현재의 심양시를 뜻하고 길림은 현재의 길림시를 뜻한다. 대체로 현재의 요녕성과 길림성 자리에 삼한이 있었다는 뜻이다. <만주원류고>는 마한의 위치를 개평 복주 영해라고 한 것인데, 이 지역들은 모두 요동반도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청나라 때의 개평은 현재의 요녕성 개현이고 복주는 현재의 복현 서북부 지역이며 영해는 여순시와 대련시보다 약간 위쪽이다. -214쪽
또한 진수는 삼국지 ‘한조’에서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 리다"라고 했다. 쓰다 소우키치나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처럼 삼한을 한강 이남에 비정하면 과거의 1리가 지금의 1리보다 약간 더 짧았다고 하더라도 삼한의 면적이 사방 1천 리보다 조금 더 클 뿐이어서 맞지 않는다. 그래서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다를 한반도의 서해와 동해로 볼 것이 아니라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처럼 요동반도를 기준으로 서족의 발해와 동쪽의 서해로 보면 삼국지의 위치비정과 들어맞는다. 이 경우 삼국지 ‘한조’의 "후한의 환제/영제 말년에 한/예가 강성해서 군현이 통제할 수 없자 백성들이 다수 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구절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후한 때 요동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고조선의 후손들이 고구려를 지나 한반도 남단까지 간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한국 고대 국가의 위치비정에서는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 편찬한 고대 사서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215쪽
이병도는 내물왕 때 마립간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재위26년(381) 전진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가 내물왕 때 건국되었다고 주장했다. 국사교과서는 여기에 발맞추어 내물왕 때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며 내물왕이 강력한 정복군주인 것처럼 서술했다. 삼국사기 ‘내물왕조’의 전쟁 기사는 세 차례인데, 재위 9년과 38년 신라를 침략한 왜병을 물리쳤으며 40년에는 북쪽 변경을 침략한 말갈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는 재위 11년과 13년 우호관계를 맺을 정도로 사이가 좋다가 18년에는 300여 명의 백제인들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근초고왕의 항의를 받았다고 전하고, 재위 26년 봄에 전진의 부견에게 위두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사도 있다. 또한 재위 37년(392)에 ‘고구려가 강성하기 때문’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가 있다. -216쪽
이처럼 내물왕이 진한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진한 지역은 내물왕 때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정복된 지 오래였다. 삼국사기는 신라 3대 유리왕(24-57) 때부터 주변 국가 정복에 나서 12대 첨해왕(247-261) 때쯤이면 진한 전 영역을 정복한 상태라고 전한다. 내물왕 이전까지는 경주 일대의 작은 소국이었던 신라가 내물왕 때 갑자기 강국이 되어 진한 일대를 정복했다는 주장은 적어도 삼국사기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비실증적 내용들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과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물왕이 셋째 아들 미해를 왜국에 인질로 보내고 아우 보해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김제상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고 두 왕자를 환국시켰다고 한다. 외국에 아들과 동생을 인질로 보낸 내물왕은 정복군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내물왕이 고구려에 자신을 ‘노객’이라 비칭하며 군사지원을 요청했다고 적었다. -218쪽
마립간이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다. 삼국유사 ‘왕력조’는 내물왕을 마립간이라고 적었지만 삼국사기는 마립간이 아니라 이사금으로 기록했다. 일연은 또 삼국유사 기이편의 ‘지철로왕(지증왕, 500-514)조’에 "우리말에 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임금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어 지증왕을 최초의 마립간으로 보았다. 마립간이란 용어에 대해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말을 인용해, "마립이란 말뚝이란 뜻의 방언"이라고 했다. 후세의 품계석처럼 왕의 말뚝 아래 신하의 말뚝이 늘어서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219쪽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란 조직이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자 두 나라의 역사의 공통성 확장을 위해 한일 두 나라 정상의 합의로 2002년 발족하여 2005년까지 3년간 활동한 단체다. 물론 이 단체는 양국 국민들의 국고로 운영되었다. -220쪽
한국 학자들이 국민세금으로 연구한 결과물인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2005) 중 제1권(제1분과, 고대사편) 중 ‘4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한일관계’란 항목을 보자. 여기에는 고구려가 언제 건국했는지를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 고구려가 제13대 서천왕(270-292) 때 사실상 건국되었다고 기술한 것이다. 종래의 정설이던 태조대왕(53-146) 때보다도 150년 이상 후퇴했다.
한술 더 떠 고구려가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한 것은 17대 소수림왕(371-384) 때라는 주장이다. 한국 학자가 쓴 이 글대로라면 고구려는 4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고대 국가가 된다. -223쪽
이병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27년조’의 주석에서 백제가 이때 6좌평과 16관등제 등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완비한 것을 고대 국가 성립의 근거로 들었다. 물론 고이왕 때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이병도의 주장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아류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런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는 서기 3세기 후반, 곧 고이왕 27년에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백제본기의 기사 자체가 ‘후세 백제인들의 고이왕 중시 관념에 의하여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간 식민사학자라고 비판받아온 이병도가 민족사학자로 격상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13점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을 실시했다. 그 중심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서기전 199년으로 나타났으며 가장 늦은 것은 서기 231년으로 나타났다. 풍납토성이 서기전 2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계속 확장되다가 서기 200년경에는 왕성이 완공되었음을 보여주는 데이터다. 2000년에 이미 풍납토성에 대한 이런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으나 2005년에 발간된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는 ‘3세기 후반에 풍납토성이 축조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더 살펴보자. -225쪽
백제가 근초고왕(346-375) 때 사실상 건국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병도가 주장한 고이왕 27년(260)의 건국연대보다도 100년 정도 더 후퇴한 것이다.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인식한 것일까? 여기에서도 역시 쓰다 소우키치를 주목해야 한다. 이 글들은 한국 주류 사학계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가 아니라 쓰다 소우키치라는 자기 고백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227쪽
실증주의를 표방한 쓰다 소우키치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일본서기를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허위사실이 많이 발견된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는 일제 식민통치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으로 몰았지만 일본서기를 연구할 때는 진지했다. 그 결과 쓰다 소우키치는 1942년 비공개재판에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일본 제15대 오진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그 실재가 불분명하다는 쓰다 소우키치의 말이 황실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가 대표적 황국사관론자라는 점에서 이는 일본서기가 갖고 있는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14대 쥬아이천황까지는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다. 일본서기 초기기록은 사실로 볼 수 없는 내용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232쪽
그래서 ‘주갑제’가 등장한다. 주갑이란 환갑, 회갑과 같은 말로 60년을 뜻한다. 일본서기는 120년 정도를 끌어내려야 사실과 들어맞는다. 일본서기는 유랴쿠(21대 천황) 20년(476)이 되어서야 비로소 삼국사기와 연대가 맞아 들어간다.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비교해 그 진위를 가려야 한다. 삼국사기가 진위를 판정하는 저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주류 사학자들은 거꾸로 삼국사기에 주갑제를 적용해 시기를 끌어내렸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온조왕이 재위 27년(서기9) 마한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를 3주갑(180년) 끌어내려 초고왕 24년(서기 189)의 일로 보거나 4주갑(240년) 끌어내려 고이왕 16년(서기 249)의 일로 본다. 심지어 6주갑 끌어내려 근초고왕 24년(서기 369)의 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80년에서 360년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은 주갑제가 아무런 원칙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33쪽
일본서기에 조작 흔적이 많다는 것은 국제적 상식이다. 그런데 한일역사공동위원회는 거꾸로 일본서기를 신봉하고 삼국사기를 부인한 것이다. 여기에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이므로 그가 편찬한 기록은 사대주의적 잣대에 의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혐의까지 덧씌웠다. 한때 국사교과서는 김부식을 비판하는 신채호의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겉으로는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인식하게 한 것이지만 속내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하게 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당나라 가충언이 당 고종에게 "고구려비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900년이 못 되어 80세 대장에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신채호는 810년 이상은 되어야 900년이라고 했을 것이 아니냐고 본 것이다. 또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추모왕의 17세손이 광개토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의 세대로 따지면 13세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34쪽
신채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태조왕의 재위연대(53-146)가 93년이나 되는 것은 왕통을 태조왕 중심으로 정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구려인들이 그렇게 정리했는지, 김부식이 그렇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신채호 주장의 핵심은 신라본기나 백제본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2백 년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이병도가 제17대 내물왕(356-402) 때는 신라가 사실상 건국되었다고 서술했으나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는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건국되었다고 본 것이다. 내물왕과 눌지왕은 재위연대의 연속성이 불과 20년도 안 되는데 이들은 왜 굳이 눌지왕을 고집하는 것일까? 식민사학의 교주 소우키치의 글에 역시 답이 나와 있다. -235쪽
고고학에서는 철제 유물이 출토된 유적의 종합적 성격을 중요시한다. 해당 유적이 지배층의 유적인지, 곧 해당 시기에 계급 분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배층의 유적이 확실하다면 고대 국가 성립의 근거로 해석하는데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유물들의 경우 서기 1세기 전후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 때 이미 국가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뿐만 아니라 경주 사라리 유적이나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유물들도 서기 1~2세기로 비정할 수 있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서기 5세기경에야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주장은 어떤 경우에도 성립할 수 없다. 고고학계에는 한국에서 철 생산 시기는 아무리 늦어도 서기 1세기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성립되어 있다.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에서 신라 건국 시기를 5세기 무렵이라고 서술한 것은 조선사편수회를 추종하는 일본사학계 일부의 강변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해방과 동시에 해체되었지만 그들이 만든 식민사학 이론은 주류 사학계에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238쪽
노론은 장희빈의 왕비 책봉을 계기로 숙종 때 잠시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경종의 왕권을 무력화하려다 소론에게 잠시 정권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ㄴ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정조 때 소론과 남인들이 일시 정계에 진출했으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노론 우위는 계속되었다. 조선 말 노론 중 일부는 위정척사운동에 가담했지만 일부는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에 협조하고 그 대가로 기득권을 유지했다.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조선 후기 노론을 거쳐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던 일제 어용학자들이 해방 후에도 사학계의 주류가 됨으로써 한국사 서술은 일제 식민사관과 조선 후기 노론사관으로 얼룩졌다. 이들이 집필한 교과서는 국정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무조건 암기해야 하는 하나뿐인 도그마가 되었다. 이들은 역사학의 방법론에 불과한 실증주의를 표방하며 살아남았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을 해방 후에도 온존시키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식민사학에 불리한 것은 아무리 사료가 많아도 무시해온 것이 그 반증이다. -242쪽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전 국민의 상식으로 승화한다. 첫 번째는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처럼 창작하는 단계로 이는 김장생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런 중대한 발언을 기록하려면 언제 어디에서 했는지를 특정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일찍이 경연에서"라고 모호하게 기술한 것이다. 선조실록에 십만양병설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후 효종 8년(1657)에야 작성한 선조수정실록의 기사 말미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이가 ‘미리 십만 군사를 길러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유성룡이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입니다’하며 극력 변론하였다는 설명이 실려있을 뿐이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재해야 하는 본문에는 싣지 못하고 모호하게 본문 끝에 사관의 논평으로 넣었으나 이 내용 역시 김장생의 행장을 보고 삽입한 것이다. -246쪽
두 번째는 "일찍이 경연에서"라고 모호하게 기술한 것이 정확하게 "선조 16년(1583) 4월"의 일로 특정화되는 단계다. 이는 김장생의 제자인 송시열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의 스승은 특정하지 못했던 발언 날짜를 이이가 살아 있을 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송시열이 정확하게(?) 적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이이는 임란발생 10년 전 그달에 임란을 예언한 현인이 되었다. -247쪽
세 번째는 문성이 문성으로 바뀌는 단계다. 앞서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는 이문정이라고 나오는데 송시열이 쓴 율곡연보에는 이문성으로 나온다. 문성은 이이의 시호다. 이재호 선생이 조선사 3대 논쟁에서 밝혔듯이 유성룡이 이이를 이문성으로 지칭한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시기는 인조 2년(1622)이고, 유성룡이 별세한 시기는 선조 40년(1607)이다. 김장생이 쓴 사계집의 율곡행장에는 ‘이문성’이 아니라 ‘이문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조 25년(1749)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도 모두 ‘이문성’이 아닌 ‘이문정’으로 기재되어 있다. 송시열도 이문성이 아니라 이문정으로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순조 14년(1814)에 간행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이 아닌 ‘이문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네 번째는 이문성을 이이로 바꾸어 국사 개설서나 국사 교과서에 실어 전 국민적 상식으로 만든 단계다. -248쪽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있지도 않은 율곡의 십만양병론을 창작해낸 것이 아니다. 바로 유성룡의 반대로 십만양병론이 무산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이가 서인의 영수라면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발언을 있었던 것처럼 가정해 반대 당파의 영수를 공격하는 것은 전형적인 정치공작이다. 이이와 유성룡은 반대 당파의 영수지마 국익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던 사이였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는 다르지만 불우한 이순신을 함께 도와주려고 했다. 두 정치가는 당파를 떠나 불우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서로 상의하던 사이였지만 이이의 제자들은 당심에 찌들어 있지도 않은 십만양병설을 창작해 반대 당파의 영수를 비난하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250쪽
선조실록은 정여립의 옥사를 정철 등이 반대파를 죽이기 위해 꾸몄다고 기록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생원 양천회가 정여립과 이발 등이 서로 친했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 말미에 "이 상소는 정철 등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남김없이 죽이기 위해 양천회를 사주하여 올렸다"고 부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장생은 서인 정철을 옹호하기 위해 서울에 있지도 않은 유성룡이 이발의 모친과 아이를 죽였다고 조작한 것이다. 김장생이 만든 앞의 대화에서 정철의 자리에 유성룡을 세우고, 유성룡의 자리에 정철을 세우면 더욱 그럴듯할지도 모른다. -254쪽
김장생은 성운이 남명행장에서 "조식이 기대승을 크게 비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운은 남명묘갈명을 쓴 적은 있어도 남명행장을 지은 적은 없다. 또한 남명묘갈명에도 남명이 기대승을 비판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으니 이 역시 김장생의 악의적 창작인 것이다. 유학자들의 중요한 수양법 중의 하나가 신독이다. 혼자 있을 때도 인욕, 물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더구나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다. 혼자 있는 데서도 삼가야 할 유학자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창작해 반대 당파의 영수를 비난하는 재료로 사용했으니 이것이 어찌 예이겠는가?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은 선조실록을 한 번만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병도가 선조실록을 읽어보지 못했을 리 없지만 그는 자신의 집안 당파인 노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십만양병설을 사실처럼 믿게 만들었다. 마치 김장생이 만든 사실 왜곡의 전통이 노론 후예 학자들에 의해 연면히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255쪽
송시열이 효종의 가장 큰 정적이자 북벌을 비롯한 효종의 모든 정책에 발목을 잡았음은 부명하다. 그럼에도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마치 송시열이 효종의 충신으로서 북벌을 준비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했다. 이 역시 노론의 당론에 의한 서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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