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 - 아버지의 나라 엘 페이퍼 1
김진 지음 / 엘페이퍼 / 2008년 10월
절판


태자의 무례하고 빤한 시선이 술상과 그 너머로 잠든 영채를 훑고 지나갔다. 술상의 곁에는 밤새 촛대 아래까지 흘러 내린 촛농이 굵게 엉기어 굳어있다. 음식들은 상위에 단정치 못하게 흩어져 있고, 공기는 향이며 술내, 음식 내, 초 냄새가 같이 섞여 탁했다.
밤의 화려는 아침 앞에서 이렇게 추레하고 천해지는 것이다. -218쪽

유리가 찾던 아버지가 저기에 있다. 기둥 틈새에 칼을 꺾어 남기고간 사람.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들을 어머니 뱃속에 두고 그대로 가버린 사람. 어린 유리에게 한 번도 존재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부재된 존재로서 유리를 갈등하게 했던 그런 사람이다.

그의 뒤에는 고구려의 국색인 검은 휘장이 내려지고, 그 휘장 한가운데에는 금실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태양, 삼족오가 있었다. 그 새는 언젠가 언덕과 언덕을 넘어 유화부인의 장례에 날개를 폈던 새이다.

그 아래, 태양의 아들이고 물의 손자인 그가 앉아있다. 유리는 그런 그를 올려보면서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졌다.-230쪽

유리에게 그 녹슨 부분은 아버지와 아들의 세월이고, 태양신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과, 인간의 아들인 유리의 단절된 금이다. -231쪽

"그 용이 나의 용이다."

옥구가 다시 그를 올려보았다. 사람이 제 사람을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사람이 제 주인을 얻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옥구는 반듯하게 말했다.

"그 용이 바로, 제가 모실 분의 용입니다."-284쪽

허나,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는 왕이다. 왕을 범부취급을 하면 일이 생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말과 행동에 실수가 있다 해도 치명적인 경우가 많지 않지만, 왕이 되면 달라진다. 왕의 말에는 검이 달려 있다. 그의 생각에는 생사여탈권이 오간다. 웃는 얼굴 뒤에 다른 것이 들어 있고, 다정한 말 속에는 경고가 숨어 있다.
그게 왕이다. 물론, 모르고 들어오지는 않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심성이 없어지기가 매한가지로, 그녀들은 그것을 잊는다. -320쪽

마침내 소서노는 오간, 마려와 여덟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날 날짜를 잡았다. 주몽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정하게 떠나는 소서노를 안아주었다. 한때 아버지와 아들이었던 뻣뻣한 비류와 다감한 온조도.

"그대를 어하라(왕)라고 일컬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소서노는 여장부답게 그 인사를 받았다.

다물 19년. 두 아들과 함께 소서노가 떠났다. 왕으로서. 그녀를 따르는 길고 긴 행렬과 함께.
그리하여 한수유역에 여제의 나라, 그들의 나라 십제(후일의 백제)가 선다.

그날 유리는 자신이 버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유리는 태자인데, 그 태자를 거부하는 긴 행렬이 저기에 가는 것이다.

유리에게 깊은 상처를 두고.-371쪽

'아버지의 나라는 예 있는 것이 맞는데 유리의 나라는 어찌 되었더냐?"

'고구려는 누구의 나라냐?'

물어봐라.

'고구려는 주몽의 나라다.'

주몽이 꿈꾸는 것은 부도다.
선천과 후천이 맞물린 저 하늘 나무 위에 주몽의 부도가 있다. 약속의 땅.

'유리의 땅은 어디에 있는가?'

'유리가 가야 할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유리의 나라는 어디에 있나.'

아버지는 하늘의 길을 가고, 유리는 땅의 길을 걷는다.
아버지는 하늘 나무 위에 부도를 짓고, 유리는 여기 이 땅에 부도를 짓는다.

아니, 지으려 했으니 되지 않았다. -375쪽

아버지는 하늘 사람이라 백성이 알아서 따라왔는지 몰라도, 유리는 땅의 사람이라 그들을 얻어야 한다. 당신에게 쉬운 일이 유리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다. 당신의 어머니는 신인이라 겨드랑이를 열어 알을 꺼내 당신을 얻었지만, 유리는 사람이라 어머니의 태를 빌어 태어났다. 당신은 천손이라 다리를 놓아줄 어별(물고기와 거북이)이 있지만, 유리는 사람이라 하나하나 다리를 놓고 가야 한다.

그렇게

유리는 왕인데, 죽은 아버지가 여전히 왕으로 고구려를 다스린다. -3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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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9-06-12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만화책 맞죠? 예전에 봤을때는 잘 몰랐는데 대사가 왠만한 소설보다 낫네요. 좋군요.

마노아 2009-06-12 09:20   좋아요 0 | URL
원작이 만화책 맞구요. 이건 '소설'로 작가가 다시 쓴 거예요. 문장의 호흡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내공이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금년에 소설 2권이 나온대요. 저는 오늘 이 작품을 뮤지컬로 보러 간답니다.^^

무스탕 2009-06-1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소설로 나온것도 오늘 알았어요..;;;
근데요, 멋지네요. 만화 못지않게 멋지네요. 김진님은 만화가가 아니고 소설가를 하셨어도 성공하셨을거에요.

뮤지컬 보신다구요? 부럽습니다.. T_T
몇 번째 공연인데.. 도대체 전 언제나 볼수 있을까요.. 오늘 잘 보고 오세요~ ^^

마노아 2009-06-12 13:53   좋아요 0 | URL
이거 개정판이에요. 초판은 절판된지 한참인데 작년에 드라마 만든 것에 힘입어 개정판이 나왔답니다.
2편은 금년에 나온다고 해서 기대 중이에요.
워낙 카리스마 있는 작품을 쓰시지만, 문장의 힘이 압도적이었어요. 앞부분은 미처 밑줄긋기 항목을 체크를 못해서 무척 아쉬워하고 있답니다. 무휼이, 장난아니게 멋있었답니다. 어린 놈이 어찌나 왕답던지...^^;;;
유지컬 올해 세차례인데, 기회 잡기가 쉽지가 않지요. 공연 기간도 좀 늘긴 했는데 못 가셔서 제가 다 아쉬워요. 에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