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시선 271
박연준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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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01:35 a.m.

바퀴벌레가 싱크대 앞을 지나간다
얼른 슬리퍼로 때려잡는다
후다닥 도망치다 압사당한 생,
사체는 그 자체로 비명이다
너의 더듬이가, 가는 다리들이 이 밤의 흐름 속에서 눌린다
내 반사행동 속에 숨어 있는 살기가 싱싱하다
얼마나 더 움직이는 것들ㅇ르 죽이고 싶어하는지
살인 후의 긴장감으로 속눈썹이 곤두선다

딱딱한 살인과 소리 없는 죽음 사이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식탁의자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바지런한 다리들
허옇게 질린 슬리퍼는 제 몸이 칼인 줄 알았을까?

서슬이 퍼런 팔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한밤중 뭉개진 생의 자국을 관람한다-43쪽

일곱살

...(중략)...

글쎄, 일곱살 때 나는 꼭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자는 척 했어요
어른들은 웅크리고 자는 걸 못 견디어했죠
울고 있어도 만세만 부르면 안심하곤 사라졌어요
봐요, 만세잖아요 만세, 아무 문제 없다니까요
나는 일곱살만큼 늙어 있었고, 토큰가게 주인이 꿈이었어요
작은 가게 안으로 이따금 들어오는 낯선 손에게
토큰 두 개씩 떨어뜨려주고는, 꾸벅꾸벅 졸고 있고 싶었죠

이빨 빠진 바람처럼 순한, 일곱살이었어요-58쪽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웬 물건들이 저리 많은지요 겨울 점퍼가 들어 있는 상자들, 못 쓰게 된 기타, 찬합통, 고장난 전축, 부러진 상다리 들이 저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가난한 집 방바닥을 내려다봅니다 가난한 집 장롱 아래는, 술 잔뜩 마시고 고꾸라진 늙은 남자가 누워 있습니다 어둠의 밀도와 병이 진행되는 속도에 따라 남자의 흰 수염이 자라나고 움직이지요 하얗게 일렁이며 꽆피우는 창백한 봄을, 가난한 집 형광등의 침침한 눈이 끔뻑 끔뻑 바라봅니다 가난한 집 물건들은 모두 사연 있는 듯 입이 무겁고, 가난한 집 아기는 종일 무릎으로 걷다, 심심하면 무릎을 안고 잠이 듭니다 가난한 집 행주는 소심하게 몸 빙빙 말고 있고, 가난한 집 선풍기는 우스꽝스럽게 달달 돕니다 돌다가 끽 끽, 헛소리도 합니다 가난한 집 장롱 위, 오래된 물건들은 보좌 위에 앉아 시름 많다고, 먼지들만 슬금슬금 날아듭니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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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0-0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잘 봤어요.^^ 마노아님 즐거운 추석 되세요.^^

마노아 2009-10-01 23:10   좋아요 0 | URL
헤헷, 꿈꾸는섬님도 즐거운 추석 연휴 보내셔요. 일은 적게 하고, 많이 쉬셔야 해요~

꿈꾸는섬 2009-10-02 00:05   좋아요 0 | URL
앗, 전 설거지만 할듯해요.ㅎㅎ

마노아 2009-10-02 00:25   좋아요 0 | URL
옆지기님의 지혜로운 처신을 원츄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