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파파야 향기 - The Scent of Green Papay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일전에 영화 '씨클로'를 보았는데, 그 트란 안 홍 감독의 데뷔작이다. 93년 칸느 그랑프리 작이다. 

1951년이 이야기의 첫 시작 부분이어서 뭔가 전쟁에 관련된, 베트남 민중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갈망했지만, 간혹 드러나긴 해도 구체적인 이야기는 전혀 해주지 않는다. 일단, 대사가 거의 없다.  

열살의 어린 소녀 무이는 주인집 댁에 하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먼 길을 걸어서 도착한 아이였다. 주인 댁은 과거에 잘 살았을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겉모양새만 그럴싸 하고 사실은 속 빈 강정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주인은 툭하면 재산을 챙겨서 집을 뛰쳐나갔고, 수년 전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어린 딸이 죽어버려서 자신의 죄라 생각하고 다소 조용히(?) 지내고 있는 터였다. 현금이 없는 집에서는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옷가지를 팔고 보석을 팔고, 그렇게 며칠씩 식량을 겨우겨우 마련한다. 때로 반찬이 부족하면 부러 짜게 요리를 해서 밥을 많이 먹게 하는 편법을 이용하기도. 

노마님은 주인 어른을 낳자마자 남편을 잃었고, 손녀까지 잃은 뒤로는 7년 동안 2층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제단에다가 아이의 명복만을 빌고 있다. 그리고 그 노마님을 평생 동안 순애보로 따라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영화는 이렇게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앞에 내세우며 대사 없이 음악으로, 그리고 클로즈업 기법으로 자연과 미쟝센을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력을 자랑한다. 실제 촬영장은 베트남이 아니라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올 세트로 찍었다고 한다. 어쩐지 좀 속은 기분이 든다.  

마님에게는 아들이 셋 있는데, 막내 아들은 툭하면 장난을 치면서 무이를 못살게 굴곤 했다. 뭔가 이 녀석과 자라서 썸씽이 생기나 했는데, 그 녀석은 그냥 철부지였을 뿐이었다.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또 영화 제목처럼 '그린 파파야' 열매를 깎아서 요리하는 장면이 자주 묘사된다. 열매를 쪼개면 하얀 알갱이들이 나오는데 찬모는 버리라고 하지만 무이는 그 알갱이에 유독 시선을 주곤 한다.  

주인은 또 다시 제 버릇이 도져서 한줌 밖에 안 남은 재산을 들고 집을 뛰쳐나가려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그 병간호 때문에 집은 더더욱 가세가 기운다. 

그리고 영화는 1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무이는 이제 20살 처녀가 되어 있고, 감독의 와이프인 트란 누 엔 케가 나온다.  

큰 아들은 장가를 가서 며느리를 보았는데, 그 며느리는 이제는 노마님이 된 어머니가 무이를 예뻐하는 걸 싫어한다. 집안 형편도 있고 해서 무이는 큰 아들의 친구인 작곡가 쿠엔의 집으로 보낸다. 헤어지면서 노마님은 무이를 딸처럼 여겼다고 고백하며 딸 아이를 위해서 준비했던 붉은 아오자이와 목걸이, 그리고 샌들을 한 켤레 내준다.  

쿠엔은 늘 말없이 피아노를 치는 인사였고, 약혼녀는 시끄럽게 쿠엔의 주의를 끄는 여자였다. 무이는 이곳에서도 표나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성실하게 쿠엔의 집안 일을 살폈고, 정성으로 식사를 준비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장면도 없건만,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그 마음을 소소하게 표현하는 장치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약혼녀는 한바탕 난리부르스를 치고 알아서 떠나준다.ㅎㅎㅎ 

덕분에 두 사람은 행복하게 맺어진다는 이야기~ 쿠엔은 무이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데,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예쁘게 두 사람의 수업이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마도 쿠엔의 아이를 임신한 듯, 배가 불러온 무이가 책을 읽는 장면에서 끝난다.  

뭐랄까. 영화는 상당히, 지루하다. 예쁘긴 하다만 너무 고요해서 나같은 사람으나 졸기 쉽다.(사실 졸았다ㅠ.ㅠ) 

허울만 좋은 뼈대 있는 집안과 남존 여비 사상, 사고치는 남편과, 질투하는 여인네 등. 보편적으로 읽혀지는 사회상은 보여주지만, 그것을 넘어 '베트남'스러운 무언가를 얻기는 힘들다. 오히려 전작과 확실하게 선을 그는 '씨클로'는 지극히 비참한 베트남의 실상을 보여주어서 그 대조감으로 낯설다고 할까. 

감독은 그 후 다른 작품 소식은 없었는지 조용했던가 보다. 그런데 금년에 이병헌이 이 감독의 작품을 찍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직 개봉 전인 듯 싶다. 기무라 타쿠야 얘기도 있던데 합작 영화인 듯?  

앞의 두 영화는 와이프를 여주인공으로 세웠지만, 설마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 또 다시 여주인공이 그녀인 것은 아니겠지? 뭐, 우리 병헌 씨도 나이가 좀 있지만. ^^ 

영화의 앞 부분에 나왔던 소녀가 참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호기심 많고 착하고 성실한 인상이다. 



지난 달에 베트남에 너무 가보고 싶어서 몸살이 났는데, 계획이 틀어져버려서 결국 못 갔다. 베트남을 떠올리면 풀내음이 확 끼치는 쌀국수가 먼저 생각나는데, 이젠 '그린 파파야'도 같이 떠오르게 될까? 5월 지나면 우기인데, 결국 이번 달도 힘들겠다. 언제고 갈 수 있겠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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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5-05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가 지루하거나 너무 고요하면 꾸벅꾸벅 졸아요..ㅋㅋㅋ
금년 안으로 베트남 꼭 가실거에요! 그러니 힘 내세요~ 화이팅!!^^

마노아 2009-05-05 11:31   좋아요 0 | URL
히힛, 저만 그런 게 아니지요?
금년 안에 간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요. 호호홋 ^^

다락방 2009-05-05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저도 지루한감이 없지 않았어요. 대사가 거의 없어놔서. 그렇지만 기가 막히게 가슴에 남는 장면들도 더러 있었지요.

여자가 남자의 벗어놓은 신발을 신는 장면이요. 그 훌쩍 큰 신발을. 그장면은 특히 좋지 않던가요?
그리고 서로의 감정을 우리는 알지만 그 둘은 서로 모르던 그때, 여자가 서랍에서 자신을 그린 그림을 발견하잖아요. 으윽.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 글을 알려주고 말이죠. 그런 장면 장면들이 참 좋아서 그 당시에 보고 한참후에 비디오 테입을 샀었어요.

다시 그 장면들이 생각나네요.

마노아 2009-05-05 12:02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장면들 좋았어요. 평생을 맨발로 살던 여자가 단 한켤레 있던 신발을 그 남자를 위해서 신은 것도 예뻤고, 특히 글 가르쳐주던 부분도 로맨틱했답니다. 음악도 좋았어요. 여기도 드뷔시의 달빛이 나오던데, 어휴 또 에드워드 생각을 해야 했다니까요.^^ㅎㅎㅎ

2009-05-05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5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