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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15 - 돼지고기 열전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6년 12월
평점 :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해당되지만, 창작자들 역시 작품의 완주를 위해선 휴식이 필요하고 충전이 필요하다. 오랜 연재로 지쳤을 작가에겐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당당히 쉬겠다고 말하고 쉴 수 있는 파워는 물론 아무에게나 주어지진 않지만. 허영만 화백 정도의 위치라면 출판사나 신문사에서도 군소리 없이 다녀오십시오! 했을 듯하다.
에베레스트, 몽골, 일본, 그리고 뉴질랜드까지. 오오옷, 부러운 휴식 여행이다. 이런 휴식과 충전으로 더 멋진 식객이 그 후로도 줄곧 탄생하고 있는 것일 테지.
몽골 사람들은 원래 생선을 안 먹는데,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고기잡이 체험을 시키는 게 아닐까? 자기들로서는 있어봐야 그림의 떡이니까.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정도의 체력이라면, 평소에 자기 관리가 엄청 엄격했을 듯하다. '한국의 글쟁이들'을 읽으면서도 느꼈는데, 전업 작가들이 오히려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보다 더 시간 관리가 엄정하다. 그런 자기 절제가 있기 때문에 프로 글쟁이로서, 또 그림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일 테지?
고사지낼 때 쓰는 돼지 머리의 눈이 웃고 있는 까닭을 설명해 주는 장면이다. 돼지도 죽을 때는 고통에 겨워하지만, 저렇게 나뭇조각을 입에 걸어놓아서 입이 자연스레 벌어지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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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는 모두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소원이 달성되고 계획하는 일이 잘되라고 신에게 소원을 비는 의식이다.
돼지머리가 고사에 쓰이게 된 배경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개업식에 쓰이는 이유는 우리말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1. 윷놀이에서 '도'는 돼지를 상징하는 동시에 '시작'을 의미한다. 시작이 반이므로 돼지머리를 차려놓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 돼지는 '도야지'라고도 하는데, '도야지'는 잘되기를 바라는 뜻의 '되야지'와 발음이 비슷하다. 그리고 '돼지'라는 말 역시 잘된다는 뜻의 '되지'와 발음이 유사하다.
3. 돼지의 한자말 '돈'은 우리말 '돈'과 발음이 같다. 다산성인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듯 많은 돈을 벌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돼지 주둥이에 돈을 물린다. –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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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돼지고기 열전'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돼지를 도축하는 사람을 소재로 한 '두당', 원조 족발집 이야기 '족발', 그리고 순대에 올인한 여고생의 '순대일기', 고사 이야기가 나온 '돼지머리', 부산에서만 제 맛이 나는 '돼지국밥'이 이야기밥이다.
도축장면은 좀처럼 견학하기가 힘이 들다고 하는데, 작가는 놀라운 기회를 잡아서 제대로 취재를 하고 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에피소드는 작품 속 포인트 잡지사 맛 칼럼을 쓰는 '진수'를 통해서 재현되었다. 차장수를 하면서 반찬과 식재료를 취급하는 성찬과, 음식 취재를 하는 진수는 이름만큼이나 천생연분이다.
두번째 에피소드 족발에서 그렇다면 육수를 훔쳐간 사람은 큰 아들이었다는 얘길까? 엔딩 부분이 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순대일기가 맛깔스러웠다. 여고생에 순대를 너무 사랑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순대 공부를 하다니, 너무도 파격적이고 신선한 설정이 아닌가!
"만지면 넌 순대다!"
어마어마한 협박이 아닌가.ㅎㅎㅎ
작품 속 엄마는 고2 학생이 순대만 쫓아다닌다고 걱정에 근심이지만, 저렇게 이미 똑부러진 딸이라면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떡잎부터 보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돼지 머리 에피소드는 무척 가슴 아프게 읽었다. 번번이 사업 실패하는 큰아들을 건사하느라, 잘 나가는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을 닥달하고 금식을 무기로 삼는 엄마의 횡포라니. 상황의 차이는 있지만,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속이 쓰라렸다. 작품 속 동생은 사장님이기라도 하지...ㅜ.ㅜ
가장 짠했던 에피소드는 '돼지국밥'이다. 사업의 실패로 자살까지 결심을 했던 사내가, 어머니의 쪽지 한 장으로 생으로 발길을 돌려버린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최근 우리에게 던져준 충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후 사정 캐묻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아들을 지켜봐주고 돌봐주고 또 살게끔 하는 모정이 뜨거웠다.
알았으면 대답해보라고 다독이는 엄마에게 이미 같이 늙어가는 아들이 울먹이며 '응'이라고 대답한다. 울컥... 살아있는 정이 스며드는 순간이다.
대사가 사투리로 표현되면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현장감이 살아나고,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가 증가한다.
작가는 전국구로 움직이며 도처에 취재진을 끼고 있다. 그의 지인들이, 친구들이, 또 팬들이 그의 소식통을 자처하는 까닭이다. 그 마당발로 지금껏 일구어낸 작업과 성취의 결과물일 테지. 차곡차곡 쌓아온 작가의 내공과 땀과 도전의식은 이제 작가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독자가 함께 가져갈 수 있는 기쁨이 되었다. 우리 모두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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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머리를 제물로 바치는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나 그 정점에는 돼지가 하늘과 교감하는 신통력을 보유한 동물로 자리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의 신통력도 이에 못지 않으나 유독 돼지가 널리 애용되었던 이유는 경제적인 면이나 실용적인 면에서 소에 비하면 돼지의 비중이 덜 하였기 때문이라는 실질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소가 자비를 기원하며 하늘에 바치는 제왕의 제물이었다면 돼지는 보다 나은 미래를 희망하며 하늘에 기대었던 백성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돼지머리의 값어치는 그 미소로 결정된다고 한다. 제왕의 제물은 근엄하나 볼품없는 백성의 제물은 궁색하여 웃음이라도 만드는 묘책을 마련한 것은 아닐까? 이래서 돼지머리의 미소는 절박하지만 해학적이다. –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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