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우산 비룡소의 그림동화 30
사노 요코 글.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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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요코의 책은 100만 번 산 고양이로 처음 만났다. 
이어서 하늘을 나는 사자를 보게 되었는데 어린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감탄할 소재와 결말을 보여주었다.

투박한 그림체는 예쁘다는 느낌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는 표정에서 독자들은 싱긋 웃을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하게 된다.

아저씨 우산의 주인공은 독특한 사람이다.
아주 멋진 우산을 하나 갖고 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지팡이 같다고 묘사했지만,
사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우산이다.
아저씨는 외출할 때면 늘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셨다.

그러나 정작 비가 오면 펼쳐서 쓰지 않고 비에 젖은 채 걷는다.
우산이 젖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빗발이 더 굵어지면 처마 밑에 들어가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린다.
우산이 젖기 때문이다.



서둘러 가야 할 길에는 우산을 꼭 껴안고 뛰었고,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우산 속으로 쏘옥 들어가 신세를 진다.

우산이 젖기 때문이다.

도저히 우산이 젖지 않고는 걸을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외출을 포기한다.

만약 그런 날씨에 우산이 뒤집어지기라도 한다면 아저씨는 얼마나 상심을 하실까.

그럼에도 우비를 입는다든지 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는 평소 입던 그 패션에 모자를 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이 아저씨에게 변화의 기회가 생겼다.

그날도 공원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웬 꼬마 남자 아이가 우산을 씌워달라고 했는데 아저씨는 먼산만 바라보며 못 들은 척 하고 시침 뚝 떼고 만다.

평범한 전개라면 못된 아저씨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다 생각할 텐데, 귀여운 아저씨에게선 그런 반응이 나오질 않는다.



꼬마 아이는 마찬가지로 꼬마 여자 아이가 우산을 씌워주어서 무사히 돌아가는데,
두 아이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아저씨의 관심을 끌어버렸다.

"비가 내리면 또롱 또롱 또로롱

비가 내리면 참방 참방 참-방"

아, 경쾌하다. 일본판에선 의성어를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지만, 국내판 책의 의성어 선택은 참 적절했다.
또롱또롱 또로롱과 참방 참방 참-방의 조화는 대구를 이루면서 리듬감을 준다.

아저씨도 덩달아 소리내어 또롱또롱 또로롱, 참방참방 참-방을 외쳐본다.

그리고 또 호기심이 일었다. 정말일까? 정말 그런 소리가 날까?

그 어떤 거센 비도, 어떤 비바람도, 아저씨의 우산을 펼치지 못했는데,
아이들의 노래 가락이 아저씨의 우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렇게 말이다!



뭔가 대단한 반전이라도 보여줄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우산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아저씨는 어쩌면 처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시원하게 뻗은 우산대가 씩씩해 보이고 활짝 펼쳐진 우산의 천이 팽팽한 긴장감도 느끼게 해준다.

아저씨는 우산을 받쳐 들고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저씨의 멋진, 사랑하는 우산에 비가 뿌려지면서 또롱 또롱 또로롱 소리가 울린다.

아저씨는 신기해졌다. 우산보다 더 멋진 빗소리를 만난 것이다.
이제 신이 난 아저씨는 우산을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했다.

발밑을 보니 참방 참방 참-방 소리도 울린다.
걷는 재미도 무시할 수가 없다!



무수한 우산 속에서 똑같이 우산을 받쳐든 아저씨의 모습이다.
우산을 쓰지 않던 날에는 이렇게 빗속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끼는 우산이 젖는 것을 참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빗소리도 듣고 빗방울 튕기는 소리, 발자국 소리의 음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산의 원래 용도 그대로 사용할 때, 아저씨는 더 멋진 우산과의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산을 든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풍경도, 소리도, 그 차가운 공기의 감촉까지도.

내 안에 가둬둔 우산의 단 하나 가치 말고,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아저씨는 갖게 되었다.

비단 우산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그렇지 않을까.
나 혼자만 지켜보겠다고, 나 혼자만 누리겠다고 꼭꼭 숨기고 있으면 더 깊은, 더 큰, 더 넓은 기쁨을 만나지 못할 수가 있다.
그것이 '나눔'의 미학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우산' 하나에만 집중하더라도 작품은 충분히 즐겁다.
이 엉뚱하고 퉁명스런 아저씨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즐겁지 않은가.



"비에 푹 젖은 우산도 그런대로 괜찮군. 무엇보다 우산다워서 말이야."

맞다! 우산이 아름다울 수 있을 때는 우산다울 때라는 것 말이다.
우리가 우리다울 때 더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 사노 요코의 또 다른 책들이 궁금해진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그에게 있는 듯하다.(아마 여자 작가겠지?)

비오는 날씨를 좋아하진 않지만 빗소리는 좋아하는 나.
그래서 실내에 있을 때 비오는 것을 좋아한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도 요즘에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빗소리.
아저씨 우산이 곧잘 떠오를 것이다.
비가 올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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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08-12-10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책이 너무 많네요. 마노아님을 통해 책나라 여행을 실컷 할 수 있겠어요.

마노아 2008-12-10 09:55   좋아요 0 | URL
제가 고수님들 서재에서 마구 배우고 있지요. 희망찬샘님의 리뷰 올라오는 것 보면서 제가 얼마나 깜딱 놀라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