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김윤성 옮김 / 들녘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소싯 적에 내 로망(?)으로, 고통 받는 주인공은 아름답다!라는 요상한 신념이 있었다. 학대 받는 여주인공은 싫지만, 학대 받다가 결국에 일어서는 남자 주인공은 멋있었더랬다. 물리적인 충격과 가학은 싫지만, '가짜'라는 설정 하에서는 다소 멋진 컷들이 나온다는 게 내 생각이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과 드라마틱한 설정 속 이야기이고, 현실 속 역사 속 '고문'은 그 차원이 너무도 다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문부터 중세의 종교 재판, 유럽의 마녀 사냥 등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대체로 유럽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간혹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중국, 일본, 인도에서의 고문을 언급해 주고 넘어간다. 저자가 서양인인 까닭에 자료를 접근하기 쉬운 쪽으로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듯하다.  

어차피 이 책의 소재와 주제가 '고문'인 탓에 눈살을 찌푸리고 소름이 돋게 하는, 그리고 토악질이 나오게 하는 내용이 아주 많이 나오긴 하는데, 가장 끔찍했던 것을 들어보라고 한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풍습을 꼽겠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고통을 주기 위해서 하는 고문보다 '통과의례'로서의 고문이 자행되는데(물론,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고문도 있다!), 그 통과의례가 너무 섬뜩하다.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원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무척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너무 유혈이 낭자해서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자체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번 보기는 좀처럼 엄두가 안 나는 그런 영화였더랬다. 그런데 이 책을 살펴보니 영화에서 묘사한 것은 결코 과장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잔인한 고문의 풍습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번 무릎팍 도사에서 한비야씨가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꼭 그런 식의 풍습 말이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미개'하다고 밖에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물론, 그들 나름대로는 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용감한 사내가 필요하고, 그 용감성을 증명해 보이는 수단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인다는 거겠지만, 그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문명이 말살당한 것이 정당하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고문'을 생각하면 역사 속에서는 중세의 종교재판과 유럽의 마녀 사냥을 떠올릴 텐데, 아마도 전 대륙에 걸쳐서, 이런 고문의 풍습은 늘 있어왔던 게 아닐까 싶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우리나라든 모두 매한가지로(이 책에서 우리나라의 예는 나오지 않는다. 소개되진 않았지만 이 책의 고문 사례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옛 형벌제도는 다소 부드러워보인다. 상대적으로...).  




고문은 여러가지 이유로 자행되어왔다. 형벌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죄를 자복시키기 위해서 쓰이고, 공범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쓰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고문이 쓰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수다스럽고 잔소리가 심한 여자들을 의자에 묶은 채 물 속에 풍덩 빠뜨렸다가 건지기를 반복하는 물고문이 유행했는데, 이 제도는 미국으로 수입되기까지 했단다. '잔소리'가 심하다는 이유로 죽어 마땅한 어떤 '여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혹은 우민화를 위해서, 쉬운 통치를 위해서도 고문을 얼마든지 쓰여졌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마녀라고 지목하는 순간, 그 사람은 가차 없이 마녀가 되어버렸고, 마녀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을 신고한 사람을 역시 마녀라고 지칭하는 순간 그 사람 역시 피고가 되어 마녀로서 죽어간다.  

   
 

 마녀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에 고문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자백은 불충분하다고 여겨졌으며, 오직 고통과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만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여겨졌다. 한 작가가 지적했듯이, 마녀로 판정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고문당해 온갖 종류의 사악한 행위들을 자백하지만 않았다면 마녀라고 의심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직자들은 이런 논리 자체가 오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백을 얻어낼 때까지 고문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 160쪽

 
   


자백도 안 되고, 너무 이른 긍정도 안 되는, 충분히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 당연히 죽어가는 순서를 반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즐겼고, 또 가학적 성향도 즐겼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처럼 영국에 전성기를 열어준 여왕 조차도 잦은 의심으로 고문판을 늘렸고, 민주주의의 싹이 돋아나는 순간에도 고문으로 인한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사실, 20세기에도, 그리고 오늘날 21세기에도 어디에선가는 고문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물론 알고 있지만.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정말로 고문을 필수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단지 이용한 것이었을까?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자신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소문을 냈다고 했다.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게 통치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그런 개념으로, 분명 고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힘을 이용하느라 고문의 폐지를 굳이 말하지 않아온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반대로 용감하게 고문이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라고 주장한 볼테르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에서 보듯이 인간은 권위와 권력 앞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습성도 분명 갖고 있다. 나치의 학살에서 보듯이 평범한 인간도, 멀쩡한 인간도 얼마든지 무서운 흉기로 둔갑한 예는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인간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인간이었던 것도 역사가 증명해 왔다. 

인간이 저지른 범죄가 이것 뿐이겠냐마는, 다시 한 번 참으로 인간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대화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인권의 중요성을 모두가 힘써 얘기하고 또 동의하지만 이제는 이런 고문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고문이 목을 죄어온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톱날이 말이다. 너의 죄와 나의 죄가 다르고, 너의 '신분'과 '계급'이 나의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니... 

영화 '마터스'를 보고 나서 그 끔찍한 잔상이 오래 남아서 심리적으로 힘들었다. 순전히 내 호기심으로 집어든 이 책도, 다 보고 난 지금 심리적으로 부담스럽고 버겁다. 같이 보려고 빌려온 '처형대 세계사'를 이어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뭔가 감정과 눈의 정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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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9-2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것이 바로 문제의 그 책~~~ㅎㅎ
전 볼 엄두가 안나겠는데요.

마노아 2009-09-23 23:39   좋아요 0 | URL
넵, 바로 그 문제의 제목이었어요.ㅎㅎㅎ

후애(厚愛) 2009-09-24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문하는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은 꼭! 북커버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ㅎㅎㅎ

마노아 2009-09-24 11:49   좋아요 0 | URL
공공 장소에서 대놓고 보기엔 여러모로 난감한 책이었어요. 어제 학교에서 다 읽어버렸어요.^^;;;

Sati 2009-09-2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글을 읽고 난 여파인지, 생각해보니 어제 꿈에 큰 솥에 백인 남자 댓 명을 넣고 푹푹 고고 있었다는...

마노아 2009-09-24 23:54   좋아요 0 | URL
호곡, '고문'이란 단어와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나봐요. 오늘 결국 처형대 세계사는 포기하기로 했어요. 내일 도서관에 반납하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