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숙종실록 - 공작정치, 궁중 암투, 그리고 환국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숙종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수렴청정도 없이 바로 정치의 무대에 들어선 소년 군주는 어림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의 손에 결국 대로 송시열이 유배를 갔고, 50년간 집권했던 서인이 야당으로 전락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에 신하들이 군주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뼈에 새겼을 것이다. 군약신강의 나라에서, 게다가 몸도 약했다던 그로서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왕권을 강화시키는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성공했고, 신하들은 군주를 어렵게 여겼고 자리에서 떨쳐나갈까 두려워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에 군강신약의 신화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그는 성공한 군주인가?
군주도 한 사람의 인간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된 자가 어디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자의 꿈과 포부가 그저 한 개인의 것과 다름 없어서야 쓰겠는가. 그토록 원했던 왕권강화를 이루어냈다고는 하지만 숙종을 성공한 군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의 꿈과 야망은 오로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힘들게 일궈낸 강력한 왕권으로 그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었던가. 양반도 세금을 물리자는 호패법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무려 집권 서인에게서 나왔음에도, 그는 주저주저하며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백성들이 과중한 군역으로 삶의 터전을 이탈하고 도적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살까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잦은 환국으로 정권을 손바닥 뒤집듯 권력을 이리저리 내돌려 왕권을 강화시켰지만, 그 와중에 무수히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과, 임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른 간언을 하지 못하는 신하들에게서 빼앗은 언론의 자유와, 정적을 제거할 슈퍼 기회를 줌으로써 붕당정치를 더 극단으로 몰아간 책임들은 어찌 감당할 것인가.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비극적인 대결은 훗날 경종의 설움과 영조의 자기모순, 그리고 사도세자의 참극으로까지 이어지니, 거기에 가장 큰 책임은 역시 숙종에게 있다고 하겠다. 차라리 태종처럼, 피바람을 불러 일으켜 뭇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더라도 후대 임금이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 것도 아니니, 대체 그의 치세 46년에 진정으로 일궈낸 업적은 무엇일까 허무하다.
뿐인가. 그가 왕으로 군림하는 동안엔 이빨에 힘 깨나 주는 인물들이 보통 많았던가. 가장 실망스러운 인물은 역시나 송시열이었다. 오로지 명분과 실리만 찾았던 그에게서 진짜 정의와 인정과 백성을 위한 헌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인물의 이름에 매달려 죽고 살았던 무수한 정치 찌질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윤휴 같은 인물을 제 손으로 내쳐버린 숙종은 진정 사람 보는 눈도 없었던 듯하다.
박시백 작가님도 지적했지만, 당시 조정에서 이름 좀 날렸던 대신들은 장수한 사람이 많았다. (김석주가 일찍 죽은 것은 혹시 고도 비만으로 인한 고혈압 때문???) 송시열의 경우도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아니었다면 더 오래오래 살았을 듯도 하다. (혹시 욕먹어서???) 암튼, 꽤나 긴장감 있는 공방 속에서 살았을 텐데도 하나같이 그렇게 장수했다는 것은 작가님의 궁금함처럼 나 역시도 궁금증이 인다. 이유가 뭘까? 선비의 꼿꼿한 생활 태도와 규칙적인 습관 덕분? 그렇다 해도 과하다 싶기도 하고.... 아마도 당시 노동에 종사하던 일반 백성들은 그렇게까지 장수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제목에서부터 강조하듯이 이 책이 '실록'인 까닭에, 희빈 장씨의 사사 장면 같은 자극적인 씬은 나오지 않는다. 실록에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탐나는 '씬'일 텐데도 그런 면에서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게 보기 좋았다.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허적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원인으로 지목된 기름친 장막 사건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고 본 대목이다. 역시 실록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허적의 처세를 생각할 때 작가님의 지적이 옳다고 보여진다. 다른 책들에서 만나지 못한 이런 날카로운 부분들이 이 시리즈에 대한 신뢰를 계속 높여주고 있다.
다만, 현종실록에서는 재기 넘치는 그림과 유머 코드가 뜻밖에 많았는데, 이번 편에서는 '뜻밖에도' 그런 부분에 인색했다. 부러 그런건지 어쩌다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숙종이 유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은 인정한다. (솔직히 불만스러운 게 많아서 찌질해 보인다. 처음의 그 카리스마는 다 어디로 가고, 흥!)
이 시리즈는 일년에 두 차례 나오는데 다음 책은 평소대로 간다면 내년 1월에 나올 것이다. 아마도 치세 기간이 짧았던 경종을 영종과 묶어서 나오지 않을까. 드디어 사도세자의 비극과 마주칠 차례다. 기대가 되면서 마음이 좀 아리다.
ps. 윤증 고택에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