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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천재 수학자이지만 그 재능을 연구에 모두 쏟을 수 없었던 불운의 사나이. 삶에 대한 집착과 정열, 보람, 의지가 사그라든 어느 날, 그는 목을 맬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혹시라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기꺼이 문을 열었던 사나이. 사내가 원했던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유지시킬 갈망이었고, 그를 죽도록 괴롭힌 것은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삶에 끼어든 한 여인. 바로 옆방에 이사왔다고 인사를 온 중년의 여인과 그녀의 딸. 천재 수학자에게 한줄기 세상의 빛이 스며들던 순간이었다. 자신의 보잘 것 없던 외모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워지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마음을 보여주지도, 다가가지도 못하며 그저 그녀가 일하는 도시락 가게에 들러 날마다 '오늘의 도시락'을 사며 한 번씩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그에게, 어느 날 이변이 생겨버린다. 정확히는 그녀에게 생겨버린다.
옆방에 이사온 야스코는 전직 호스티스였을 만큼 미모가 있었던 중년의 여성이다. 이혼한 전 남편은 한때 자신에게 잘해주기도 했고 자기의 딸이 아닌 야스코가 데려온 딸 미사토를 잘 돌보기도 했지만, 횡령비리가 발각되면서 직장에서 짤리고 그때부터 폐인의 길에 들어선다. 단골 손님 구도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기용해 겨우 이혼을 한 야스코는 전 남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다시 손아귀에 잡히고, 그 과정에서 딸과 함께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있었던 이 사건을 천재 수학자이자 현직 수학 교사인 이시가미가 알아차린다. 그는 말했다. 자수할 생각이라면 자신은 모른 척 하겠다고. 만약 사건을 덮고 싶다면 자신이 돕겠다고. 여자 둘이서 시체를 처리하긴 힘들 거라고.
야스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딸의 앞날이 걸려 있었다. 결국, 이 남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만다. 그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었고, 앞으로의 진행 과정에서 경찰의 수사망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모든 보호장치를 제공했다. '천재'라는 말을 자꾸 썼던 것은 그에게 이런 일들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역시 소설답게 또 다른 변수가 생긴다. 천재가 또! 있었던 것이다.
사건을 맡은 형사 구사나기의 친구인 대학 조교수 유가와. 사실 이시가미까지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대학 동기이다. 그리고 이시가미와 유가와는 오래 전에 친구였고, 지금은 너무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살인 사건이 두 천재를 20년 만에 재회하게 만든다.
자신의 '논리적 사고'를 총동원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낸 이시가미에게 뜻밖의 복병이 되어버린 유가와. 결국 이시가미는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 쓰려고까지 하는데, 여기까지가 독자가 계산해낼 수 있는 용의자 X의 '헌신'이었다. 이 책에 대한 구구절절한 칭찬을 너무도 많이 들었던 터라 잔뜩 기대하고 긴장하며 읽었던 나로서는 책의 2/3 지점까지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짐작이 되는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결정적인 반전이 이뤄진다. 이 책의 제목에 왜 '헌신'이란 단어가 들어가는지. 이시가미가 내색하지 않았던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뒤늦게 깨달으며 독자는 하염없이 책 속에 빠져든다. 오, 맙소사! 이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이 책이 추리소설인 까닭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고, 다만 놀랐던 내 감정만 옮겨본다. 어릴 때 추리소설을 읽고 나면 여러 날 잠을 못 잘 만큼 겁이 많았던 나는, 성장해서는 가급적 추리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마 고등학교 졸업 이후 십 여 년 동안엔 추리소설은 거의 안 읽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작년에 '화차'를 읽고는 크게 감탄했었다. 섬찟하다는 후유증이 있긴 했지만 작가와 작품의 마력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이 책도, 그 비슷한 수순을 밟으리라 여겨진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워낙 다작을 하는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 사진으로는 엄청 젊어 보였는데 말이다.
긴장감과 감동, 그리고 충격을 함께 전달하는 이 책은 영화로서도 몹시 매력적일 것 같았다.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작년 10월에 일본에선 개봉을 했다. 국내엔 나오지 않은 듯.
게다가 이 작품에선 조연으로 등장한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탐정 갈릴레오'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제목을 익히 들은 기억이 난다. 원작에 대한 평가가 생각보다 좋지 않아서 나의 다음 히가시노 게이고와의 만남으로는 적당치 않아 보이지만.(백야행이 평이 좋던데 무려 세권이다. 긴 책에 주춤하는 나는 잠시 고민을...;;;;)
'사랑'을 생각해 본다. 무수히 많은 사람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종류의 '사랑'이 존재한다. 이 작품 속 이시가미가 보여준 그런 헌신적인 사랑도 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 과정이 옳았다고 할 수 없고, 그 결과가 현명했다고도 할 수 없고, 행복하다고도 할 수 없는데, 대가 없이 순수하게 사랑 하나만 온 마음과 몸을 바쳐 해냈다는 것에는 경외감을 느낀다. 그런 사랑을 살면서 받아보는 사람이, 또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그 조건 없는 사랑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천재 물리학자로서 다분히 괴짜 기질을 가졌던 유가와가 오래 전에 감탄했던, 그래서 20년 만에 만나 무척 반가웠던 옛 친구를 향해 보여준 연민도 짠했다. 아마도, 그게 자신의 유일한 호적수라고 여긴 이시가미, 즉 천재 수학자가 아니었다면 반응은 달랐을 것이다. 그가 가진 재능과 능력에 더 큰 우정을 느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그건 이시가미의 것이었다. 본인은 절대로 원하지 않은 결과였지만, 유가와가 보여준 우정을, 먼 훗날에라도 이시가미가 고마워했으면 좋겠다. 그의 외로웠던 삶에 한줄기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사건의 시작이 되었던 야스코를 되돌아 본다. 때로, '무지'도 죄악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시가미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만족하며 살았다지만, 그래도 그 마음 몰라준 야스코가 야속하다. 그녀보다 더 정직했던 딸 미사토가 보인 결단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또 다시 누군가의 절대적 희생 뒤에서 숨어 지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그가 원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그저 재밌을 거라고만 기대했었는데, 지독히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만났다. 추리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살인 사건으로 이 새벽에 오싹한 기운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만남이 반갑고 고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이것만은 강추다! 싶은 책들을 소개받아야겠다. 이 책을 사고서 6개월 만에 읽은 나이다 보니, 언제 다음 작품을 만날 지 장담할 수 없지만, 기꺼이 다음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리겠다. 이 책, 아프고 스산하고, 그리고 짠하다. 무엇보다도, 사랑이 고파진다. 더욱 절실히.
ps. 이 책을 읽고 나서 역대 나오키상 수상 리스트를 찾아보았다. 역시나 쉽게 찾아진다. 그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 되었던 게 뜻밖의 수확이기도 했다. 138회나 되길래 한 세기를 넘긴 것인가 화들짝 놀랐는데, 일년에 두 차례씩 선정한단다. 아무튼 100회를 훌쩍 뛰어넘어버린 이 권위있는 상도 몹시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역시나 저력이 있구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