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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연극 '완득이'를 관람했던 공연장은 무대 오른쪽에도 좌석이 있어서 90도 각도로 앉은 관객을 볼 수 있었다. 한 여성 관객의 옆 얼굴을 보았는데 '손담비'라 착각할 정도의 빛나는 외모였다.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한참을 연극 대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며 부러워 했다. 연예인이 예쁜 건 연예인이어서라고 납득하고 넘어가지만, 일반 대중이 그렇게 예쁘면 배가 아파지는 것이다. 뭘 먹고 저렇게 예쁠까? 하며... 어쩌다가 그 관객이 고개를 틀었고, 그 바람에 정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정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인공의 기운이 확 끼치면서 어색한 부조화가 깔렸던 것이다. 아, 얼굴에 손을 댔구나... 다시금 연극에 눈길을 돌리면서 나도 참... 했었다.
많은 소설과 만화와 드라마와 영화에선 멋진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거나 아니면 원수 집안이라는 등 서로의 사랑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등장하지만, 어쨌든 선남선녀였다. 설령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 비해 못 미치는 외모라는 '설정'은 갖고 있어도 실제로 별로 안 이쁜 주인공을 내세우는 경우를 본 일이 없다. 시청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통 대중의 속성이 '예쁜', 혹은 '아름다운' 그녀를 원하기 때문이다.(당연히 아름다운 '그'도 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아마도 잘 생긴 남자주인공과 지나치게 못 생긴 여주인공을 내세운 첫번째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그냥 못 생긴 게 아닌 '얼어붙을 만큼'의 못 생긴 여자 주인공 말이다.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도 말을 한다. 못 생긴 여자가 잘 생긴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그 여자가 돈이 많은 걸 거라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다 대서라도, 못 생긴 그녀가 연애를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 든다. 예쁜 그녀가 연애하는 건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으면서.
그러니, 이 소설 속의 잘 생긴 남자주인공이 어떻게 못 생긴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할 것이다. 그녀는 가난했다. 여상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되어질 외모였고, 정규직으로 입사한 백화점에서 점차 사람이 아닌 화물을 상대하는 직종으로 좌천되고 미끄러지던 입장이었다. 남달리 착하거나 인류 구원의 상징이 될 만큼 정의로운 인물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남자 주인공에게 상처가 있었다. 예쁘고 잘났던 무명의 배우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뜨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기생해왔던 튼튼하고 못생긴 엄마와 자기를 버리고 딴 살림을 차렸으니까. 적어도 그는 미모를 무기로 사람을 짓밟고 이용하고 또 홀리는 것에 대한 혐오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작품은 독특한 구조를 취한다. 스무 살의 그가 스무 살의 그녀와 해후하던 어느 겨울 밤의 카페에서 시작되고, 그 날의 이별 후 찾지 못한 그녀를 십 여년 세월 지나서 다시 찾아 헤매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 만났던 열 아홉의 그 때로 돌아가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수를 하면서 백화점에서 주차 안내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거기서 독특한 사내 요한을 만나고 또 그녀를 만났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을 그녀가 믿기까지는 꽤 오랜 진통이 필요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상처는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요한의 짧은 귓속말이 인상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몇 번이 확인이 필요할 만큼,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일을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그녀의 신산한 삶은, 다가온 사랑을 두고서 떠나는 행로를 취하게 만든다.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강풀 작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송이뿐 할머니가 생애 끄트머리에 찾아온 소중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는 마음에 견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끝인가? 그럴리가...
없다.
작가 특유의 줄바꾸기 신공을 따라해 보았다. 쉽게 읽혀서 빨리 빨리 넘어가게 하는 책장이 있는 반면, 박민규 작가의 문장은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며 입속의 울림을 되새김하게 만든다. 그 호흡을 놓치면 문장의 참맛을 읽기 어렵다. 그 호흡 그대로. 그 느낌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
작품의 엔딩은 놀라운 구조를 취하고 있다. 두 개의 결말은 세 개의 결말로도 읽히고, 그 이상의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뿐아니라 그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촉촉하게 눈도 젖고 마음도 젖게 해주는 작가의 고마운 선물.
작가는 외모 지상주의가, 물질 만능주의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모두의 불행을 가져오는 지를 소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그것들을 함께 지적해왔던 우리들이 사실은 제일 먼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것을 떨쳐낼 수 있는 힘도 절대 다수인 우리에게 있다는 진실도 함께.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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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 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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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는 CD가 한 장 들어 있다. 네 곡의 노래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을 위해서 만들어진 곡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듣고 있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벨라스케스의 그림도 다시 쳐다보게 된다. 왕녀 마르가리타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작고 예쁘지 않은 그녀에게 시선이 간다. 아마도, 앞으로도 쭈욱 그럴 것이다. 이 그림에서 파생된 라벨의 곡도 더 특별해질 것이다. 책의 구성과 느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음악의 제목이 이 소설의 제목에 꼭 맞는 까닭을 결말까지 다 읽고서야 이해했다. 아, 박민규 작가가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작가의 전작들도 사랑해 왔다. 그의 작품에선 자본주의의를 비판하는 서늘함을 촌철살인의 유머와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입장을 품어주는 따뜻한 속내를 보여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이젠 절절한 '사랑'을 얘기하면서 삶을, 세상을, 인간을 노래한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이제는 주저 없이 '박민규'라고 말하겠다. 여전히 김훈의 문장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박민규의 따스함을 더 사랑하노라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제 함께 꿈꾸어보련다. 자기만 있고, 자신만 알고, 자아는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끝끝내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4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