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품절


직관사고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도 많고 그 기준도 매우 높으며, 완벽주의를 지향한다. 그런데 문제는 직관사고형이 이런 범상치 않은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거나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규장각 검서관인 박제가가 실명 위기에 처할 정도로 과로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검서관이나 승지들은 지나치게 많은 업무로 허덕이면서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었다. 직장상사가 퇴근하지 않는데 직원들이 먼저 일손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왕인 정조가 가장 많이 일을 했기 때문이다. 직관사고형은 좀 고지식하게 굴고 다른 이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히 자신이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주변 상황을 놓치기도 한다.
-98쪽

정조는 기득권세력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존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더라도 저 가난한 무리들은 절대 갚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신하에게 "구제하여 살리는데 뜻이 있으니 잃어버린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고 답하는 군주였다. 이는 요즘으로 치면 장관들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노동자에게 임금을 올려주면 자본가들이 힘들어져서 경제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자, 대통령이 ‘민중이 가난한데 자본가들만 살찌는 경제성장을 하면 무엇 하며, 민중에게 돌아간 돈은 결국 다 국가 안에 있는 것이니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조는 극소수 기득권세력의 왕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백성을 위한 왕이 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보수 세력에게는 ‘먼저 부자들에게 돈을 모아주어야 국가가 성장한다’는 성장제일주의, 친부자 정책을 집행할 대변자가 필요했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추진하려는 왕은 불구대천의 원수일 뿐이었다. 기득권세력은 정조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 발악하기 시작했다.
-111쪽

정조는 항상 사람들을 신뢰했고 누구에게나 반성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아버지의 원수들이, 나라를 망친 지배층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는 그런 날이 오기를. 하지만 그들은 세월이 흘러도 반성하기는커녕 여전히 정조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114쪽

정조는 의식적으로는 할아버지인 영조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일을 후회하면서도 할아버지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반성을 하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재론하면 반역죄로 다스리라는 유훈을 남겨 정조의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채워버렸다.
-115쪽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조는 어머니의 도덕성과 가치관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혜경궁은 친정집 피붙이는 무조건 감싸고돈 반면 누군가가 친정집의 무궁한 영광에 걸림돌이 된다 싶으면 그 사람은 극도로 증오했다. 예를 들면 혜경궁은 궁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돌던 홍국영이 사망한 것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제 명을 다하고 편히 죽었으니 하늘이 무심함을 어찌 한탄하지 않겠는가." 하고 평했다. 최소한 홍국영을 국문한 뒤에 사형을 내려 죽였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 말에는 가문의 적에 대한 인정사정없는 잔인성이 드러나 있다.
-118쪽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순화방에 있던 아버지의 사당을 궁중으로 옮겨 건립했고 그것을 ‘경모궁’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놓고는 경모궁이 바라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혜경궁 홍씨의 거처인 자경전을 지었다. 애써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혜경궁은 아들이 자신의 거처를 아버지의 사당 옆에 지은 의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당은 아주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싶은 남편 사도세자에 대한 기억을 계속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사당 옆에 어머니의 거처를 지으면서 정조는 어머니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평생 동안 아버지를 지켜보시고 두 번 다시는 아버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께 사죄하시고 반성하십시오.’
-124쪽

현륭원을 참배하고 온 뒤 두 모자는 마주앉았다. 정조는 현륭원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속 깊이 잠복해 있던 양심의 외침이고, 어머니에게도 반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표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화성행차를 통해 아들이 노린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깨달은 혜경궁은 아들의 눈을 보면서 몸서리쳤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에게 그랬듯이, 아들인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불행과 고통은 대를 이어가며 반복되고 있었다.
-128쪽

정조는 어머니에게 갑자년(1804)네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때부터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추숭사업을 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 사도세자께 자식으로서 하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혜경궁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아들의 말에는 ‘어머니도 사도세자께 아내로서 하지 못한 일을 하셔야 합니다’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10년 후에는 어머니를 화성으로 모셔와 혜경궁이 남은 여생 동안 아버지의 무덤을 돌보며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정조의 추진력으로 미루어 볼 때 더 빨리 올 수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구상을 다 밝힌 정조는 슬프게 울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제발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정조는 어머니가 홍씨 가문이라는 감옥 밖으로 뛰쳐나와 아버지와 화해하고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세 사람이 참다운 가족으로 다시 합쳐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
그러나 정조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현륭원을 참배하고 아들의 구상을 들은 어머니는 자신과 친정을 변호하기 위해 ‘한중록’을 집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8쪽

정조에게 반성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할아버지 영조에게서 받은 상처, 기득권세력에게서 받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특효약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일지라도 어머니의 반성은 정조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있던 ‘사람에 대한 신뢰’, 그것에 기초할 때만 가능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극적으로 강화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혜경궁이 정조의 가슴속 화기를 생산하는 주범은 아니더라도, 그 불길을 가라앉히기보다는 더욱 거세지도록 한 것 또한 확실하다.
기득권세력이 맹렬하게 반역을 도모하고, 어머니가 열심히 ‘한중록’을 쓰는 데 비례해 정조의 몸과 마음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132쪽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도세자와 정조가 일찍 죽은 반면, 심리적으로 병든 영조나 혜경궁이 장수했다. 만일 영조나 혜경궁이 권력을 쥔 사회집단에 속하지 않고 평범한 백셩 중 하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들이 긴긴 세월 동안 계속 나쁜 짓을 했다면 동네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을 것이다. 또한 권력과 재물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들의 병든 심리가 타인에게 그렇게 큰 해악을 끼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이들이 권력과 재력을 소유하게 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 주위에는 병든 인간들이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병든 마음과 행동을 더 부추겨댄다. 또한 그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병든 마음과 행동에 제동이 걸리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지배집단이 되는 것은 세상에 지극히 해롭다.
-135쪽

생애 초기에 부모에게서 건강한 양육을 받은 덕분에 건강한 심리를 갖게 된 정조는 전략가(INTJ)의 긍정적 특성을 극대화하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크나큰 고통을 아름답게 승화시킴으로써 힘차게 사회개혁을 추진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그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도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직면할 때에만 참된 삶이 가능함을 가슴 뜨겁게 증명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심리적 병의 원인을 제공하는 부모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 가족 문제는 그에게 참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였을 것이다. 그는 나쁜 아버지를 조금도 극복하지 못한 혜경궁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여러 가지 한계로 어머니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136쪽

화성행차 때 정조는 가난한 화성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전 인구 중 1/10이 혜택을 받았으니 결코 겉치레를 위한 형시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이때 정조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주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을 만들어 먹이라고 명했다. 네 곳에서 구호물자를 나눠주었는데, 그중 한 곳이 신풍루에는 정조가 직접 나가 행사를 주관했다.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백성들에게 쌀과 소금, 죽을 나누어주는 정경을 지켜보던 정조는 선전관에게 자신이 직접 죽이 어떤지 보겠다며 죽 한 그릇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혹시 백성들에게 함량 미달이거나 차가운 죽을 먹게 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죽을 시식해본 정조는 자리를 뜨며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경은 이곳에 남아 사민(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이 와서 기다리면 일일이 죽을 먹일 것이며, 혹시 뒤늦게 오는 자가 있더라도 냉죽을 먹이지 않도록 하라. 직접 챙겨서 소홀함이 없게 하라."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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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6-20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자들이 권력과 재력을 소유하면 병든 인간들이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부추긴다는 내용이 어쩜 이리도 지금의 세태를 말해주는것 같이 들리는건지...

마노아 2009-06-21 01:3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배우나 봅니다. 그런데 저들은 왜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