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근현대사 -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최병욱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구판절판


베트남이 역사를 이루어 온 시간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10세기에 천년의 중국 지배를 극복하고 독립국이 되었을 때 국가의 영역은 북부 베트남에 해당되는 지역뿐이었다. 중부지역에는 참파 왕국이 약 천년 동안 존속해왔고, 남부지역은 현재 앙코르와트가 있는 곳에 수도를 두었던 캄보디아의 남쪽 변방이었다. 베트남은 독립 이후 500년 동안 줄기차게 남쪽으로 팽창하여 중부지역을 차지했고(15세기), 그뒤에도 남진을 계속하여 약 300년 뒤(18세기)에는 남부를 다 흡수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이 500년 동안 대체로 한 영역 속에서 단일 운명체로서의 의식을 강화해오던 시기에 베트남은 인종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달랐던 참파와 캄보디아를 베트남의 일부로 끌어들이느라 분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부와 남부 지역에 베트남인이 이주해 살며 선주민인 참파인, 크메르인과 섞이고 새로운 지리환경에 적응하는 가운데 세 지역 사람들의 문화, 인성에서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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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말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지금의 하노이에 수도를 둔 홍하델타 지역의 정권에서 보면 지배영역의 남부 끝이던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16세기에 한 ‘반역정권’이 수립되었다. 응우옌이라는 성을 가진 인물이 수장이었다고 해서 응우옌 정권이라고도 부르는 이 권력집단은 중앙정권과 대결하면서 남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18세기까지 베트남이 남부 메콩지역 전체를 흡수했다 함은 이 정권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독립국가도 수립되었다. 베트남에는 수세기 동안 두 개의 국가가 있었으니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친 남북 간의 치열한 전쟁 및 대립이 낳은 적대감은 매우 깊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18세기말 중부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떠이 썬 출신 삼형제가 지휘하는 군대는 먼저 응우옌 정권을 쓰러뜨리고 이후 북으로 진격해서 홍하델타도 장악했다. 떠이 썬 군대는 베트남 사태에 개입한 중국군을 밀어내고 남부로 들어온 태국군도 물리치는 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이질화된 베트남의 세 지역을 하나로 묶는 일은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훨씬 더 힘겨웠다. 떠이 썬이 남과 북의 정권을 다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던 1788년, 남부 싸이공에서는 또다른 정권이 탄생했으니 남부 즉 싸이공 메콩 출신들이 주체가 된 쟈딘(쟈딘은 베트남 남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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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시작된 내전은 약 15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남부사람들이 주체가 된 세력이 19세기 초 떠이 썬에 승리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니 이것이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자 현재 베트남의 북,중, 남부를 포괄하는 최초의 통일왕조 응우옌 왕조(1802-1945)였다. 응우옌 왕조의 국호가 ‘비엣 남’이었는데, 이것의 한국식 발음이 ‘베트남’이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이 생긴 지는 약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왕조가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1859년이니 전통시대 통일의 경험은 고작해야 5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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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비야란 자카르타의 옛 이름으로서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건설한 도시다. 1652년 우리나라에 표류해온 하멜 일행은 바타비야의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들로서 당시 일본으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제주도 해안으로 밀려온 것이다. 나뽈레옹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19세기 초,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왕실의 요청으로 잠시 영국이 바타비야를 차지한 적도 있으나 나뽈레옹 몰락 후 다시 네덜란드가 바타비야로 돌아와 20세기 중반까지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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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 1820년 제2대 황제 민 망이 등극한 이래 조정에서는 매년 한척 당 승선인원이 수백명에 이르는 선단을(적게는 2척, 많게는 6척) 해외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 파견단의 활동을 ‘공무’라 칭하는데 대체로 ‘여동공무’와 ‘하주공무’로 대별된다. 여동공무란 중국 꽝뚱으로 가는 공무이며, 하주공무란 하주를 다녀오는 공무를 말하는데, ‘하주’란 베트남 아래에 있는 땅 즉, 말레이반도의 말라카, 페낭, 신흥 싱가포르, 자바의 바타비야, 필리핀의 마닐라 등을 말하며 때때로 인도까지도 행선지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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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공무의 목적은 다양했다. 첫째는 원거리 항해를 통해 수군을 조련하고 바닷길을 익히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물자구매로서, 궁중에서 사용될 소비재로부터 각종 선진 군수물자가 구매품목에 포함되었다. 포도주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서양 사냥개나 싸움닭 같은 재미있는 구매품도 있었지만 소총, 탄약, 대포, 심지어는 증기선까지, 국방력 증대에 소용되는 물자들이 주요 구매대상이었다. 셋째는 기술습득이었다. 파견선에는 왕실의 장인, 의원, 통역관 등도 승선했는데, 이들은 관선의 현지 체류 기간에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정보를 획득하며 언어를 익혔다. 이들 중 일부는 현지에 남아 유학생이 되기도 했다. 넷째는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획득이었다. 관선에는 젊은 유가 관료들이 승선하여 수개월을 체류하면서 현지 사회를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이 관찰한 것과 의견은 조정에 보고되었고, 이 보고서는 베트남의 정책입안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승선한 젊은 관료들은 하나같이 향시, 회사, 전시를 거쳐 중앙 요처에서 활동하던 엘리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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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조정에서 종종 남부인들을 ‘본업보다는 말업을 더 좋아한다‘ 즉 ’농업보다는 상업을 더 좋아한다‘고 걱정했던 것은 남부인의 특성을 말함이다. 베트남 여성이 대체로 대담하며 활동범위가 매우 넓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내에서 농업, 상업 또 유사시 전쟁 참여도도 동아시아 어떤 민족의 여성보다 높다. 특히 남부여성의 활발한 교역활동은 눈에 띈다.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해안을 누비며 교역을 하는 일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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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여성의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지위는 비례하지 않는다. 전통시대 사회를 구성하는 대표적 계층이자 직종 구분이기도 한 사농공상에서 농업과 상업 분야는 여성이 담당해왔다. 벼농사를 예로 들면 씨앗 뿌리기, 모내기, 수확 등 모든 단계의 작업을 여성이 담당한다. 시장은 ‘여성의 세계’라 할 정도로 여성의 교역 활동이 활발하다. 군사 분야에서도 남성 못지 않은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더불어 상승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유교이념의 확산, 교역을 사적 영역이라 인식하는 베트남인의 전통적 관념, 식민지배, 중국인과의 관계, 가족관계, 부엌에서 나오는 권리 및 권위에 대한 베트남 여성의 독특한 집착, 가사와 교역을 하나의 연결선으로 보는 관념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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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하는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19세기 유가 관리들이 시행했다면 믿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1830년대는 ‘토지개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유가 관리들이 이 개혁을 주장하고 시행했다. 토지사유제가 일반적이었던 중국이나 조선에서 양심적인 유학자들의 ‘주장’으로만 그쳤던 각종 개혁안이 이 시대 베트남에서는 중앙조정의 관리들에 의해서 척척 시행되었다. 베트남이 우리보다 덜 유교적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보다 3년 전에(B.C.111) 한나라의 지방 군으로 편입된 베트남에 유교가 전파된 시기는 우리보다 앞서면 앞섰지 늦지는 않았으며, 10세기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향의 강도 또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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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한 가지 달랐던 것은 공전(公田)의 존재다. 베트남 촌락은 내부의 결속력이 매우 강하며 촌락의 공공재산인 공전이 존재했다. 공전이란 촌락의 공동소유 토지르 f말한다. 이 토지는 매년 재분배되며 빈민의 구휼, 유산자 방지 등의 수단으로 기능했다. 아울러 공전은 사회적 정의구현의 척도이기도 했다. 공전이 세력가들에게 겸병되어 촌락 내 공전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사회질서 유지의 적신호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적정 비율의 공전 유지는 각 정권의 핵심적 관심사 중 하나였다.
19세기에는 새 왕조가 수립된 지 30여년, 정권이 가장 안정된 시기에 조정의 관료들이 부자의 토지를 빼앗아 공전화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시작은 남부에서부터였다. 1835년 레반코이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남부를 직접 지배하기 위해서 파견된 조정의 관료들은(북, 중부 출신) 그동안 남부에서 대토지 소유제가 발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촌락에는 공전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불의였다. 이리하여 1836년에 토지를 몰수해서 공전으로 만들어 농민에게 나누어주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를 ‘균전제’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공전을 나누어 주려 해도 받으려는 농민이 없다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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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는 땅이 많았다. 경작지 자체가 인구를 부양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했을 뿐더러, 쉽게 경작지로 전환 가능한 미개간지도 무한정 널려 있었다. 더구나 19세기에는 토지에 비해 인구비율이 턱없이 낮았다. 토지분배란 인구에 비해 나누어 가질 토지가 부족해서 토지를 두고 경쟁이 심한 지역에서나 필요로 하고 환영받는 정책이다. 그런데 남부는 토지보다도 사람이 더 귀한 곳이었다. 때문에 소작인의 지위가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말이 소작인이지 이들은 자유로운 임노동자에 가까웠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떠나 다른 지주의 소작인이 되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널린 황무지를 개간해 자작농 또는 지주까지 될 수 있었다. 단지 소작농이나 지주가 되면 국가에 등적되어 조세를 부담하고 군역 대상자로 노출되어야 하는 관계로 국가에 구속된 소농보다는 자유로운 ‘소작인’의 지위를 택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공전을 받으라는 말은 그 댓가로 국가에 구속되라는 말인데 누가 선뜻 토지를 받겠는가?

-55쪽

남부의 특수성을 이해한 조정은 곧 정책방향을 수정해서 무한정의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고 공전 창출 정책은 파기했다.
단지, 남부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던 중부 빈딘 지역의 토지개혁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곳에서의 경과를 보면, 19세기 유가 관료들의 토지개혁이 단지 허울뿐이거나 명분상의 공론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빈딘은 인구에 비해 늘 토지가 부족한 곳이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참파왕국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빈딘은 풍광이 수려하고 수산, 임산 자원이 풍부하며 비옥한 평야도 곳곳에 산재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토지의 생산력이 인구의 증가를 따라가주지 못하는 독특한 지역이다. 참파가 일찍이 10세기에 풍요로운 꽝남을 버리고 새로 수도를 삼은 곳이니 어느 정도 농업 생산능력은 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참파가 이곳에 있었을 때 인구 부양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베트남인이 이 지역에 살게 된 이후부터 빈딘은 중부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곳, 그래서 인구 유출이 가장 활발한 지역, 경쟁이 심한 지역, 따라서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은 지역으로 유명해졌다. 떠이 썬 반란의 시발점이 빈 딘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울러 남부로 내려온 이주민 중에 빈딘 출신이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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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실시한 결과, 개혁 전에 공전이 전체 토지의 10% 정도였던 것이 개혁 후에는 60%로 증가했으니 굉장한 비율이다.
20세기 후반 통일이 되자, 북부인에 의해 다시 남부의 대토지 소유는 악으로 간주되고 집체화의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곧 실패가 인정되고, 지금 남부에는 국가의 묵인, 때로는 권장(농업 기계화 추진) 속에서 대토지 경영이 빠르게 증가하는 중이다. 적어도, 남부의 대토지 소유제를 둘러싼 역사는 두세기에 걸쳐 거의 유사하게 반복되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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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 또는 황제 중 50명 이상의 자녀를 둔 경우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은 태종으로서 56세에 사망할 때까지 29명을 두었다. 총 27명의 조선 왕 중 20명 이상의 자녀를 둔 경우는 일곱 왕(정종 23, 태종 29, 세종 22, 성종 28, 중종 20, 선조 25, 영조 24)뿐이며, 열명 이상이 둘이고 나머지는 열명 미만이다. 27명 중 4명은 아예 자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민망 황제는 아들 78명, 딸 64명, 도합 142명의 자녀를 두었다.
민망 황제가 장복했다는 ‘민망탕’은 정력에 관심이 많은 베트남 남성들에게 매우 인기다. 베트남인들이 민망탕의 가장 핵심적 재료로 여기는 것은 고려인삼이다.
민망 황제는 정사(政事)에 있어서도 보통 열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31세에 등극해서 20여 년간 황제자리를 지켰던 그는 ‘식록’ 내용이 황제의 거취, 정책결정, 신하들과의 적극적 토론 등 개인적 일대기로 채워진 듯 느끼게 할 정도로 열정이 넘치고 개성이 강한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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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상실한 마지막 왕조라서 그런지 응우옌 왕조에 대한 베트남 역사학계의 태도는 호의적이지 않다. 그래서 민망 황제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낮다. 남부에서 토지사유제를 보장한 정책은 ‘지주세력 비호자’로 비판받는 원인이며, 기독교도를 탄압한 것은 ‘시대착오적 실정’으로, 동남아시아로의 관선 파견은 ‘사치품 구매 목적’으로 매도되며, 캄보디아 점령은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인데다가, 중국인 압박은 쇄국정치의 일환이며, 각종 교육행정 제도개혁 정책은 그저 중국적인 것만 따라하려는 우스꽝스러운 태도로 치부된다. 소수민족 동화 정책 중에 발생한 수많은 저항은 모두가 ‘농민반란’이라고 이름 붙여져, 민망 시대는 가장 많은 농민반란이 있었던 반(反)농민적 시기로 폄하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민망이 이룬 업적은, 베트남 역사학계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는 15세기 레타인 똥의 업적 못지않다. 요즘은 차차 민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발전하고 있는 시장경제, 대외교역, 메콩의 쌀 생산 증대, 대토지 경작(실제는 소유)의 확대, 기독교 문제에 대한 불안감(체제에 대한 잠재적 위협 세력), 다민족사회 운영, 캄보디아와의 관계 같은 문제에 직면해서, 이와 유사한 일이 이미 19세기에 있었고 민망 황제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면서 해결방법을 찾아내고자 노력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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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은 창업자 쟈롱 황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로 세 형이 모두 병으로 또는 전장에서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계승권자가 되었다. 그가 등극한 이후 20년의 세월은(1820-41) 베트남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북부 닌빈 지역 늪지 수백만평을 개간해 농지로 만들고, 전국을 중앙 직할지화 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며,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내지화하면서 베트남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데다가, 전국적인 지도 및 해도 작성(국가 영역 개념의 출현 및 민족 공동체 형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각종 편찬사업, 소수민족 동화정책, 남북 일체화 작업,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관선단을 파견해 신무기를 도입하고 기선을 제작한 것, 기독교 통제, 남부의 개간사업 및 쌀 생산 증대, 중국과의 국경분쟁 해결 등...... 민망은 책도 열심히 읽는 독서광이었고, 시문 짓기도 매우 즐겼다. 이 많은 일을 하려면 하루 24시간도 모자랐을 법한데 어떻게 142명의 자녀까지 만들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오래 못 살고 50살에 사망한 것이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시절 수명 50살이란 평균치보다 못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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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고려인삼을 입수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예상 가능한 경로가 있다. 첫째는 베이징에 조공차 갔던 사절단이 황제의 하사품으로 고려인삼을 받아온 경우. 둘째는 베이징 사절단이나 광둥에 간 화물 채매단이 중국 상인으로부터 구입해왔을 수도 있다. 셋째, 공식적 물품 거래 외에 사무역을 통해서 구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아직껏 그 어느 경우도 확인된 바는 없다. 단지 19세기 전반 우리나라 거상 임상옥의 행적과 관련해서 인삼의 유통경로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인 이주자들이 1830년대 초까지 특히 남부 베트남으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이들이 타고 온 배에 인삼이 실렸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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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와 ‘우’의 우열은 항상 일정하지 않다. 삼정승 중 영의정 다음 좌/우 의정이 있는데 좌의정 서열이 높으며, 군사작전 중 중군/좌군/우군에서도 좌군이 우군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다. 반면, ‘오른팔’의 경우‘ 우’의 우월성을 전제한 용어 및 개념으로 이해된다. 베트남에서 ‘좌도’란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를 의미하는 말로, 19세기에 기독교를 적대적으로 대할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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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16세기에 처음 베트남에 들어왔고, 17세기에 들어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반 이후 기독교계에서 예수회보다는 훨씬 교조적인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엄격히 금지하자 죽은 조상에게 신격을 부여하는 경향이 전통적으로 유난히 강한 베트남 사회에서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 간의 갈등은 심각해졌다. 아울러 기독교는 현지 정권과도 충돌하여 남/북 베트남에서 모두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8세기 말 떠이 썬 반란 시기에 탄압은 극심해졌다.
그런데 매우 예외적이게도 마지막 왕조를 연 응우옌 푹 아인은 기독교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프랑스인 이방선교회 소속 삐뇨 드 베엔느 신부는 베트남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쟈딘 정권을 도왔다. 응우옌 왕조 건국 이후에도 기독교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베트남 곳곳에 교회가 들어섰다. 싸이공은 특히 더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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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자유로움은 1820년에 끝났다. 민망과 티에우찌 황제 시기를 거치면서 일반인과 기독교도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메울 수 없이 깊어지고 조정을 비롯한 유사(儒士)들에게 기독교는 ‘좌도’ 즉 그릇된 도리가 되었다. 레반코이의 반란을 진압한 후 조정에서는 본격적으로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에 들어갔다. 반란군에 기독교도들이 많았으니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겠다는 기독교도들은 황제까지 부정한 셈이었다. 그러니 황제에게 기독교도란 신유학 이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충’과 ‘효’를 어기는 자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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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문제를 제외하고, 19세기 유가 황제 및 문신 관료들이 기독교를 못마땅해 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기독교 경전의 내용이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신유학적 지식인들에게 모든 사물이나 이치는 전후의 인과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그래서 신유학은 매우 인간 중심적이고 과학적이다.
둘째, 산업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을 거치면서 이전과 비교해 질적으로 달라진 서양세력의 속성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베트남은 16세기부터 서양인과 접촉해왔는데, 19세기의 서양인은 매우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그들은 동남아시아 각지에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이 도시를 거점으로 무역만 했으므로 베트남인에게는 무역상대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세기의 서양인들은 ‘영토’를 차지하고 나라를 만들어갔다. 동남아시아 제국과 광둥 지역을 관찰하고 있던 베트남인은 이미 아편전쟁의 경과를 알고 있었으며, 기독교도나 선교사들이 서양 제국의 침략전쟁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관찰하고 있었다.
셋째, 통합에 대한 위협이었다. 19세기 베트남 위정자들은 국가통합을 열망했다. 남,중,북 사람들이 하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랐고, 중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소수민족을 베트남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통합과정에서 여러 가지 진통을 겪고 있는 마당에 위정자들이 보기에 기독교도는 통합을 방해하고 심지어 위협하는 존재였다. 기독교도라서 탄압했다기보다는 통합을 위해 이질적 집단을 베트남인으로 동화하려는 데 따르지 않아 가해진 핍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대에 기독교 탄압이 벌어졌던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 베트남은 훨씬 더 절실한 이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는 ‘베트남인’으로 보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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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에 대한 공격, 살해가 다반사로 벌어지고 이에 대한 자기보호로 기독교도들은 더욱더 프랑스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남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북부점령을 목표로 1873년 11월 프랑시스 가르니에를 북부로 보냈다. 그가 이끌고 간 군대수는 고작 200여명이었는데, 이해 12월까지 불과 20일 동안 이 병력을 가지고 하노이 성을 비롯해 흥 옌, 하이즈엉, 닌빈, 남딘 등 홍하델타 지역의 핵심이 되는 주요 4개 성을 점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는 프랑스군이 도착하자마자 기독교도 수천 명이 삽시간에 모여들어 호응했기 때문이다. 홍하델타에서는 프랑스-베트남 간의 싸움이 아니라 기독교도와 비기독교 사이의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73쪽

한 가지 의문은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갈등이 언제 치유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화해의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되는 한 가지는 기독교도들이 프랑스에 협조는 했으되, 베트남적 윤리에 역시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탄압에 휘둘리면서 생존을 위해 동포를 향해 무기는 들었지만, 이제 그런 위협이 없어지자 기독교도는 베트남인으로서 전통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제사 문제에서 한발 물러서는 융통성을 발휘한 것도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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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54)은 호찌민의 북베트남군(베트민)과 프랑스 간의 싸움이었다. 전쟁을 종결짓는 전투가 디엔 비엔 푸 전투였는데, 프랑스가 이 결전ㅇ르 결정한 직접적 이유 중 하나는 베트민군이 라오스 경내로 들어가 라오스 공산혁명군과 협조하며 라오스 왕정 타도를 기도했기 때문이다. 라오스를 통과하여 프랑스군의 배후를 치려는 베트민군의 작전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1960-75)은 베트남 통일로 가는 전쟁이었으며 흔히 ‘베트남전쟁’이라 불린다. 이때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와 라오스, 영내를 통과하는 호찌민 통로가 건설되었다. 이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군은 캄보디아, 라오스에서도 군사작전을 수행해야 했기에 전장은 베트남만이 아니라 인도차이나였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수장 시하누크가 자국 영토 내에서 공산계열 베트남군 세력의 활동을 줄곧 묵인하자, 미군은 론 놀 장군을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시하누크를 축출하고 캄보디아에 친미정권을 수립했다.
-77쪽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은 우리가 흔히 ‘중월전쟁’이라 부르는 사건(1979)이어서, 중국군의 침략에 대응해 베트남 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베트남 응징’ 구실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캄보디아에서는 인구의 절반가량이 사라지는 대참사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학살 및 기근이 주요 원인이었는데, 자민족 중심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했던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국 내에 살고 있던 베트남인에 대해서도 매우 적대적이어서 대학살의 와중에서 수많은 베트남인이 살해되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 군은 남부 베트남 지역을 크메르인의 ‘실지(失地)’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경 주변의 무력 충돌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베트남의 대응방식은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캄보디아로 진공하는 것이었다.(1978) 마침내 베트남군은 크메르 루주군을 축출하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자 중국이 나섰다. 베트남의 군사력 견제, 국경분쟁 해결, 베트남 통일 후 베트남 거주 중국인에 대한 베트남 정권의 핍박에 대한 응징을 기도하던 중국에게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략’은 매우 명분 있는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중월전쟁이고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이었다.

-78쪽

참고로 ‘코레아’가 ‘고려’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지만, 고려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 ‘코레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 포르투갈, 에스파냐를 위시한 남부 유럽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16세기부터 ‘코레아’라는 명칭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당시 그들이 접하던 중국인이 우리나라를 지칭해 조선 대신 ‘까오리(고려)’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데서 기인했을 것이다. ‘코레아’라...... 라틴계 발음법에 가깝지 않은가.

-79쪽

코친차이나는 결국 ‘교지’이며 베트남이었다. 때문에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 들어오면서 ‘코친차이나’는 베트남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중반부터 베트남에 두 개의 왕조가 각기 따로 발전하게 됨에 따라 외국인으로서는 두 나라를 구분해서 불러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북베트남은 ‘통킹’이 되었고 ‘코친차이나’는 남부가 가져갔다. 흥미로운 것은, ‘코친차이나’가 남진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략 18~19세기부터는 남부 베트남 중에서도 특히 싸이공 주변의 남부를 일러 ‘코친차이나’라고 불렀으며, 프랑스가 들어오면서 코친차이나는 싸이공, 메콩 유역만을 가리키는 말로 고정되었다. 북베트남을 지칭하는 ‘통킹’은 15세기 한때 하노이 지역을 ‘동낀(東京)’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했다.

식민지시대 ‘코친차이나’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중에서 프랑스의 직접 지배를 받는 베트남 남부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80쪽

베트남 사람들은 술을 참 좋아한다. 이들이 즐겨 마시는 술은 쌀로 빚은 소주다. 나는, 우리나라에 소주가 전래된 경로가 베트남으로부터라고 믿고 있다. 흔히들 소주의 기원을 13세기 몽고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소주를 고아 마시던 것을 보고 배운 것이라 얘기한다. 그러나 초원지대에 살던 몽고인이 쌀로 소주 빚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리 없다. 초원을 떠나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니다가 소주를 배웠을 터인데, 우선 소주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쌀이 흔한 지역이어야 한다. 남중국으로부터 동남아시아가 그런 곳이다. 그런데 남중국에서 소주는 흔하지 않다. 나는 윈난의 그것도 수도 쿤밍에서 한참 서쪽에 있는 따리(대리)쯤에나 가서야 사람들이 쌀소주 마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몽고군이 들어왔던 13세기까지 이곳은 백족이 중심이 되는 대리국이었으니 몽고군이 윈난에서 쌀소주 만드는 방법을 배웠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헌데 이곳 따리에서 홍하가 발원하여 동동남쪽을 향해 거의 직선으로 흘러내려가면서 만들어낸 땅이 홍하델타이며 베트남인의 중심 거주지다. 이곳은 쌀이 많이 생산되며 소주 마시는 풍습이 보편적이다.

-82쪽

더운 나라에서 웬 소주냐고? 모르시는 말씀. 홍하델타 지역의 겨울은 매우 춥다. 영상 10도 안팎이지만, 햇빛이 거의 없고 가느다란 이슬비도 자주 내린다. 겨울은 겨울이로되 어중간한 겨울이라 특별한 난방시설도 없이 그냥 지내는 고로 느껴지는 추위가 만만치 않으며, 노인들은 겨울을 못 넘기고 사망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따스한 춘신을 맞는 봄의 첫날인 설(Tet)은 그래서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이다. 추우니 독한 술이 어울린다. 그러나 즐겨 마시는 술의 도수는 꼭 기후와 반비례하지는 않는다. 남부 베트남은 사철 30도 이상으로 덥지만(그래도 밤에는 추위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곳 사람들이 알코올 도수 40도 이상 되는 소주를 즐김은 북부사람보다 훨씬 더하다. 그래도 북부인은 대체로 고량주잔만한 작은 소줏잔을 사람마다 앞에 놓고 조금씩 마시는데 비해 남부인은 맥주잔 반 정도 되는 큰 잔을 하나만 놓고 계속 비우면서 돌아가며 마시는 쾌활한 주법이 있다. (여성들은 여간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84쪽

베트남인은 종교의 계율적 속박에서 자유롭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조상신 숭배의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술 소비가 필연적이다. 한 집에서 일 년에 몇 번씩 치러야 하는 제사에는 술이 늘 있어야 한다. 집에서 자유롭게 술을 담글 수 있고 각 지방에는 내로라하는 특산주가 있어 애주가를 유혹한다. 쌀이 풍부해서이기도 하지만, 술에 대한 유난한 애호는 일종의 전통이요 관습이요 미풍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소위 ‘금주령’은 베트남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85쪽

인도차이나를 경영하면서 프랑스 식민정부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도로, 교량, 철도 건설 등 인프라 구축에도 돈이 들어갔다. 교육 시스템 구축도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직접지배 방식에 따른 행정체제 유지에도 돈이 많이 들어가고 끊이지 않는 항불운동 진압에 따른 경비 소요도 엄청났다. 여기에 프랑스 정권의 산만하고 비효율적인 경영 방식도 한몫을 했다. 초기의 비용 투자는 어느 식민지경영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투자분을 회수하고 재정이 흑자로 돌아서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를 위해 ‘잔혹한’정책들이 다양하게 강구되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재정상태를 흑자로 돌리는 방법을 찾느라고 고심하다가 특정 품목의 전매제를 실시했는데 아편, 술, 소금이 전매대상 품목이 되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소금의 필요성은 각별하다. 느억 맘 때문이다. 느억 맘은 생선과 소금을 함께 항아리에 넣어 수개월 간 숙성시켜 만드는 생선간장이다. 베트남은 더운 기후 탓인지 짠 생선간장의 소비가 훨씬 더 많다. 프랑스 당국은 소금을 전매함으로써 베트남인의 식단까지 통제한 것이다.

-86쪽

기독교 탄압이 거세던 1840년대 중반, 기독교와 아편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하는가를 조정의 대신들과 황제에게 물어보았다면 아마도 아편이라고 했을 것이다.
정부에 의한 아편 전매제도 시행이란 곧 아편 흡입을 공식적으로 허용함을 의미했다. 베트남인의 아편 흡입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재정수입과 직결되는 것이라서 식민정권 입장에서 보자면 아편 흡입은 권장사항이었다. 음주도 그러하고. 그래서 이 전매제는 "더 많은 알코올 소비를 강요하고 아편 흡입을 권장한" 정책이라 할 만하다.
동아시아 아편 유통의 중심지였던 싱가포르, 홍콩 등의 화교네트워크와 연결되는 베트남 내 중국인이 아편무역을 도맡았다. 아편 판매로 생기는 이윤은 일단 중국인 호주머니로 들어갔다가 일부가 세금 형태로 식민정부에 납부되는 식이었다. 미식가적 성향이 강한 베트남인에게 중국인 공장에서 만든 술만 먹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게다가 베트남 돈이 중국인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박탈감과 함께 술이 가진 주술적 의미(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 술이 중요하다)를 고려할 때 ‘공장 술 먹기’는 엄청난 심리적 피해의식까지 수반했다.
-87쪽

베트남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을 제외하고 베트남 주민족만으로 계산한다면, 베트남인의 문자 해독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괴롭히는 받아쓰기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발음한 대로만 쓰면 되니 말이다. 한국어를 비롯해서 영어나 중국어 같은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받아쓰기가 필수적이겠지만(특히 우리말은 쓴 대로 읽지 않고 읽은 대로 쓰지 않는 대표적 사례라서 더욱 이 연습이 필요하다.), 베트남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거의 필요가 없다.
프랑스인이 들어올 때까지 로마자화된 표기법은 일부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었을 뿐이고 주로 사용하던 글자는 한자였다. 단지 발음대로 표기하기 위해 쯔놈이 사용되고 있었다. 쯔놈은 한자의 음과 훈을 절묘히 이용해서 베트남어를 구어체로 적는 방식이다.
-93쪽

‘베트남적 근대성’을 두려워한 프랑스에게 경계의 대상은 쯔놈이었고, 쯔놈을 적어내는 한자였다. 한자로부터 농민들을 격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를 구사하며 농민의 저항의지를 자극하던 식자층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프랑스 지배자들에게는 두 가지 대안이 있었다. 첫째는 베트남인으로 하여금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국어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투쟁의 대열에 농민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문자 또는 활자를 이용한 선전, 선동, 교육 등이 매우 중요함을 인정한다면 ‘활자’(print)는 곧 ‘힘’(power)이라는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어가 프랑스를 이겨냈다’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96쪽

유신회라는 명칭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판 보이 쩌우에게 일본은 모범이었다. 전통의 막부체제를 깨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입헌군주체제를 안정시킨 이후 나날이 국력이 성장하던 일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던 사람은 아마도 조선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104쪽

그는 황제국 베트남의 전통을 이어받아서인지, 아니면 당시 약육강식에 적자생존 등 사회적 다위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베트남의 전통적 조공국이던 라오스나 캄보디아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고 오히려 이들 국가를 ‘프랑스에 빼앗기 땅’으로 인식하는 ‘중화주의자’이며 ‘패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조공국’으로서의 인식도 강하게 남아 전통시대에 베트남 왕이 황제라 자칭한 일을 비아냥거리는 태도는 ‘사대주의적 잔재’라 비판받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인기를 떨어뜨린 것은 1918년 발표한 ‘법월제휴론’이었다. ‘프랑스에 협력하자’는 주장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 점증하는 일본의 무력적 위협을 염두에 두고 두 나라가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초기의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주의로, 그리고 다시 제휴론으로 이어지는 정치의식의 변화 속에 추종자들은 떨어져나갔다.

-108쪽

고무농장은 남부, 즉 코친차이나에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광산이나 플랜테이션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중국인 쿨리(coolie)가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동남아시아인은 전통적으로 또는 체질적으로 집중적이고 강도 높은 노동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제국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의 시각을 빌려 현지인을 평가하는 이들은 동남아시아인을 ‘게으르다’고 하지만, 이것은 지리적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다른 생활방식에 대한 편견이다. 풍요로운 자연환경 덕에 먹고사는 게 힘들지 않았던 동남아시아에서는 ‘죽도록’ 일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사시사철 덥고, 여타의 온대지방에 비해 일조량이 많고 강한 기후 속에서 ‘죽도록’ 일하는 것은 정말 죽음으로 가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선호되던 ‘부지런한’ 중국인 쿨리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중국인 쿨리의 고용에는 일반적으로 부작용이 따르곤 했으니 아편, 매춘, 폭력 같은 문제였다. 아편이나 매춘도 심각했지만 출신지별로 또는 정치 경제적으로 이해가 상충하면서 생기는 폭력사태는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큰 골칫거리였다. 오죽하면 말레이반도의 몇몇 술탄국이 중국인 광산노동자 사이의 폭력사태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영국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요청하기까지 했는가.

-113쪽

프랑스인은 중국인 쿨리를 수입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았으니 북부(통킹)나 중부(안남)의 베트남인 쿨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남부 코친차이나인을 고무농장 노동자로 끌어들이기는 용이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렇다. 우선, 베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자연환경의 혜택을 누리던 남부인의 정서는 보편적 ‘동남아시아인’에 가까웠기 때문에 ‘죽도록’ 일하는 농장노동자가 될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고무농장이 위치한 곳은 원래 울창한 밀림이며, 베트남인이 모이(moi)라고 부르는 산지인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산지인의 위협 외에 말라리아와 온갖 독충, 해충, 그리고 풍토병이 위협하는 곳이며 음험한 정글 귀신들이 우글거린다고 여기는 곳이었다. 고무농장 일은 농장을 건설하기 위해 그 울창한 정글의 나무를 베어 개간하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거기에 고무나무를 심고, 다시 농장 확대를 위해 정글 개척은 계속되게 마련이었으니 이런 사정을 뻔히 아는 남부인이 이 무시무시한 곳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노동자 모집인들이 눈길을 돌린 통킹과 안남은 인구압이 높고 종종 한해와 수해 등 천재도 겪으며 유산민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 남부로 이동하는 것은 19세기 이후 일반화된 현상이었다. 아울러 이곳 농민들은 비교적 치열한 생존경쟁 탓에 강도 높은 노동에도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114쪽

고무농장의 하루 일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새벽 네 시쯤 요란한 싸이렌 소리와 더불어 깨어난 후 아침밥을 지어먹고 5~6시 사이에 작업장으로 나간다. 고무액(라텍스) 채취는 오전 중에 이루어지는데, 작업 할당량은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걸음을 옮겨야만 채울 수 있는 극한량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며 간신히 채취량을 채울 때 쯤 신호 소리가 들리고 채취한 고무액은 수집하여 창고에 쌓든가 트럭에 실어 반출한다. 점심식사 후에는 풀 뽑기, 추가개간 등의 작업이 뒤따른다. 하루 일과를 끝내는 시각은 오후 여섯시 경, 그 뒤 저녁식사를 하고 오후 10시에 싸이렌 소리와 더불어 취침한다.

-116쪽

고무농장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지옥은 식민과 피식민, 자본과 노동, 착취와 피착취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깨닫는 중요한 학습장이었다.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이곳을 주목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들의 주장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쉽게 이해되었다. 베트남의 민족해방운동사 및 공산주의운동사에서 고무농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무농장 노동자들의 역할이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노동자이면서도 농민의 성향을 더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으로서 동원되어 임노동자가 된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꿈은 돈을 벌어 귀향해 땅을 사고 다시 농민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양면적 성향이 그들로 하여금 일정 이상의 행동선에서 머뭇거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고무농장’이란 단어 자체가 지닌 태생적 모순처럼, 고무농장의 노동자는 노동자지만 농민이라는 본원적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이런 문제에서 야기되는 정체성의 혼란은 고무농장에서의 간고한 삶에 무게를 더해주는 또 하나의 부담이지 않았을까?
-118쪽

1940년에 일본군이 베트남에 진주했다. 일본군이 베트남에 들어온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중국과 전쟁을 치르던 일본군에게 인도차이나를 통한 연합군의 중국 지원은 매우 성가신 일이었기에 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또 하나는, 베트남을 점령함으로써 남양 즉 동남아시아로의 진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흔히들 동남아시아인의 일본군에 대한 태도를 ‘이중적’이라고 평한다. 새로운 정복자에 대한 두려움과 서양세력을 물리친 실력에 대한 경외심이 혼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과 베트남은 전혀 달랐다. 먼저, 필리핀은 미국 식민 정권이 1930년대부터 필리핀의 독립 절차를 밟아나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선전하던 ‘필리핀 해방’이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경외심보다는 두려움 내지는 반발심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베트남의 경우는 두려움도 아니고 경외심도 아니었다. 일본군에 대한 베트남인의 초반정서를 나는 ‘착잡한 궁금증’이라 규정했는데, 이 궁금증이 점차 증오심으로 변화되고 급기야 ‘쌀전쟁’을 거치면서 증오심이 급속도로 증폭되었다고 본다.

-120쪽

‘쌀전쟁’이란, 내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베트남의 제반 문학작품들을 검토하면서 만들어본 개념으로, 일본군의 쌀 징발-농민의 저항-아사자 발생(약 200만)-농민들의 베트민 참여-하노이 바 딘 광장에서 1945년 9월에 이루어진 베트남 독립 혁명 선언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맨손의 농민들과 그걸 빼앗겠다고 별의별 수단을 다 강구하는 총칼 든 일본군 사이의 참으로 민망한 싸움의 성격을 다소 시니컬하게 표현한 것이다. ‘쌀전쟁’은 베트남인과 일본인 공히 쌀을 먹는 민족이기 때문에 벌어진 특수한 전쟁이었다. 쌀 먹는 민족이 쌀 먹는 민족을 지배하게 되니 쌀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은 더욱 처절했다.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쌀을 먹는 아시아 어디에서고 이렇듯 제국주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먹는 걸 놓고 싸움을 벌인 일은 없었다. 서양인들은 쌀을 즐겨 먹지 않기 때문에 해당 지역 농민들의 양식인 쌀을 빼앗지는 않았다.

-121쪽

동유운동이 한창일 때까지는 메이지유신 및 러일전쟁 승리라는 일본의 기적을 보면서 일본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판 보이 쩌우 등을 강제로 축출하고 조선을 병합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베트남인들은 일본의 침략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이 확신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니, 일본군 수십만이 중국으로부터 밀려들어왔는데, 설사 프랑스군을 일시에 무력화시켰다 한들 베트남인이 일본군을 해방자로 보았겠는가. 아니, 일말의 경외심이라도 가졌겠는가. 단지 ‘저들이 무슨 짓을 할 것인지.......’라는 마음에 착잡하고 불안한 궁금증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였다. 물론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협조하며 일본을 찬양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123쪽

극한의 허기로 인해 일본군에게 증오심을 갖게 된 농민들은 1941년 창설되어 북베트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벌이던 베트민에게서 구원을 찾았다. 호찌민의 주도로 모든 민족주의 세력을 망라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출범한 이 단체는 농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을 뿐 아니라, 일본군으로부터 쌀을 탈환하는 기술을 가르쳐주고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농민들은 각처의 창고를 습격해 쌀을 되찾았고,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복수의 환희를 맛보았다.

-126쪽

남부 지주층은 프랑스가 들어온 이후 약 20년간에 걸친 ‘남부의 항전’ 과정에서 대부분 도산했다. 우리 역사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베트남 남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 유사층이 농민을 동원해 전장을 누비고, 지주들은 자금을 지원했다. 그들의 자녀들도 저항군을 지도하거나 병사로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항전에 직접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처벌당하거나 도피하고, 그들의 토지는 식민당국에 몰수되었다. 아울러 그 가족들은 파산과 함께 심지어 성까지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구지주’라 한다.

-130쪽

1945년 ‘8월 혁명’이 있었다. 베트남은 이미 4월에 일본의 도움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새로운 국가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로 했으며, 바오 다이 황제가 국가원수였다. 그러나 8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베트민이 전국적으로 봉기하고, 호찌민의 명을 받은 베트민 대표가 후에 왕궁으로 가서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평소, ‘독립 없는 나라의 왕보다는 독립된 나라의 평민으로 사는 게 낫다’고 말하던 바오 다이는 순순히 이에 동의했고, 베트민은 그에게 최고 고문직을 제공했다. 전통적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8월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9월 1일에 하노이에서 호찌민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었다. 새로운 국호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었다. 이에 따라 남프엉 황후의 지위는 베트남민주공화국 최고고문의 부인으로 바뀌었고, 바오다이가 하노이로 떠난 후 그녀는 자녀들과 함께 후에의 한 안가에서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몇 가지 에피소드가 남 프엉 황후의 위상을 한껏 고양시켰다.

-135쪽

첫째는, 호찌민이 보낸 생활비를 거부한 일이다. 호찌민은 황실에 대한 예우로 1만동(현재 약 1만 달러에 해당. 당시 호찌민 정부가 보유했던 돈은 총 100만 달러 안팎이었다고 한다.)이라는 거액을 보내 생활비로 충당하게 했으나 황후는 호찌민에 대한 감사 표시는 충분히 한 후 이 돈을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둘째는 베트민이 펼친 금 모으기 사업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었다. 모금장에 나타난 황후는 국가의 재건에 써달라고 자신이 갖고 있던 금은보화 장신구들을 대부분 기부했다. 세 번째는, ‘통첩’ 사건이다. 전쟁이 끝나고 곧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오자 황후는, 베트남의 완전독립을 바라고 프랑스의 간섭을 사양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통첩)를 프랑스 총독에게 보냈다. 당시 혁명 이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황제 가족이 가야 할 곳은 프랑스다. 바오 다이는 ‘독립된 나라라면 평민이라도 좋다’고 했지만, 사실 공산혁명과(호찌민과 주변 동료)와 전 황제의 동거란 그 발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일지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136쪽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 그녀의 생활은 파리 근교 샤드리냐크에 있는 저택에서 자녀들을 키우고 정원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바오 다이는 응오 딘 지엠 수상에게 버림받은 후 베트남을 떠나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바오 다이가 술, 도박, 여성편력 등으로 불유쾌한 소식들을 뿌리고 다니는 중에도 그녀는 일체의 눈에 띄는 언행 없이 파리 근교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가 49세의 어느 날 정원을 돌보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1963년 사망. 바오 다이는 1997년 사망)

-137쪽

역사는 당연히 ‘움직이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존재하는 사람’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니, 그들의 ‘존재’에는 역사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남 프엉 황후의 인생에는 베트남의 지역주의, 메콩델타 지역의 신지주상, 기독교 문제, 20세기 베트남 황실의 위상, 사회주의혁명의 성격 등 굵직굵직한 역사 주제가 종으로 횡으로 지나가고 있다. 아울러 베트남(인)의 문화와 인성, 기질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사례가 그녀 안에 있다. 어느 공산 혁명가가 ‘봉건왕조’의 마지막 왕비에게 거액을 제공하는 배려를 하겠는가. 그 배려에 대한 대응은 또 얼마나 당당하고 현명했는가.

-138쪽

20세기 치열한 남북 대결이 전개되던 때 북부의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 호찌민(1890-1969)과 남부의 베트남공화국 대통령 응오딘 지엠(1901-63)은 모두 독신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여성관계에서도 매우 엄격했다. 호찌민은 혁명과 국사에 바쁜 것이 이유였고, 응오 딘 지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지라 거의 성직자 수준의 금욕생활을 유지했다.(젊은 시절에는 신부가 되려 했었다.) 20세기 아시아 각국 지도자들이(공산, 비공산 진영을 막론하고) 복잡한 여성관계, 정권의 부자상속 등으로 별의별 추잡한 문제들을 야기했던 사례들과 비교하면, 베트남은 매우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호찌민과 응오 딘 지엠의 공통점은 둘 다 유학자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두 집안 모두 응우옌 왕조를 섬긴 지배층 출심이었음이 공통적이다. 그러나 호찌민은 자신이 ‘베트남과 결혼’했음을 강조하며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가화하면서 승리자들의 지도자로 남았고, 응오 딘 지엠은 매우 자주적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하나님 사랑’에 몰두한 관계로 베트남인은 물론 강력한 후원자 미국 정부로부터도 버림받아, 쿠데타군에 붙잡혀 살해되는 치욕스런 최후를 맞았다.

-140쪽

디엔 비엔 푸의 승리가 있던 해 호찌민의 나이는 65세였다. 이때부터 그는 15년을 더 살았는데, 이 기간 동안은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응오 딘 지엠과의 전쟁이었고, 그의 뒤를 이어 차례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젊은 장군들과의 전쟁이었다. 국가 지도자들 중 80평생을 이렇듯 혁명과 전쟁만을 치르다 간 이는 호찌민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마오쩌뚱, 김일성, 레닌, 카스트로, 수카르노, 아웅산 같은 굵직굵직한 지도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최종적 승리를 성취하고 한동안 그 과실을 누리고 사망하든가, 아니면 너무 일찍 세상을 뜨든가 했다.

-143쪽

현재까지 잘 알려진 몇 가지 사건은 정치적 상황만 바뀌었다면 호찌민도 얼마든지 ‘민족의 이름으로’ 비판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째는, 기껏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도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대신 ‘프랑스 연방’ 일원으로서 독립하는 안을 받아들이고 북부에 프랑스군이 진주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이는, 1945년 중국의 국민당군 수십만명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하노이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을 따라 들어온 베트남국민당 세력이 정권을 장악할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된다. 둘째는, 1954년부터 시작된 토지개혁이다. 북부정권 내부에서 쯔엉찐을 비롯한 친중세력이 득세하면서 중국공산당원들의 도움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무리한 개혁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항불 항일 전쟁기에 베트민에 참여했거나 항전을 도왔던 애국자들이 ‘지주’라 하여 재산을 빼앗기고, 모욕당하고, 살해당했다.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안으로부터 붕괴되어가는 듯했다. 호찌민과 지압 장군이 나서서 국민에게 사과하고 쯔엉 찐이 물러나는 선에서 간신히 무마되기는 했으나, 국가 최고지도자였던 호찌민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는지 의문이다. 셋째는, 토지개혁 실패 이후 불붙기 시작한 북부 지식인들의 자기비판, 또는 체제비판적 문학운동에 대한 탄압이다. 이는 베트남 문학사에 남겨진 매우 깊은 상처다. 공산주의만이 문학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자본주의에서 그런 일을 하면 죄악이고?

-144쪽

바오 다이가 주장하는 바는 무조건 독립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로서는 이 요구를 선선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베트남을 완전 독립시켜줄 경우 알제리를 비롯한 다른 식민지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베트남과 관련된 프랑스인 투자자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부에는 공산세력이 주도하고 있음이 분명한 베트민이 있으니 프랑스가 손을 털고 물러나가면 베트남은 공산화될 것이 뻔한 수순인 듯 보였다. 대안으로 프랑스가 제안한 것이 프랑스 연방 일원으로서의 독립이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와 프랑스가 연방으로 함께 묶인다는 구상으로서, 영국의 영연방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이 방안은 상당히 합리적이어 보인다. 영국을 정점으로 한 호주, 말레이시아, 남아공 등은 여태까지 이런 방식의 제도를 잘 유지하며 상호협조를 이루어오고 있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할 때도 이 방식에 대한 필리핀인의 호감이 매우 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지금 되어가는 모양새를 보니 괜찮은 것이지, 당시 100여년 가까이 혹독한 프랑스 지배에 시달렸던 베트남인, 특히 프랑스 식민정권의 꼭두각시로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 했던 황실로서는 프랑스 연방 안이란 허튼 수작에 불과했다.

-146쪽

바오 다이가 ‘완전한 독립’만을 요구하며 버티자 프랑스는 과거 직접 다스리던 코친차이나에만 ‘코친차이나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시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바오다이는 프랑스와의 협상에 응했다.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가 물러나고 베트남의 완전독립이 약속되자 바오 다이는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섰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으로 점찍은 사람이 응오 딘 지엠이었다. 각각 20대 초반과 30대 초반에 황제와 내무장관으로서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식민당국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던 두 인물은 이제 40대와 50대의 원숙한 나이에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응오 딘 지엠이 너무 변했다. 그는 이미 확고한 공화주의자로 바뀌어 미국만이 베트남공화국의 보호자라는 믿음이 굳었으며,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그는 충실한 신하가 아니라 독립된 나라의 ‘주인’이 되고 싶어 했다.

-147쪽

입헌제와 공화제를 국민에게 묻겠다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지엠 및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마음대로 투표결과가 조작되면서 공화제를 채택하자는 쪽이 압도적 다수로 나왔다. 설사 조작이 없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민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1955년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지엠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초기에 지엠은 잘 해나가는 것 같았다. 적어도 호찌민을 싫어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러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그토록 금욕적이고 청렴했던 그가 하나님과 권력 외에도 또 한 가지 너무 사랑했던 것이 있었으니, 형제였다. 한 형제는 ‘신앙의 형제’이며 또 하나는 ‘핏줄의 형제’였다. 젊은 시절 한때 신부가 되려고 했던 그는 기독교도를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원하고 특권까지 부여했다. 특히 북베트남이 싫어서 남으로 내려온 100만 가량의 기독교 형제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지극해서 정부와 군대의 요직은 물론 메콩의 촌락, 다 랏을 비롯한 서부 고원지대 신개척지에서 기독교도들이 핵심적인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148쪽

‘핏줄의 형제’에 대한 사랑은 더 노골적이었다. 중부 베트남은 후에의 대주교인 그의 형 응오 딘 껀의 독립국이나 진배없었고, 남부는 경찰력을 장악한 동생 응오 딘 뉴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동생의 부인은 보통 극성스러운 여성이 아니어서 지엠 시기 베트남공화국의 실질적 퍼스트 레이디 행세를 하며 갖가지 튀는 행동으로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다. 지엠 정권의 불교 박해에 항거해서 틱 꽝 득 스님이 분신하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을 때, 이를 두고 ‘바베큐’ 운운한 여성이었다. 호찌민은 부지런히 민중에게로 내려가고 있을 때, 지엠은 점점 하나님에게로만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150쪽

아시아 국가 중에 무력으로 식민 지배를 종결시킨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한데, 그것을 가능케 한 전투가 디엔 비엔 푸 결전이었다. 이 전투는 인간의 의지 앞에 최신식 무기나 장비는 맥을 못 춘다는 교훈을 남겼다. 다량의 최신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보명 중심의 베트민군에게 승리할 수 있다 낙관했던 것이고, 세계 대부분의 군사전문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비행기 한 대 없는 베트민군에게 프랑스군이 패배했으니 이것은 세계 전사(戰史)상의 충격이기도 했다. 디엔 비엔 푸는 라오스와 접경지대에 있는 분지다. 프랑스군은 베트민이 라오스로 들어가는 길목인 디엔 비엔 푸를 차단함과 동시에 베트민 주력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전면전을 벌임으로써 전세를 획기적으로 전환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152쪽

지압의 군대는 디엔 비엔 푸를 포위했다. 프랑스로서는 기다리던 포위였다. 그들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많은 기관총을 세워놓았다. 베트민군으로서는 선봉 소총 돌격대가 제아무리 용감하게 공격한다 한들 결과는 기관총탄의 밥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호전’이라 불리는 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의 교훈이었다. 바야흐로 살육극이 벌어질 참이었다. 그러나 베트민 전사들은 기꺼이 죽을 각오를 했다. 당시 이 전투에 참가한 중국군 고문관들도 즉각적인 공격을 독려했다. 적의 요새가 더 견고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공격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정처럼 보였다. 공격일자는 1954년 1월 말로 정해졌다. 그런데 공격개시 6시간 전에 지압 장군은 공격 무기한 연기 명령을 하달했다. 이 결정은 병사들 사이에 폭동까지 일어나게 할 정도였다. 고위장군들로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렬하게 항의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완전한 승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혈서까지 쓴 바였기 때문이다.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다른 세 당위원 장군들도 지압의 결정에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최고사령관이며 호찌민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으므로 자신에게는 공격을 중지시킬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하며 모든 단위 부대에 전달사항을 하달했다. 메시지는 한 문장 뿐이었다. ‘오늘밤 공격 중지, 원 대형으로 다시 모일 것, 엄격 준수, 추후 설명함’

-154쪽

이때부터 지압이 시작한 것은 쌀, 소금, 무기의 증강이었다. 죽는 전투가 아니라 이기는 전투를 벌이기 위함이었고,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의 작전 전환이었다. 장기전에 들어가기 위해 식량을 모으고 무기를 증강했다. 물론 항공기를 견제하기 위한 무기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에서 모집된 인력이 쌀과 소금을 메고 걸어서 디엔 비엔 푸로 향했다. 베트남 중북부에 소재한 타인 호아 성에 사는 한 농민은 약 50kg의 쌀을 등에 메고 수백 km 떨어진 디엔 비엔 푸를 향해 이동하는데, 가는 도중 그 쌀을 먹는다. 그렇게 해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디엔 비엔 푸의 군수창고까지만 쌀이 다다르면 그는 소임을 다한 것이다. 이 농민은 디엔 비엔 푸에 머물면서 짐꾼으로 활동하고 병사가 되기도 한다. 중국제 무기를 산 아래까지 트럭으로 실어오면 분해해서 통상 두 명이 한조가 되어 등짐을 지거나 자전거를 이용해 산꼭대기까지 운반했다. 부이 띤의 증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자전거를 이용하는 짐꾼 부대원은 두 명이 한조가 되어 250kg의 물자를 옮겼다고 한다.

-155쪽

주목할 것은 당시 호찌민의 베트남 정부가 전국적으로 농민을 동원할 수 있었던 능력이다. 어떻게 북베트남 각처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장거리 여행에 나섰으며, 쌀이나 소금을 기꺼이 군대를 위해 양보할 수 있었는가. 이미 1940년대의 ‘쌀전쟁’ 때부터 베트민은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으며, 북부의 각 촌락은 베트민 요원이 통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때부터 베트민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농민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으니, 전쟁에 승리하면 땅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토지개혁은 이미 타이 응우옌 성 등 일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정말로 땅이 주어졌다. 타인 호아의 농민이 수백 km의 거리를 쌀을 지고 이동하며 중간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 톨의 쌀이라도 더 남겨서 디엔 비엔 푸까지 가져가려고 애쓰는 그 정성의 배후에는 땅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156쪽

집안은 강력한 대포 공격 및 보병의 파상적 돌격 방식으로써 북쪽의 요새들을 먼저 공격했다. 베아트리스가 공격 첫날밤에 떨어졌다. 가브리엘은 3월 15일, 안느마리는 3월 17일에 각각 함락되었다. 3월 30일 베트민은 두 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지압은 5월 1일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격을 시작했다. 이전의 두 공격과는 달리, 세 번째 작전은 포 공격 없이 진행되었다. 베트민군은 보명을 이용한 단순한 파상공격만을 실시했다. 7일 간에 걸친 맹렬하고도 참혹한 백병전 끝에 지압의 병사들은 프랑스군 지휘 벙커 안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158쪽

승리자 지압은 훗날 디엔 비엔 푸를 회고하며 호찌민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군, 전장에서 당신은 어떤 결정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소. 또한, 당신은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소." 전장의 지휘관에게는 모든 권한이 일임되어야 한다. 상위부서는 지휘관의 요청대로 최선의 지원만 하면 된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그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지만 사실 실행은 힘들다. 전선의 사령관은 상위부서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고, 상위부서에 자리한 온갖 인사들은(왕이나 대통령을 포함해서) 간섭하고 싶어서 안달인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는 언론까지 한몫한다. 헌데 지압 장군과 호찌민 두 사람은 이 진리를 신봉하고 지켰다. 베트민이 디엔 비엔 푸에서 승리하고, 베트남이 프랑스, 미국, 그리고 중국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전장 지휘관과 통치수반 사이의 신뢰!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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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2-1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예요? 이제 알라딘은 책을 달러로 파는 거예요?;;;

마노아 2008-12-14 00:40   좋아요 0 | URL
오늘 알라딘에 오류가 많아요. 저도 아까 알라딘US로 뜨길래 주소 다시 치고 들어왔더니 정상으로 돌아오더라구요. 헌데 리스트에서 상품 추가도 안 되고, 온갖 에러가 가지가지 떴답니다ㅠ.ㅠ
이 책 달러로 계산하니까 엄청 비싸지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세기 베트남 토지개혁에 대해 관심 있게 봤습니다.아주 화끈하군요.우리나라 유교관료들은 역시 개혁을 내세웠어도 이 정도까진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마노아 2008-12-15 00:09   좋아요 0 | URL
너무 경이로와서 한참을 감탄했어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카타르시스도 느꼈던 것 같아요. 베트남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 놀라운 게 많더라구요. 모든 나라들이 그렇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