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의 역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김윤성 옮김 / 들녘 / 2004년 8월
품절


티베리우스를 계승한 칼리굴라는 식사하면서 죄수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즐겨 구경했다. 어떤 죄에 대해 그는 중국의 ‘능지’(천 번 칼로 도려내어 죽이기)와 비슷한 고문을 시행하도록 명령했는데, 칼날로 조금씩 반복해 찔러서 희생자들이 스스로가 죽어가는 것을 느끼도록 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사람을 두 토막을 내서 죽였으며, 모욕적인 풍자를 썼던 작가를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불태웠다고 기록했다.

-25쪽

원형경기장의 관리 담당자들은 죄수들이 형 집행 전에 자살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만 했으나 이를 막지 못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예를 들어 집정관이었던 심마쿠스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검투사 시합을 열었을 때, 죄수들이 경기장에 나가기 전에 서로의 목을 졸라 자살을 도왔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31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난 걸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스페인어만을 말했으며 스스로를 크리스토발 콜론이라고 불렀다. 스페인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몇몇 역사가들은 그가 사실은 개종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02쪽

개종자들의 두 번째 세대가 지나 16세기 중반에 이르게 되자 종교 재판소는 더 이상 유대교를 근절하는 것에 관여하지 않았고, 관심을 ‘이단적’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올바른 종교적 신조’를 강화하는 것으로 돌렸다. 예수회의 창설자 로욜라조차도 두 번이나 이단으로 소환당해 심문을 받았을 정도였다.

-103쪽

종교재판에는 신분 고하의 차별이 없었다. 예컨대, 희생자들 중에는 필리프 2세의 장자였으며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던 돈 카를로스도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카를로스는 종교재판소의 관행들을 싫어했으며 사적인 자리에서 그런 점을 비난했다고 한다. 결국 몇몇 시샘하는 자들이 이를 보고했고, 카를로스는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이단으로 판결받았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높은 지위 덕택에 그는 형 집행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맥을 끊는 방식을 택했으며, 과다출혈로 인해 1568년에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119쪽

성실청이라는 방의 이름은 방의 천장에 별들이 그려져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어떤 방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었다. 본래 왕의 회의실이었던 이곳에서는 일반 법정에서 취급하지 않는 탄원 같은 사건들을 다루곤 했다. 그러나 1509년 헨리 8세가 집권한 후 당시 장관이었던 토머스 울시가 성실청 법원을 자신만의 재판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울시의 비서이자 계승자였던 토머스 크롬웰은 광범위하게 분산되었던 권력을 이 법정으로 통합했다. 두 원로 판사와 추밀원 임원들로 구성된 성실청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곳은 차츰 임의로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고, 고문의 주된 선동자가 되어갔다. 이러한 학정은 찰스 1세 때인 1640년에 고문을 폐지하라는 항의의 물결이 거세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132쪽

마녀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에 고문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자백은 불충분하다고 여겨졌으며, 오직 고통과 고문을 통해 얻어진 자백만이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여겨졌다. 한 작가가 지적했듯이, 마녀로 판정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고문당해 온갖 종류의 사악한 행위들을 자백하지만 않았다면 마녀라고 의심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직자들은 이런 논리 자체가 오류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백을 얻어낼 때까지 고문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160쪽

환자도 고문당해야 하는가? 답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우선 죄수를 가두어둔다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 회복시키는 방법은 끓는 물을 겨드랑이에 붓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다른 방법은 끓는 물을 겨드랑이에 붓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다른 방법은 불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죄수는 땀을 홍수같이 흘리게 되는데 이 땀은 신체의 모든 땀구멍에서 질병을 없앨 것이며, 따라서 죄수는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신 중인 여인에게는 고문과 형의 집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예 기간은 아기를 출산한 후 한 달까지였다.

-165쪽

영국에서 마녀 박해는 대륙보다 늦게 시작되었고,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6세기까지도 마법에 대한 형벌은 비교적 가벼워서, 겨우 형틀에 한두 시간 손발을 끼워두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정도였다. 1542년, 헨리 8세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마법에 대한 특별한 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5년 후,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이 법령은 폐기되었다. 1558년,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에 마법의 위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여왕은 온갖 종류의 음모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의 음모와 갖가지 종류의 요술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고 여겼다.

-171쪽

매튜 홉킨스가 자백을 쥐어짜내기 위해 가장 즐겨썼던 방법은 마녀들을 ‘수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고문의 정당화를 위한 근거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후에 영국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가 쓴 <악마론(1597)>이라는 책에서 찾았다.

마녀들의 극악무도한 불경함이 나타나는 초자연적 표지로서 물은 마녀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녀들이 성스러운 물을 흔들어 떨어내고, 세례의 은총을 멋대로 거절하는 것은 신께서 정해놓으신 것이다.

마녀를 수영시킬 때는 우선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왼쪽 엄지발가락에 묶고 물속에 집어넣었다. 만일 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유죄로 판정되었고, 가라앉으면 무고함은 증명되었지만 대개는 익사하고 말았다.
-174쪽

칼을 쓰면 손이 입에 닿지 않기 때문에, 만약 친척이나 친구의 도움이 없다면 희생자는 음식과 물을 못 먹어 굶어 죽게 된다.(중국)

-221쪽

중국에서 쓰였던 형벌 중 가장 유명하고도 무서운 것은 능지, 즉 ‘칼로 천 번 도려내어 죽이기’였다. 이 긴 시간을 요하는 형벌에 드리운 사디즘에는 때로 운 또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섞이기도 했다. 집행자는 종이가 덮인 바구니에 각각의 신체 부위가 표시된 칼들을 담아 가지고 와서는 임의로 칼 하나를 고른 뒤, 손잡이에 써 있는 신체 부위를 도려냈다. 형을 집행당하는 죄수의 가족들은 집행자에게 뇌물을 주어 ‘심장’이라고 쓴 칼을 꺼내도록 해서 되도록 신속하게 희생자의 시련이 끝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222쪽

연합국 전쟁포로들은 극동 지역에서 가장 잔혹한 고통을 겪었다. 일본 군인들은 항복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던 만큼 자신들이 붙잡은 포로들을 학대하는 것도 매우 당연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었고, 가장 영양가 없는 음식을 배급받았으며, 자주 몽둥이와 채찍으로 맞았다. 만약 이에 항의하면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해야 했다.

-248쪽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폭동죄로 잡혀온 20명의 죄수들과 모스크바에 있는 세메노프스키 연병장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사형 선고문은 말을 더듬기로 유명한 장군이 고통스러우리만치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사격대에 발포 명령이 막 떨어지려는 순간 보좌관이 니콜라스 황제의 밀봉된 편지를 가지고 달려왔다. 장군은 편지를 펴서 내용을 발표했다. 사형 선고는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런 극적인 감형이 순전히 황제가 꾸민 일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근래에도 많은 경우에 희생자들은 총소리를 듣고 자신이 죽었다고 여겼다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곤 한다. 이러한 충격은 평생 동안 계속되는 인지능력의 손상을 가져오기에 충분할 것이다.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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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9-2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러 나서 한 번 다 날려주시고....ㅜ.ㅜ

카스피 2009-09-2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에서는 고문의 역사가 마녀 사냥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하느것 같더군요^^
종교재판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을 고문으로 죽였다고 하네요.

마노아 2009-09-23 21:37   좋아요 0 | URL
정말 사람 여럿 잡았더라구요. 그리고 유럽뿐 아니라 전 대륙에 걸쳐서 너무도 오래오래 고문이 자행되어 온 거예요. 특히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고문 풍습은 엄청 놀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