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수상으로 떠들썩했던 이 작품을, 영화 개봉 전에 먼저 만나고 싶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첫 부분은 주인공 소년이 주인공 그녀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기까지의 내용을 다룬다. 열다섯이었던 미하엘, 서른 여섯이었던 한나. 간염으로 몸이 아팠던 그를 그녀가 도와주면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육체 관계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샤워를 하고 사랑을 나누고 나란히 누워 있는 순서로 일종의 의식을 치렀다. 나이 차가 많았지만 그에게 그녀는 첫 사랑이었고 넘어설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어떤 미지의 경계 같은 분위기도 갖게 하였다.  

몇몇 에피소드에서 그녀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배경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꼬마라고 부르는 주인공 소년이 학교에 소홀히 하자 무섭게 화를 내던 그녀에게서 문맹으로 인해 그녀가 가졌을 수치심과 삶의 굴곡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의 인생을, 또 그의 인생을 온통 뒤흔드는 계기가 되고 만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한나.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흘렀고, 미하엘은 법학도가 되어 있다. 세미나 수업으로 일주일에 한 번 법정에 출석해서 재판을 참관하게 된 그는 피고인으로 출두한 한나와 재회하게 된다. 그녀는 나치 시절 유대인 여자들을 감시하던 감시관이었다. 다른 감시관들과 함께 재판을 받던 그녀는 자신에게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보고서도 그녀가 썼다는 허위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만다. 필적 감정이라도 받아서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다른 여자들이 금고형으로 끝났을 때 그녀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니까.  

급박했던 2부가 끝나고 감동과 긴장의 3부가 이어진다. 재판 이후 미하엘은 혼돈의 시간을 겪는다. 결혼을 하고 딸도 갖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한나의 뒤를 쫓고 있었고, 온전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혼을 하고 불면의 시간을 겪던 그는, 그 옛날 그랬듯이 한나를 위한 책 읽어주는 남자로 돌아간다. 한나가 수감 생활을 시작한 지 8년 째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나가 사면되는 때까지 꼬박 10년 간, 그는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오로지 문학 작품을 읽었을 뿐,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도 않았고, 안부를 묻지도 않았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 사이 한나는 감옥에서 글을 익혔고, 미하엘에게 짧고 서툰 편지로 인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8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된 한나. 달라진 세상과의 조우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고, 교도소장은 미하엘에게 그 일을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미하엘은 한나가 살 집과 그녀가 일할 직장을 알아보고, 이것저것 분주히 움직인다. 사실 공부도 많이 했다.  

나는 그동안 문맹자와 관련된 글들을 구할 수 있는 한 다 구해서 읽었다. 나는 그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겪는, 즉 길이나 주소를 찾을 때 또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고를 때 겪는 당혹스러움에 대해서, 미리 주어진 생활의 틀과 낯익은 행로를 더듬더듬 따라가면서 여기서 벗어나면 어쩌나 하며 느끼는 불안감에 대해서, 글씨를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소모하는 정력에 대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실제 삶에 있어서의 에너지 상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렸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미하엘은 여전히, 한 발자국 뒤에서 한나를 관망만 할 뿐, 적극적인 개입과 지지, 손내미는 일에 주저했다. 그는 여전히 미성숙했고, 서툴렀으며, 용기가 부족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그녀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내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먼저 배신한 것은 그 자신임을 알지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또 그렇게 행동했다. 그것들이 그녀에게 어떤 상처와 실망을 안겨주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명백히 따지고 들자면, 그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녀의 책임이 아니듯이. 마치, 원해서 전범 국가에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원해서 전후 세대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그러나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죄'가 없어도 '책임'은 있다는 것. 글을 읽지 못해서 평범한 직장에서의 승진 대신 나치의 감시자 일을 시작한 한나였다. 동기 자체로서는 그저 운이 나빴다고 할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 갇힌 수감자들이 불에 타 죽도록 방치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원했던 것이 아니고, 달리 무얼 어찌 해야 할지 몰랐었다 할지라도. 비록 그녀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고 도망친 다른 비겁한 사람들에 비해서 그녀가 감내한 형벌은 숭고해 보였지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인생길을 그리 가버린 그녀가 안타깝고 분노도 느끼게 된다. 그 자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서만 정직했지만, 너무도 많은 아픔을 주변에 남기고 말았으니.  

작품의 말미에선 여러 차례 울컥거리게 만든다. 갈팡질팡했던 그와 달리 올곧이 미하엘을 사랑했던 한나. 비록 그의 곁에 머물지 못했고 도망쳐버렸지만, 마음은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었다. 반면 미하엘은 늘 머리 속에서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나를 끝내 잡지 못하고 변두리만 기웃거리다가 결국엔 놓쳐버리고 만다. 어리석고 안타까운 사람.  

작품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우리의 아픈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들을 아울러 한 작품에 담아낸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였다. 빌리 엘리어트를 몹시 재밌게 보았는데, 이 작품의 영화 역시 무척 기대가 되고 있다. 더군다나 케이트 윈슬렛이니! 책만 보면은 아카데미 작품상도 거뜬했을 것 같은데 밀려버렸으니, '슬럼 독 밀리어네어'도 궁금하고, 여전히 이 책의 영화도 궁금하다. 좋은 원작이 좋은 2차, 3차 작품도 생산해낼 것이다. 독자는, 관객은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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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3-1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군요~ 궁금했었는데! 쌩유~~
영화 개봉하면 꼭꼭 봐야겠어요~ ^^

마노아 2009-03-15 13:37   좋아요 0 | URL
오늘 밥 먹는데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잠깐 나오더라구요. 아, 관록의 케이트예요! 개봉 날짜 확인해야겠어요.^^

zenama 2009-03-15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마음에 와닿네요.^^

마노아 2009-03-15 20:56   좋아요 0 | URL
헤헷, 그런가요? ^^

다락방 2009-03-1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마노아님.
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요 그녀가 문맹이란 사실은 스포일러에요, 정말. ㅜㅡ 그 비밀이 무엇일까, 그걸 알게되면 나는 얼마나 먹먹할까 싶어서 읽으려고 구매했다가 한 리뷰에서 그녀가 문맹이란 사실을 알았어요.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정말 몰랐다면, 했더랬어요. 그랬다면 이 책을 좀 더 잘 읽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마노아 2009-03-15 21:00   좋아요 0 | URL
저는 엄청난 비밀이 있다고 해서 그게 무얼까 궁금했는데 문맹이란 단서가 너무 금방 나와서 좀 시시했어요. 그렇지만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비밀보다는 그 후의 관계가 더 중요한 것 같아서 리뷰에서 밝혔는데, 그래도 모르고 읽을 때가 더 참맛이겠지요? 흐, 리뷰를 수정할까 했더니 전반적으로 그 얘기가 계속 나와서 손을 못 대겠어요..;;;;

마노아 2009-03-16 12:05   좋아요 0 | URL
'책 읽어주는 여자'가 익숙해서인지, 저는 책 읽을 때 무심코 제목을 '여자'로 읽었었답니다.ㅎㅎㅎ

다락방 2009-03-16 17:52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저는 이 책의 제목에서 전혀 문맹의 암시를 느끼지 못했는데요. 다른분들은 이미 다 짐작하는 부분이었던거군요!

아키타이프 2009-03-16 20:28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소견일뿐인지도 몰라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저희 할머니께서도 문맹이셨는데 가끔 저보고 책을 읽어달라고 그러셨거든요. 그러면 할머니께서 그러셨어요. 너무 듣기 좋은 소리라고...어쩌면 다른 분들은 예상 못하실 수도 있지 싶네요. 그래서인지 저는 책을 읽어준다고 하면 상대가 문맹이거나 눈에 이상이 있는건가 싶거든요. 그리고 아직 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에게 글을 읽어주는 엄마의 모습 같은거... 그런걸 유독 좋아하는지라...

아키타이프 2009-03-16 20:2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말씀따나 문맹이라는 비밀을 모르고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수 있지만 책 제목에서 부터 그녀가 문맹임을 암시하고 있달까요. 그리고 책이든 영화든 보다보면 금새 한나가 문맹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꼬마(남주)만이 모르고 지나치지 관객이나 독자들은 눈치 깐답니다.

아키타이프 2009-03-16 20:46   좋아요 0 | URL
제가 멍청한 짓 해버려서 댓글 순서가 뒤죽박죽이 돼 버렸네요ㅠㅠ.

마노아 2009-03-17 00:21   좋아요 0 | URL
저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떠올렸어요. 그 작품에서 엄마가 글을 못 읽었거든요. 평생 글 못 배운 게 한이 되셔서, 한나가 학교 공부에 소홀히 하자 불같이 화내는 장면에서 딱 오버랩 되더라구요.

아키타이프 2009-03-1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보다 영화 먼저 접했는데 (카드 시사회) 영화를 본후 진짜 가슴이 덜덜덜 거렸더랬죠. 그후 원작이 있는걸 알고 책을 사서 읽어 보니 영화 각색 작업을 참 뛰어나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에게는 영화가 훨씬 좋았습니다. 영화 보기전 책을 봤더라면 어떨련지 모르겠지만 세 배우의 연기와(특히 케이트 윈슬레 킹왕짱) 연출이 정말 끝내줘요.알고보니 빌리엘리어트와 디아더스 감독이더군요. 제가 모두 너무 좋아하는 영화인데...이걸로 세번째 영화 마저 홀릭하게 됐네요. 제가 젤 인상 깊었던 구절은 [범죄자를 사랑하므로 나는 유죄이다] ... 영화도 꼭 보세요. 저는 워낭이나 벤자민 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다만 책을 읽은후 곱씹으니 미하엘 집에서의 장면이 없어서 좀 아쉽네요. 슬럼독은 초반에는 좀 지루하더니 갈수록 유쾌해지더군요.

마노아 2009-03-16 12:03   좋아요 0 | URL
아후, 영화가 담주 목요일 개봉이에요. 좀 남았네요. 무척 궁금해하고 있어요. 원작보다 더 좋았다고 하니 기대치가 더 높아집니다. 디 아더스, 빌리 엘리어트. 모두 참 좋았어요. 오늘 아침에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대목을 보았는데 다시금 감동 물씬~
슬럼독도 이미 보셨군요! 3월부터 이렇게 볼 게 많다니 좋아요, 좋아~ ^^

아키타이프 2009-03-1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책 읽어주는 여자 버전은 어떠신가요. 뉴질랜드 영화였나? 블라인드라고 있는데 여기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책을 읽어주죠. 캐백수에서 방영해준 외화인데 어른들을 위한 동화적 감성이 지천에다 영상미도 참 유려했어요. 그리고 보니 여기도 나이차 많이 나는 연상연하이네요. 보고 싶은데 구할길이 애매하다 싶으시면 메일 주소 주시면 제가 힘 닿는대로ㅋㅋ

마노아 2009-03-16 12:04   좋아요 0 | URL
'책 읽어주는 여자'로 검색하니 프랑스 영화가 나오는 거예요. 얼라, 이게 아닌가? 하고 다시 블라인드로 검색하니 엄한 갱 영화가 나오는 겁니다. 다시 해보니 네덜란드 영화가 나오네요. 아마 이건가봐요. 앞 못 보는 남자 아이에게 못 생긴 여자가 책 읽어준다는 설정. 호홋, 제가 찾아볼게요. 추천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9-03-18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기대하고 있어요. 어서어서~~ ^^

마노아 2009-03-18 11:58   좋아요 0 | URL
일주일 조금 더 남았네요. 아자아자!! 어서 개봉하라!!!

2009-04-09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9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