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화가 풀빛 그림 아이 21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모니카 페트 글,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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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청소부 다음엔 '생각을 모으는 사람'인가 보던데, 그 책은 조카네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바다로 간 화가'를 읽고 왔다. '행복한 청소부'보다 훨씬 더 재밌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읽었다.  

주인공 화가는 오랫동안 큰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의 큰 길들과 구석진 곳과 골목들을 그려냈다. 집과 뒷마당, 작은 가게들은 물론이요 햇빛에 바랜 차양과 먼지 낀 진열창 앞에 내놓은 과일과 채소들도 그렸다. 뿐인가. 양산 아래 식탁보가 나부끼는 거리의 카페들, 자동차, 버스, 전차, 역, 기차들에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까지. 공원의 상수리나무들과 둥그런 화단들, 새똥으로 얼룩진 충혼비(이런 단어는 너무 어렵다. 한자를 같이 써 주던가!)와 동물원도 그는 그려냈다.  

화가는 또 광고 벽화도 그리고 영화관과 오프레 극장, 심지어 감옥까지도 그렸다. 그가 그려낸 사람들, 동물들은 끝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을 다 그려낸 화가. 그는 늙어갔고 검은 수염도 잿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사람들이 바다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끝없이 넓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그곳을 너무도 그리고 싶었다. (이 대목에서는 제주의 바다를, 제주의 바람을, 제주의 모든 것을 너무도 사랑한 김영갑 씨가 떠오르고 말았다.)   


그렇지만 화가는 가난했다. 그가 버는 돈으로는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 바다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존심도 세서 그냥 주는 돈은 받지도 않는다. 

한동안은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바다가 꽉 차버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고 치료약은 오로지 바다를 직접 보는 것 뿐이었다. 결국, 화가는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감자와 빵만 먹었고 물만 마셨다.(술을 먹지 않았다는 얘기겠지?) 머리도 직접 자르고, 수염도 직접 다듬었다. 무조건 걸어다녔고, 자전거도 팔아버렸다. 갖고 있던 자잘한 가구와 그릇, 손목 시계까지 모두 팔았다. 한 마디로 돈이 되는 것은 다 팔았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림 도구는 팔지 않았겠지.) 

결국, 그는 바다로 갈 수 있는 돈을 모았다. 차표를 사서 바닷가에 도착했고, 배를 타고서 섬으로 들어갔다.  

그의 감격이 상상 되어지는가. 얼마나 벅찼을까.  

바닷물은 하늘까지 맞닿았고, 파도가 되어 밀려와 모래를 핥고는 다시 물러섰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 멜로디는 화가의 가슴에 다시금 파고들었다.  

화가는 값싼 집을 빌렸다. 집의 외형과 내부까지 형편없기 그지 없었으나 창문을 통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 세상에 화가와 바다와 새로운 멜로디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무한 행복의 극치를 맛보았다는 것! 

이제 그가 할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많은 것들을 그림에 담아냈다. 오래오래 소망하고 준비한 만큼 그 만족도와 충만감은 무엇에도 비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여전히 가난한 화가였다. 그가 아무리 검소하게 산다 할지라도 돈은 점점 줄어들었다. 마음이 따뜻한 이웃들은 화가의 그림을 사 주었다.(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나는구나!) 그 덕분에 몇 주 더 버틸 수 있었지만, 끝내 돈은 다 떨어졌고 그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그림 한 뭉치와 돌멩이 한 줌, 조개 한 자루, 모래 한 봉지를 가지고 섬을 떠났다. 그가 섬에서 갖고 온 것들은 섬을 기억하게 해줄, 바다를 생각나게 해줄 것들이었다. 소박하기 그지 없다.  

그는 도시에 돌아와서도 기억에 의지해서, 채 그리지 못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바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 가장 보고 싶은 모습을. 



완성된 그림은 이제껏 그린 그림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화가는 침대 가에 그림을 걸어놓고 날마다 감상했다. 사람들이 그림을 팔려고 해도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최고의 재산이며 기쁨이었으니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돈이 될 만한 물건도 더 이상 없고, 그는 너무 늙어버려서 멀리 여행을 갈 수도 없게 되었다.  

"도시로 돌아온 게 잘못이야. 하지만 난 슬퍼하지 않아. 바다를 보았고 또 그렸으니까." 

이 얼마나 멋진 탄식인가. 그는 더 늦기 전에 원하는 것을 향해 도전했고, 성취를 이루었다. 비록 욕망에 비례하진 못했지만 그는 자족할 줄도 알았다. 그의 마음도 어느덧 바다를 닮아 넓고 너그러워진 듯하다.  

날마다 그림을 바라보던 그는, 어느 날 문득 가장 좋아하는 그 그림속 집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림 가까이 다가가자 문은 더 열렸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방 안에는 이젤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의자가 있었다. 마치 어서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는 듯이. 



이제 화가는 날마다 오후가 되면 도시를 떠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모래 사장을 따라 산책을 했고, 정원 벤치에 앉아 꽃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는 그림 속에서 깊고 달콤한 잠을 이루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도시로 돌아왔다. 꿈같고 환상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제 도시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자신은 그림 자체가 되어 영원히 행복해지는 삶을 택한 것이다.  

행복한 청소부에 이어 바다로 간 화가까지.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나다. 그 사람은 자기만의 일이 있고, 그 일을 사랑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일에서 자족감을 느끼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읽으면서 느껴지는 정서는, 참 개인주의적이구나.... 싶은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가족 없이 혼자서 잘 사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 당연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정서의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기 전에 '외로운' 사람이라고 부를 것만 같다. 여자건 남자건 홀로 사는 사람을 절대 못 보아 넘기는 성미가 있지 않던가, 우리나라에는.  

책 속의 인물들은 외로울지는 몰라도 자유로워 보인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더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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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09-06-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보고 행복한 청소부 얼굴이 떨올랐는데 같은 사람이 그렸군요...^^
아무래도 예술가들은 조금 괴팍하다보니 그렇게 사는걸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마노아 2009-06-16 23:07   좋아요 0 | URL
예술가들이 가족과 함께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

순오기 2009-06-1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성주가 2학년때 이 책을 읽고 화가를 거의 똑같이 그렸었는데~ 보물창고에 있어요.^^

마노아 2009-06-17 01:53   좋아요 0 | URL
오, 정말 반드시 지켜야 할 보물창고라니까요. 언제 문 열어서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