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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주실록 -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조선왕비실록을 무척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엔 조선공주실록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재위한 왕은 27명이며, 추존된 왕은 5명이다. 재위한 27명의 왕에게는 35명의 공주와 77명의 옹주가 있으며, 추존된 5명의 왕에게는 3명의 공주와 1명의 옹주가 있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공주 38명과 옹주 78명, 총 116명이다.
역사 속에서 무수하게 등장하고 사극에서 언급되는 그 숱한 남자들 사이사이에 이렇게 많은 공주와 옹주가 있었다. (공주는 왕비 소생의 딸이고, 옹주는 후궁 소생의 딸이다.) 물론 이 책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다루는 것은 아니다. 모두 일곱 명의 공주와 옹주를 책에서 언급했는데 책의 표지에 실린 간략한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정선공주(태종의 딸) : 부왕인 태종의 뜻에 따라 과부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부부관계가 단절돼 갖은 어려움을 겪는다.
경혜공주(문종의 딸) : 계유정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편과 친동생 단종을 잃고 노비로까지 전락한다.
정명공주(선조의 딸) : 왕실 저주사건에 연루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으나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서예로 승화시킨다.
효명옹주(인조의 딸) : 인조의 편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으나 저주혐의로 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귀양에 처해진다.
의순공주(효종의 딸) :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효종이 자신의 양녀로 삼아 공주에 봉작한다.
화완옹주(영조의 딸) : 어린 세손(정조)을 편집증적으로 아꼈으나 후일 정조의 최고 라이벌이 되어 사사건건 대립한다.
덕혜옹주(고종의 딸) : 열네 살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로 유학 갔다가 대마도 번주 종무지와 정략적으로 결혼한다.
이 책은 단순히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던 조선 왕의 딸들을 소개하는 것에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런 저작물이 드물었다는 데에서도 의미는 있지만, 그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닥친 운명들이 모두 조선의 역사와 맞물려 돌아간다는 배경이 더 중요하게 눈에 띈다. 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삶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이 굳이 자신의 딸을 과부의 아들과 혼인시킨 데에는 강력한 왕권 확립과 외척의 세력을 누르려는 임금의 평소 각오가 녹아있고, 문종의 딸로서 노비로까지 신분이 전락한 경혜공주의 팔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조의 계유정난도 같이 설명해야 한다.
정명공주가 유폐된 궁에서 울분을 서예로 승화시킨 배경에는 광해군의 콤플렉스와 위태로운 왕좌를 이해해야 할 것이고, 또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그 정명공주를 경계하고 의심했던 것 역시 같은 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효명옹주는 인조에게서 과한 애정을 받아 사람을 영 버려버린 케이스인데, 아들 잡아먹은 인조가 역시 딸까지 망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우대하고 추대하던 인목대비(나 그 측근 세력)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대목에서는 좀 고소하기도 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깊이 개입한 귀인 조씨가 바로 그 '저주'로 패가망신하는 대목도 의미심장했다. 이 부분 읽으면서 번뜩 든 생각인데 유교를 강조한 조선 왕실이지만, 샤머니즘적 믿음이 꽤 팽배했으니 여기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왕실의 행보를 읽는 데에도 좀 더 도움이 될 듯 하다. 소현세자가 죽기 전 침을 놓았던 이형익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확실히 그는 실력가였으며, 세자의 죽음이 그의 침술 때문이 아님은 더더욱 분명하게 읽혔다. 세자빈 강씨를 향한 인조의 저주는 몹시 일방적이고 황당스럽기 그지 없지만 죄많은 자의 업보로서 '저주'에 대한 발작정 증세는 이해가 갔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효종' 편에서 보면 의순공주의 미모가 형편 없어 퇴짜를 맞았다는 식으로 소개되었다. 저자는 그 부분을 더 파고들어 의순공주의 미모는 자못 고왔고, 도르곤 역시 마음에 들어했으나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서 부러 윽박질렀던 청나라의 태도를 같이 소개했다. 하나의 책에서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혹은 알아차리지 못한 정보들이 이렇게 다른 책과 자료를 통해서 보완되고 대체되는 것이 기분 좋았다.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읽어서 더 도움이 된 타이밍도 반갑다.
화완옹주의 이야기도 몹시 충격적이었다. 정조에게 정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정조가 어린 시절의 옹주는 그를 아들처럼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했던 애정 과잉 상태였다는 것이다. 옹주가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었던 당시 상황과 접목시켜 볼 때 설득력이 있었다.
또한 호학군주의 대표명사 정조가 사춘기 시절 방황도 하고 농땡이(..;;;)도 피웠던 시절이 잠시라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부던히 자신을 채찍질만 하고 살았다고 이해할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 화완옹주가 나중엔 양자 정후겸을 이용해서 정조와 무자비하게 대치했던 것을 생각하면 애정이 애증으로 변질되는 격한 순간이 쉽게 그려진다. 사랑과 미움이 꼭 동전의 양면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여기에 '정치'가 개입되면 당연히 더 복잡해지기는 하지만.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즐겁게, 인상깊게 보았는데 마지막에 와서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마무리를 보였다. 최후 주자는 '덕혜옹주'인데 옹주가 태어나기 전의 조선 왕실의 상황, 국권 상실 후 고종의 고독, 그리고 옹주가 태어났을 때 고종의 기쁨 등을 무척 상세히 소개해 놓았는데, 정작 옹주가 일본으로 유학간 뒤의 일은 거의 한 페이지로 일축한 뒤 책을 마무리 지었다.
옹주가 대마도 번주 종무지와 혼인한 뒤의 이야기,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 돌아와서 낙선재에서 살다가 죽은 이야기까지 할 얘기가 많을 듯한데 왜 갑작스럽게 멈춰버렸을까? 옹주의 남은 이야기를 못 들은 것도 아쉽지만, 책이 갑자기 뚝 끊기는 느낌을 주어서 책에 대한 여운을 망쳐버렸다.(그래서 별점 하나 감했다.)
혼사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정권의 변화에 따라 삶 자체가 흔들렸던 조선의 공주와 옹주들. 당시 시대를 움직이던 남자들 역시 그 정치적 입장과 무관할 수 없었지만, 이네들은 자신의 배우자와 관련해서 더 고초를 많이 받은 듯해서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인다. 하루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것이 더 버거웠던 민초들의 가여웠던 삶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들의 삶도 고단하고 때로 버거웠던 것이다. 누구나 삶의 크기는 다 크고 생은 무거우니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기록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실록 안에서 여성의 이름이 차지한 비중은 많지 않을 듯하지만 그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고 삐져나와 있는 그네들의 이름을 찾아내어 이렇게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책이 참으로 고맙다. 저자의 다음 관심사는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그 관심사에 나의 관심도 꽂혀가고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
공주든 옹주든, 모두 왕의 딸로서 왕실 식구였던 이들을 몇 명 나열했을 뿐인데 하나같이 인생이 다난하다. 어려서 부왕의 총애를 입고 행복했던 한 때를 보낸 이도 있으나 인생 말년까지 행복했던 이는 드물어 보인다. 공개하지 않은 100여 명 이상의 다른 공주와 옹주들은 혹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