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 비밀 노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만 본다면 심리 철학 에세이스러워 보이건만, 이 책은 소설이다. 세 권으로 구성된. 아직 1권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2권과 3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권만 본 소감을 얘기한다면 몹시 충격적이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 중으로 보인다. 대도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던 쌍둥이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온 동네 사람들이 '마녀'라고 수근대는 할머니.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어머니도 그 이유로 그곳을 떠나서 10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전쟁으로 인해 도시에서는 도저히 먹을 걸 구할 수가 없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옷가지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함께 맡겼지만 곧 할머니에 의해 모두 팔려버린다. 심지어 어머니가 부치는 편지도 모두 없애버리는 할머니. 모녀 사이의 골은 생각 이상으로 깊다. 지독하기만 한 할머니의 행동은 상식 밖으로 보이고 대체 왜 이렇게 꼬이고 꼬였을까 싶건만, 작품을 다 읽다 보면 어느 정도 그 노파의 심사가 이해가 간다.  

화자는 쌍둥이 소년들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개인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나 '하나'로 구분되어 지칭되는 그들. 어린 소년들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서 모든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 서술은 지극히 건조하기 짝이 없다. 애어른으로 보이는 이 아이들은 단지 조숙하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의 반응 말이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 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이불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막연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33-34쪽)

 
   

아직 젖니가 다 빠지지도 않은 어린 녀석들인데 사용하는 단어도 남다르지만,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의 모호함을 파악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거르는 작업을 해낸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훈련시키기도 하는데, 아픔을 참아내기 위해서 부러 때리기도 하고, 배고픔을 참아내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심지어는 구걸을 연습해보기도 한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생존 본능이라고 하기엔 그 치밀함에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이들은 나름의 동정심을 갖고 있다. 이웃집 소녀와 그 어머니를 도울 때 그랬고, 탈주병을 도울 때도 그랬다. 동정심은 아이들이 가진 순수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복수심 또한 그 못지 않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의에 어긋난다면 몇 갑절의 심판을 돌려주는 아이들. 단지 어리기 때문에 판단력이 미숙하다고 보기엔 아이들은 놀라우리만치 이성적이다.  

   
 

 -아저씨도 아다시피, 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우리는 아직 아저씨처럼 어른이 아니라두요. (50쪽)

 
   

아이들은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가족이니까 꼭 함께 살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미끼로 사용할 수 있고 무엇에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묘사되진 않았지만, 예쁜 아이라는 강점을 스스로 활용하는 교활함마저 보인다.  

이 건조하고 살벌한 가운데에도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외롭고 두려운 인생들이 비쳐진다. 남편을 독살하고 딸을 증오하고, 돈을 갈취하기 위해서 맡겨진 소녀를 죽일 결심까지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할머니도 어느덧 이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잔잔한 정을 느낀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마음이건만 할머니의 변화가 놀랍다. 어린 소년들은 전쟁이 깊어지면서 더 잔인해지교 치밀해지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혼자서는 단단했던 마음이 함께 살면서 더 약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느껴지는 건, 이들이 전쟁 때문에 그런 성정을 갖게 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주어진 환경이 보다 독해지게는 만들겠지만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인성을 무시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 책 (상)권의 제목은 '비밀노트'이지만 시리즈 전 권의 총 제목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다. 세 가지 거짓말. 어떤 거짓말일까? 실존에 관한 질문일까?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물음일까?  

이토록 담담한 목소리로, 단 한 번도 흥분하지 않은 채 이 정도로 독자를 뒤흔들 하드코어를 보여주다니, 작가의 역량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소름과 함께 어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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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1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12-0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표지와 제목만 보고 철학책인줄 알았다는...

마노아 2009-12-02 06:57   좋아요 0 | URL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 책을 잘 이해 못한 것 같아요. 더 읽어야 제목을 파악할 수 있겠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12-0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스산하지요. 저도 저 말에 대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마노아 2009-12-02 13:41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스산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네요. 읽으면서 내내 움찔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