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이야기 3 - 8.15에서 6월민주항쟁까지
조성오 지음 / 돌베개 / 1993년 9월
평점 :
품절


중고책을 구입할 때 상태가 '최상'이 아닌 책들은 일단 한 번 더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무려 '중'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결제했었다. 그 무렵 국방부에 의해서 '금서'가 지정되었고, 거기에 당당히 끼어버린 이 책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판매자가 정직하게 표시한 것처럼, 책은 오래 되어서 누렇게 바랬고, 줄간격도 좁은 조금 피곤한 폰트의 편집을 자랑하였다(무려 볼펜 밑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하나도 방해가 되지 않던, 눈에 띄지도 않던, 올곧이 책의 내용만 파고들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굳이 이 책을 광고까지 시켜준 국방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훗!) 

1.2권도 같이 샀지만, 당장 내게 필요한 파트가 3권이었다. 그것도 딱 맞춰서 8.15 광복부터 6월 민주 항쟁까지. 뒷 이야기가 더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현대사 파트를 한 권 책에 담아냈다. 우리 역사, 정말 지난하구나......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목차를 보다 보면 독자로 하여금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제주 4.3 민중 항쟁부터 반민특위의 좌절, 한국 전쟁 이야기까지만 해도 숨이 가쁘다. 도대체 흘린 피가 얼마련가. 잠시 4.19로 반짝 숨을 틔우는가 했지만 곧 5.16 쿠데타가 나오고 이어서 제2의 을사조약이라 불렸던 '한일 협정' 이 떡하니 나온다. 70년대로 가면 조금 달라질까? 아니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부터 서두를 장식한다. 인간이기를 선언했던 노동자 전태일, 그의 죽음이 아직도 이어지고 재생되고 있는 대한민국이기에, 독자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하며 잠시 쉬어가야 한다. 이곳은, 대한민국이다.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이산가족들이, 실향민들이, 또 민족의 화합을 숙원하는 이들이 잠시나마 단꿈을 꾸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 없이 짓밟히니, 그 이름하여 '유신체제'다. 10.26으로 독재자가 사라졌지만, 이어 12.12사태로 더 무시무시한 인간이 등장했고, 그 인간과 그 배후의 정체는 광주 학살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빛고을에서 스러져 간 값진 목숨들은 또 얼마런가. 민주주의 성지로 다시 태어났지만, 그 아픔은 누가 달래줄까.  

7년을 버틴 건, 아니 7년 만이라도 독재를 끝낼 수 있었던 건 끝없는 항쟁과 투쟁 덕분이었다.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숨졌다. 고문과 체류탄의 포화 속에서 그랬고, 노동자의 한맺힌 설움 속에서도 생명이 사라져 갔다. 그렇게, 힘겹게, 어렵게, 민주주의를 향해 다가갔다. 그게 대한민국의 현대사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지금 우리가 놓여 있다.  

우리의 할아버지, 엄마, 삼촌, 누나들의 희생과 헌신과 투쟁 속에서 지금의 우리가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 고맙고 미안하고 감격스럽기까지 한데, 또 같은 이유로 한숨과 설움과 분노가 솟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게 쌓아온 민주주의 테두리가 너무나 쉽고도 어이 없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비단 2008년, 2009년 만의 일은 아니지만, 유독 금년에 더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게 '부재'를 깨닫는 순간에 더 커졌다는 것도.  

책은 철저히 자료를 바탕으로 팩트만을 전달한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저자의 울분에 찬 강경한 목소리가 울리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응당 이 아픈 역사를 마주할 때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의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찾아오는. 

국방부가 굳이 콕! 찝어서 금서로 지정한 까닭은 책을 몇장 넘기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너무도 불편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바로 그 정권을 쥔 사람들을 향해,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국가적 민족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에피소드들은 좀체로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보들을 알려준다. 이 정도까지 갔었던가, 이만큼이나 막 나갔던가... 싶어 놀랍다고 해야 할지, 차라리 경탄을 해줘야 할 지 몰라 아찔할 정도로.  

읽으면서 참고 문헌의 어떤 책들에 함께 눈길이 갔다. '잠들지 않는 남도', '다시 보는 한국 전쟁', '김형욱 회고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태일 평전' 등이다. 어떤 책들은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거나 혹은 소장 중임에도 미처 손길 닿지 않던 것들이기도 하다. 아울러, 저자의 '철학에세이'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먹는다.

인과 관계를 보여주는 자연스런 흐름(시간 순서로 소개되기 때문에 당연하기도 하다.)과 사소한 팩트나 에피소드에서마저 보여주는 진정성, 휘둘리지 않고 속지도 않는 비판 감각 등이 책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을 줄곧 보태주었다. 혹시 저자 분이 생각이 있다면 87년 이후의 한국사로 이 시리즈 4권을 기획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직전 40년 동안의 이야기가 그 이후 20여 년 동안의 이야기가 서로 맞장을 뜨고도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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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9-03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뜬금없이, 리뷰와는 완전 상관없이, 이 리뷰를 읽고나니 마노아님이 더 좋아져요. 막 울컥울컥하면서. ㅠㅠ

마노아 2009-09-03 13:39   좋아요 0 | URL
아아아앗, 저도 댓글과 상관 없이 다락방님이 더 좋아져요. 울먹울먹...!!!

후애(厚愛) 2009-09-0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보는 마노아님의 리뷰 너무너무 반가워요~~~
티브에서 일본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막 화를 내시던 할머니가 기억이 나요.
이유를 물으면 아직 어려서 이해를 못한다 하시면서 한숨을 쉬시면 돌아앉는 할머니였어요.

마노아 2009-09-03 13:40   좋아요 0 | URL
어제 12시 직전에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을 막 하다가 후애님이 떠올랐어요.
리뷰 쓰면 좋아하실 거야~ 이러면서요.^^ㅎㅎㅎ
한일회담 진행될 때 국민들이 느꼈을 분노가 그려져요. 할머니께서 얼마나 답답하고 서러우셨을까요. 어휴....ㅠㅠ

후애(厚愛) 2009-09-04 07:27   좋아요 0 | URL
저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감사해요!^^

마노아 2009-09-04 11:09   좋아요 0 | URL
헤헷, 더 분발할게요.^^

머큐리 2009-09-0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역사를 수정하려는 뉴라이트가 활개치는 세상이 가슴을 치게 합니다... 얼마나 더 싸워야 할 지...

마노아 2009-09-03 22:22   좋아요 0 | URL
지금 학교는 비교적 진보적 시선을 가진 교과서를 쓴다고는 하는데, 그 교과서도 자꾸 압력 받고 있고, 해야 할 말을 다 못하고 있는 게 보여요. 그런데 뉴라이트 교과서를 생각하면 어휴...ㅜ.ㅜ

순오기 2009-09-04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는 이주의 마이리뷰로 채택해야 돼요.^^

마노아 2009-09-04 17:22   좋아요 0 | URL
우헤헷,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