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이유정 푸른숲 작은 나무 13
유은실 지음, 변영미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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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언니가 나한테 꼭 읽히고 싶은 동화책이 있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주인공이 '길치'라고 한다. 호곡! 

이 책에는 단편이 다섯 개가 실려 있다. 언니가 나를 향해 꼭 읽어보라고 한 '멀쩡한 이유정'을 제일 먼저 읽었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이유정은 초등학교 4학년인데 새 집으로 이사하고 3주가 되도록 두 살 어린 동생을 따라 등하교를 한다. 심각한 길치이기 때문이다. 멀쩡한 이유정이 그 정도도 못하겠느냐마는, 유정이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어느 날 의리 없이 먼저 가버린 동생 때문에 온통 헤매며 집을 찾아가는 유정이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책을 통해 펼쳐진다. 정말, 남일 같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중학교 때 멀리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 고등학교에는 전교에서 나 혼자 입학했다. 당연히 아는 사람도 없고 동네도 낯설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도착하는 학교. 그 사이사이 골목길은 어찌나 많은지... 늘 뭔가 공상에 잠겨 있던 나는 앞에 똑같은 교복을 입은 우리 학교 학생을 쫓아가다가도 금세 그 학생을 놓쳐서 헤매기 일쑤였다. 물론 또 다른 같은 교복 여학생을 찾아서 기어이 학교까지 도착하기는 했지만, 15분이면 갈 거리를 늘 30분 걸려서 도착했다. 1학기 내내. 2학기 들어서는 안 헤매고 잘 찾아간 듯하다. 그러니까 학교 가는 길을 익히는데 한 학기를 꼬박 바쳤다는 이야기.  

그런 종류의 에피소드는 늘 무궁무진했다. 첫 직장의 학교는 전체 학급이 60학급에 다다를 만큼 아주 규모가 컸는데 당연히 건물도 많았고, 그 건물들은 내게 미로처럼 보였다. 찾아가려는 교실까진 무사히 갔는데 교무실로 다시 되돌아 오는 일은 어찌나 어렵던지. 결국 다시 큰 길로 나가서 운동장 가로질러 오기 일쑤였다. 그런 미로 스타일의 학교가 그 후로도 얼마나 많던지...;;;; 

그래서, 유정이의 당황스런 마음이 너무도 십분 이해가 된다. 그리고 유정이의 학습지 선생님까지. 

작품집이 굉장히 유쾌하다. 두번째 단편을 빼면 대체로 좀 심각한 상황을 소재로 삼았는데도 전혀 어둡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유머와 감동을 같이 전한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에피소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자랑을 하고 싶었던 손자 녀석은 할아버지가 술주정뱅이였다는 얘기를 할머니로부터 듣고는 이만저만 실망하는 게 아니다. 믿었던 외할아버지도 노름꾼이었다고 하니 할아버지 자랑 프로젝트는 물 건너가게 생겼다. 숙제를 해가야 하는 아이더러 거짓말을 쓰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끄러운 얘기를 고스란히 적을 수도 없는 엄마와 할머니의 고민이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은 마시라. 두 분이 짜낸 지혜가 얼마나 만족스럽던지. 그렇게 쓴다면 나도 내 가족에 대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 보다 낭만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단지 '긍정적으로' 말하기의 범주라기 보다, '지혜롭게' 넘어가기의 느낌이다. 그리고 그 편이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고 마음에 드는 처방이다. 인위적인 긍정 주문이 아니어서 말이다.  

두번째 단편 '그냥'은 좀 안쓰러웠다. 우리의 교육 현실이 갈수록 태산이지 않았던 적이 어디 있겠냐마는, 요즘 들어 더 심각하게 위기를 느끼면서 그 까닭은 이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도대체가 인생의 관심사라곤 아이들 사교육과 아파트 밖에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게 되어 고모 집에 맡겨진 진이는 뭐든 내키는 대로 해보면서 거기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못하고 '그냥'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엄마라면 어림 없었지만 고모는 그 '그냥'을 용인해 주시는 분이다. 학원 가기 싫을 때도 있고, 학습지 하기 싫을 때도 있고, 그저 내키는 대로 길을 걷고 아아아아~ 타잔 흉내를 낼 수도 있는 일인데,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금지되고 규격화된 삶을 벌써 사는 아이의 갑갑함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기분 좋은 '이모'가 아닌 '고모'가 등장한 것도 좀 기뻤다. 보통은 '이모'가 '고모'보다 더 가깝게 받아들여지곤 했던 것 같아서 말이다.^^ 

세번째 단편이 처음에 말했던 '멀쩡한 이유정'이고 네번째는 제일 마음이 아팠던 '새우가 없는 마을'이다. 엄마 아빠가 모두 집을 나가버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 보호 대상자로 살고 있는 '사나이' 이기철!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도 손주를 향한 마음은 누구 못지 않은 이 당당한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왕새우 먹기 프로젝트는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한다. 버스 타고 40분을 나가야 갈 수 있는 마트에서 판다는 왕새우. 카트를 빌려서 담아야 한다는 왕새우. 할아버지는 그만 겁이 나시고 만다. 해본 적이 없고 본 적이 없으니 두렵고, 값이 비쌀까 겁나고, 갔다가 더 실망만 하고 눈앞에서 돌아올까 겁이 났던 할아버지. 너는 나중에 새우가 있는 마을에서 살라는 당부는 한 편으로 웃음을 주면서 더 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우울하거나 슬플 거라고 예상하면 곤란하다. 더 진하고 예쁜 마무리가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단편은 '눈'이다. 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잃은 영지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이런저런 불만에 싸여 있다. 엄마는 공기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말했지만, 동네 공기가 나빠서 폐가 좋지 않은 엄마를 볼 때 공기도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눈'은 공평하다고 여겼는데, 이웃집 가난한 꼬마 아이는 장갑도 없어서 눈사람을 못 만들고 있으니 눈도 역시 공평하지 않다는 게 영지의 결론. 엄마는 영지가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영지는 제 장갑을 나눠줄 생각을 하니 그 기도 역시 공평하지 않다고 여긴다.  

고3 때 살았던 집은 아주 가파른 달동네에 있었는데 하루는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니 눈이 꽝꽝 얼어서 도저히 내려갈 엄두가 안 났다. 일찌감치 깨어서 집 앞 상태를 확인한 곳은 드문드문 연탄재라도 뿌려놓았지만, 대부분은 급강하 길이어서 고민을 하다가 썰매 타듯이 쭈그리고 앉은 채 장갑 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내려가리라 결심을 했다. 그런데 내 뒤로 내려오는 중학생 여자 아이는 장갑조차도 없었다. 교복 치마 입은 두 여학생은 넘어지면 더 곤란한 상황. 그래서 장갑 한 짝씩 나눠 끼고서 조심조심 그 언덕을 내려왔다. 마지막에 장갑을 돌려받기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장갑을 내줄 생각은 못했던 듯하다. 그 아이가 장갑이 없는 건지 그 날만 잊은 건지도 사실 모르겠고. 

어쨌든, 영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날 나 역시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일에 아주 작은 도움은 되어준 것일까?  

조카는 이제 글밥이 제법 있어도 개의치 않고 즐겁게 읽는 듯하다. 요는, 글의 양이 아니라 재미인 듯! 조카도 이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다 한다. 나 역시 유쾌함과 감동을 같이 받으며 즐겁게 독서를 마쳤다. 작가님의 다른 책도 좀 더 찾아볼 생각이다. 최근에 뭔가 나왔던 것도 같고...  

그리고, 이 책의 그림을 당당하신 변영미 작가님께도 감사의 한 표를 던진다. 글에 꼭 맞는 유쾌한 그림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이 감각이라니! 서로에게 환상의 호흡이 되어주신 듯하다. 감사의 배꼽 인사. 꾸벅~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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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9-1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쩡한 이유정' 제목은 친숙했는데 내용은 전혀 몰랐어요.
길치~ 그건 어떻게 극복이 안되나 봐요.ㅜㅜ

마노아 2009-09-14 14:40   좋아요 0 | URL
길치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집착을 버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ㅜ.ㅜ

세실 2009-09-1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치 2 여기있습니다. 네비가 나와서 정말 다행이어요~~~
요즘 이런 류의 책 참 많아요. 그만큼 세상이 각박하고, 어려운 아이들도 많다는 이야기겠죠.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크는 아이들이 갈수록 많아지니 원....

마노아 2009-09-14 14:41   좋아요 0 | URL
운전 못하는 저는 네비의 지언도 없어요.(>_<)
아이들 책이라고 각박한 세상 현실을 쉬쉬하지 않고 그 안에서 다독일 수 있는 내용을 보여주는 게 더 좋더라구요. 안타깝기는 해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