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부터 되짚자. 자, 대체, 결혼이 뭐냐. 두 어른이 하나의 독립 채산 가족, 창설하는 거다. 부모 가족에 인수합병, 아니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 시스템, 이 ‘어른’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 삶의 불확실성, 제 힘으로 맞서는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런데 우리 시스템, 그 대면, 부모가, 최대한, 지연시킨다. 부모의,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채권, 그리 확보된다. 그리고 그렇게 삶 자체를 위탁한 아이들, 결혼하고도, 평생 누군가의 자식으로 산다.
그래서, 이 땅에서 효도는, 채무다. 허나, 삶 자체의 변제, 애당초, 불가능한 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효도, 죄의식이 되고 만다. 명절은 그 죄의식 탕감받으러 가는 날. 길이 막혀 다행이다. 갇힌 시간만큼 속죄의 진정성은 입증되니. 반면 그 죄의식이 버거운 자들, 그 대리 지불, 자식된 권리로 합리화해 버린다. 유학도 결혼도 자식된, 합당한 권리. 그거 풀서비스 못하는 부모는 자격 미달자. 이들에게 부모는, 유산이다.
우리 사회, 이 과도 사육과 성장 지체를, 효와 사랑이라 부른다. 이 병든 패러다임에선, 자식은, 자식인 게 유세가 된다. 미친 거지. -91쪽
자식이 부모에게 갖춰야 할 건, 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애틋한 연민이다. -93쪽
결혼날짜 정해 졌다면 알고 있었겠네, 동생도. 그 돈, 형 결혼자금이란 거. 근데 신나한다고. 이런 씨바. 돈, 주지 마. 자기 위해 형의 삶이 통째로 지체되는 걸, 당연할 걸로 치부하는 정도의 싸가지 위해, 당신 인생 유보할 필요, 뭐 있나. 그래봐야 겨우 공부 좀 잘한다는 게 남 밟고 서도 좋단 허가증이라도 되는 줄 안다. -99쪽
존재를 질식하게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100쪽
인류 역사에서 가족이 종교 교리에 버금가는 신성함을 획득하고 사회보편적 가치가 된 것은 바로 그렇게 20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가족이 중요한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족이란 단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신성함은 그렇게 최근에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사회규범은 언제나 그 방향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압력의 도가 결국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질식케 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게 문제다. 가족이라는 규범이라고 해서 거기서 예외일 수는, 결코, 없다.-102쪽
우리는 부모를 욕망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여자와 남자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시각은 불경스럽거나 외람되다. 부모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다. 부모와 자식이 인간 대 인간으로 연민하고 신뢰하는 대등한 동지적 연대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전복 불가능한 절대 위계 위에 가족이 구축된다. 그리고 그 질서에 따라 각자 자신의 고정 배역만 연기한다. 이 질서를 교란하는 건 패륜이다. 패륜, 사람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 본능이 아니라 도리를 지키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자연결속된 생활 결사체이기만 한 것으로 오인되는 가족은 사실은 그렇게 사회적 역할극이다.-107쪽
한국 남자들, 아시아에서 가장 체격 좋고 교육 수준도 세계 톱클래스다. 근데 한 항목이 다 까먹는다. 독립지수. 우리 남자들, 평생 누군가의 아들이다.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탓도 크겠다. 대한민국의 20세기는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때 국가 복지도, 지역 사회도 아닌 오로지 가족이 마지노선이었다. 오로지 비빌 데라곤 가족 밖에 없었던 게다. 가족 구성원 간 과잉 감정은 이 자폐적이고 방어적인 가족주의의 필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요구하며 또 그로 인해 과도하게 상처 받고 실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도 이상의 감정 비용을 지불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바가지를 쓰고 있다고 여긴다. 모두가 모두에게 그렇게 채무관계로 결박되어 있다. -108쪽
명절은 이제 씨족 행사도, 집단 귀향도 아니다. 평소 마땅한 분량의 가족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이 그 죄의식을 탕감받으러 가는 날. 그러니 길이 막혀 다행이다. 차에 갇힌 시간만큼 속죄이 진정성은 입증된다. 도착한 자식들이 부모와 대화의 절반을 얼마나 길이 막혔는지에 소비하고 나머지 절반을 언제 가야 안 막히는지에 쓰는 건 그 번제의 의례다. 명절은 그렇게 죄의식만으로 작동한 지 오래다. 즐거울 리 없다. 명절이 다시 즐거워지는 길은 미풍양속 따위와는 상관없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독립하자. 어른이 되자. 그래서 빚 없는 가족을 만들자. 명절이 즐거워지는 건 그 덤이다. -109쪽
후천적으로 획득한 ‘시누이’ 유전자. 그게 뭐냐. 전통적 의미에서 우리네 고부갈등의 본질은 가부장 가족체제 아래서 육아에서 봉양까지 담당하며 착취당하던 여성들이, 가부장이 취하고 남긴 자투리 권한을 놓고 벌였던 권력투쟁이야. 그리고 그 쟁투에서 승리한 유사가부장-시어머니의 후광 업고 섭정 권력을 후천 학습한 이가 시누이고. 시누이의 가학성은 개인 품성이 아니라 그렇게 권력구조의 소산이라고. 그 구조가 유효한 한 그 가학성은 사회적으로 유전되어 왔고. 시누이는 그래도 되는 법이란 집단유전자가 후천 획득되는 거지. 그러니까 고부 올케시누이 갈등을 개인 품성 문제로 죄다 환원시키는 티브이 아침상담 프로들은 모다 쉣인 거고. 이건 탓해봐야 뭔 소린지도 몰라. 지가 당해보기 전엔. -111쪽
다 큰 어른들이 비루한 자신의 삶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다. 그러니 떠날지 말지는, 그런 기준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라.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택만 하라는 거다. 당신은 지금 한 인간으로서의 바닥을 드러내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이 곧 당신이다. -117쪽
가족 간 문제의 대부분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그런 선이 없다는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120쪽
당신은 이제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야 할 나이다. 만에 하나, 당신이 아무리 요청해도 걱정된다며 당신들이 계속 통장을 쥐고 있겠다면, 그땐 월급이 문제가 아니다. 집, 나오시라. 당신이 지금 위탁 관리하고 있는 건 월급이 아니라 당신 삶 자체니까.-123쪽
당신 삶의 기준은 부모의 기대가 아니라 당신 욕망이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예의로, 기왕이면 그들 기대치를 반영하려고 노력할 순 있다. 하지만 당신, 부모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거 아니다. 자기 인생, 남의 기대를 위해 쓰는 거 아니라고. 그것이 부모라도 마찬가지다.-125쪽
책임질 순 없지만 개입할 순 있다 생각하나. 책임 못지면 권리도 없다. 게다가 형수는 당신 집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당신은 그녀가 당신 집안에 소속될 사람인데 결격 사유가 있어 합류시킬 수 없단 툰데 그녀가 왜 당신 집안에 들어가나. 그녀는 당신 형과 함께 당신 집안과는 별개의 독립적 가족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다. 당신 가족만의 영역에 그녀가 유입되는 게 결코 아니라고.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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