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CURIOUS 48
신현덕 지음 / 휘슬러 / 2005년 11월
절판


몽골에서 노란색은 신성한 색이므로 여성들은 허리띠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노란색 옷을 입지 못했다.

델은 남녀구별이 없다. 단지 단추의 숫자가 많고 화려한 것이 여성용이고, 단추가 적으며 장식 없이 폭이 넓은 것이 남성용이다.

델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손으로 꼬박 3일쯤 소요된다. 손바느질로 한 땀씩 떠서 만들기 때문에 기계로 한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여물다. -103쪽

가죽 장화는 오른쪽과 왼쪽 신발 모습이 같은 점이 특이하다. 전쟁 중 신발을 갖춰 신고 나가는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구별 없이 만들었다고 한다. -110쪽

몽골인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어의 유르트(yurt)로 소개된 집이다. 몽골인은 기후 여건에 따라 자주 이사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보온이 잘 되는 게르를 주거로 이용해왔다. 게르는 새로 짓거나 다시 조립하는 데 길어야 3시간을 넘지 않는다. 이처럼 게르는 영구성이나 외적으로부터의 보호기능보다 일시적인 추위와 햇빛 그리고 비바람을 차단하는 차양 목적이 주였다. -111쪽

게르를 새로 짓는 것은 새 며느리가 들어와 식구가 늘어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아들이 장성한 집에서는 적당한 신부를 찾기 전에 게르 지을 준비를 서두른다. 신부가 나타나면 곧바로 예식을 올리고 살림을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113쪽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집의 크기를 말할 때 몇 칸짜리인가로 계산했지만 몽골에서는 벽이 몇 개인지에 따라 크기를 따진다. 일반인들은 보통 벽 5개로 게르를 짓는다.-114쪽

게르 안은 난로를 기준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신성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남성은 게르에 들어가면 곧바로 왼쪽으로 가고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남성구역은 하늘이 보호하고 여성구역은 태양이 보살피기 때문이다.

남성구역은 게르의 서쪽으로, 정문에서 보면 왼쪽이다. 이곳 벽에는 주인의 말안장과 고삐, 아이락 주머니 등이 걸려 있다. 주인의 방어용 무기는 이보다 안쪽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둔다. 손님을 우대하는 의미에서 주인의 오른쪽에 앉힌다지만, 여기에는 손님을 가장한 적이 들어왔을 때 오른손잡이인 가장이 방어를 하기 위한 모겆ㄱ도 내포되어 있다. 이 구역에서 접대하는 손님은 남자만을 의미하며, 여자 손님은 여성 구역으로 모신다. 여성구역은 게르의 동쪽 입구에서 볼 때 오른쪽이다. 안주인은 이곳에 주방용구와 생활도구를 비치하며, 아이들도 여기에 기거한다.

주인 내외의 침대는 여성구역의 벽에 붙어 있고 손님용 침대는 반대편 남성구역의 벽 쪽이다.-116쪽

게르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안팎 어디를 둘러 봐도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다.


화장실에 간다는 표현도 재미있는데 "말(馬)을 본다"고 한다. 예전부터 말은 대부분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럿이 말떼 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볼 때 주위 사람에게 건넬 말이 없어 "말이나 보자"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이다. -119쪽

철저히 개방된 공간에서의 성생활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 3대가 6~7평의 한 공간에서 살다보면 성에 대한 개념도 무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 풍습이 몽솔 사회의 개방과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몽골이 여타 공산국가보다 쉽게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방된 성 문화를 비롯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21쪽

몽골인의 성 풍속만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 말을 아무하고나 의미 없는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몽골인은 알려진 것보다 더 완고하고 합리적이다. 그들은 사랑도 가문의 유지와 종족의 번영을 위한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121쪽

학자들에 따르면 에스키모와 몽골인은 근친혼의 폐해를 경험으로 배워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장애아로 태어나거나 열성유전인자가 쉽게 발현된다. 그래서 이들은 늘 혈통이 근접한 사람과의 혼인을 피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다. 결혼 상대자로는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부족을 선택하려 했다.



아내를 외간 남자와 동침케 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손님을 맞은 씨족장은 회의를 개최하여 전체 구성원의 의사를 물었다. 남자의 지적 수준 및 외모와 됨됨이를 보고 동침 여부를 결정했다. 지적 수준이 우선적인 선택 요건이 되자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공산혁명 이전 몽골에서는 승려들이 새 신부들의 초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신부가 첫날밤을 승려와 보내는 것이다. 당시 지식인 계층은 승려뿐이라 그들이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우수한 혈통을 이어받기 위해 이런 풍습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아이는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자식으로 키웠다.-123쪽

일부 지방에서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출타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떠난다. 아내에게 자유 시간을 허락하는 묵시적인 방법이다. 남편은 가문에 좋은 씨가 들어온다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느긋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아내가 쾌락을 목적으로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해도 용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출산 이외의 목적으로 간음한 자는 예부터 법으로 엄히 다스려 왔다. 칭기즈칸 시대 이후 시행된 법에 따르면 평민이 왕공의 부인과 간음하면 전 재산을 몰수하고 두 사람 모두 노예로 만들었다. 평민끼리 간통하면 가축 300마리와 귀중품 30개의 재산형에 처했다.
공식적으로 몽골인의 이러한 성 문화는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비 지방 혹은 북서부 산악지대 등 일부에서는 여전히 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 한다.-125쪽

몽골인은 친족에 의한 혈족은 인정하면서도 인척관계로 생긴 혈족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시에 두 명의 자매와도 혼인이 가능했다. 유목민의 이러한 풍습은 우리 역사에도 있다. 고려 초기 임금이 자매와 결혼한 경우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자는 자기가 현세에서 섬긴 자를 사후에도 섬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모가 아닌 과부는 재혼하지 않고 막내아들의 아내가 되었다. 몽골인은 막내상속을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후처 중에는 나이가 아주 어린 경우도 있어 막내에게 가는 것이 오랫동안 보살핌을 받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시간이 적었던 막내에게 아버지의 사랑 대신 그의 사랑하는 여인과 물질로 대신한다는 뜻도 있다. -127쪽

신부들이 하던 화장술의 하나인 연지곤지는 우리에게도 전해져 전통혼례에서는 자주 쓰인다. 부녀자들이 가슴에 차던 은장도와 족두리, 원삼도 몽골에서 유래된 것이다.

몽골족의 결혼은 우리 상식에 견주어보면 대체로 조혼이다. 과거에는 10살 이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칭기즈칸도 아홉살 때 한살 연상의 여인이었던 웅기라드족 데이 세첸의 딸 부르테와 결혼했다.

우리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26.8세(2001년말 기준 남 29.6세)인데 반해 몽골은 15~16세에도 결혼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18세로 제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더 어린 경우가 많다. 여자 나이 스무 살이면 벌써 아이를 두세 명씩 낳는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생활에 대한 감각은 우리 나라 여성들보다 더 현실적이다.

유의할 것은 몽골인과 중국인의 결혼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법으로 아예 금지시킨 적도 있었다.-130쪽

몽골 국민의 90% 이상이 라마불교를 믿는다. 불교는 몽골인에게 종교라기보다 생활의 일부로, 이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셔놓고 지낼 정도로 적극적인 신도들이다. 한때는 국교로서 강요되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여전히 불교만을 믿는다.

몽골인은 것든 것은 부처를 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일은 부처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승려가 관장했다. 왕에서부터 말단까지 지배계층은 모두 승려였다. -138쪽

몽골인이 최초로 라마교를 받아들인 것은 원나라 태종 오고타이 때다.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 전역을 점령하고 티베트를 손에 넣었을 당시 라마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파스파를 초청하였다. 그는 몽골불교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티베트어를 차용해 최초의 몽골 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족의 사나운 기질을 완화하기 위해 라마교를 정책적으로 권장했고, 맏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라마승을 만들도록 법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인구가 격감하자 몽골 공산당은 1921년 혁명 후 라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과 정부가 종교를 장악했지만 일반인의 신앙 생활만은 허용했다.


개방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몽골로 몰려들었다.-139쪽

몽골인은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인정하지만 민족적 자부심에서는 늘 자신들이 앞선다고 말한다. 특히 몽골인은 21세기 초 우리나라 종교인들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중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의 방문을 허용했던 것이다. 2002년 11월 몽골 정부는 달라이 마라의 방문과 설교를 허용해 중국정부와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다. 중국은 티베트 독립을 꾀하는 정치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를 경계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 정부는 종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지 정치 지도자나 군사지도자로서의 입국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며 중국에 당당히 맞섰다. 달라이 라마가 몽골에 입국했던 것은 4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인이었고 몽골에 머물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국도 이 사실을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그의 입국을 허용할까 두려워 선수를 쳤던 것이다.
-141쪽

한편 우리나라는 여전히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미국, 독일, 대만, 몽골 등지를 다니면서 깊은 정신세계의 진수를 가르치는데도 우리나라는 그의 입국을 허용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국민의 사랑을 받는데 그를 한국 땅에서 보기가 이리 어려운가. 미국에는 할말을 한다면서도, 한때 한국을 침공해 '중공 오랑캐'라 불렸던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다소 모순적이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에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3대 쇠남 갸초가 몽골 지도자였던 칸을 방문했을 때 받은 칭호가 굳어진 것이다. 몽골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이름이 '바다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종교지도자도 그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141쪽

몽골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무당이다. 공산시절에는 국가가 무당을 모두 없앴으나 자유화 이후 다시 생겨나는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무당들이 외부에서 신을 불러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몽골 무당은 자신의 영혼을 몸 밖으로 내보낸다. -142쪽

몽골 초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은 '어버', 즉 성황당이다. 성황당은 미신을 억압했던 공산주의 시절에도 폐기되지 않고 전해질 만큼 몽골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 몽골인은 학식, 사회적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수시로 성황당을 찾아가고, 어디에서나 성황당을 만나면 예의를 갖춘다. 성황당은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143쪽

몽골인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한 번만 요리한다. 전쟁에 대비한 조상들의 습관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몽골 요리사들은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려면 많은 재료가 필요하므로 현지에서 약탈을 일삼게 되는 상황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아침과 점심에는 차와 밀가루 튀김과자로 요기만 한다. 저녁에는 고기와 국수를 비롯해 쌀, 귀리 등 곡물이 든 묽은 죽을 곁들여 제대로 챙겨 먹는다. -152쪽

'순한 양'이라는 말을 몽골인이 양을 잡는걸 보고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 살 의지를 잃은 양은 죽어가면서도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사지만 잠깐 버둥거리다 만다. 시간은 고작 5~6분이 걸릴 뿐이다.
양이 죽으면 가죽을 가슴팍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 땅 위에 쫙 펼쳐 놓고 깔개로 사용한다. 우선 내장을 꺼내 큰 그릇에 담고 흘러나온 피는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는 머리, 갈비, 다리, 엉덩이, 가슴팍, 어깨 부분을 따로 갈라내면 작업은 끝난다. 이 모든 과정은 길어야 30분을 넘지 않는다. 또한 피는 한 방울도 땅에 흘리지 않는다. 식량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짐승으로부터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배고픈 맹수와 맹금류가 피 냄새를 맡으면 사난ㅇ눠져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또 피 냄새는 다른 냄새보다 멀리 퍼져 나가므로, 전장에서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목숨을 잃기 때문이기도 하다.-153쪽

몽골인의 주식은 고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들은 서구인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몽골인은 주로 젖을 섭취하며 고기는 부족한 젖을 보완하는 수준이다. 유목을 하는 몽골의 고기 생산량이나 육질이 목축을 하는 서구 국가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닭고기 값은 쇠고기의 5배, 돼지고기는 3배정도로 비싸다. 고기값이 비싼 것은 이들 가축이 사료를 먹기 때문이다.

몽골인은 죽은 가축의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 -155쪽

개고기와 새는 먹지 않는다.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산야에 내다 버리는 풍장이 있었으므로, 이때 조상의 시신을 들개가 뜯고 새들이 쪼아 먹었기 때문이라 한다. 국가 문양에 물고기를 그려 놓을 만큼 신성시하기 때문에 생선도 먹지 않는다.

기온이 낮은 겨울을 이겨내려면 고칼로리 음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몽골인은 우리는 먹을 수 없을 정도의 비계 덩어리를 가장 좋은 고기로 친다. -156쪽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유제품은 아이락이다. 말젖을 가죽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휘저으면 아이락이 된다.
몽골인은 여름밤 내내 아이락을 젖는다. 게르 문 옆에다 가죽부대나 젖통을 놓아두고 오가면서 습관 삼아 나무 막대기로 휘휘 저어준다. -157쪽

아이락은 마유주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인들이 알코올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만을 강조하여 번역한 것이며, 실제로 몽골인은 아이락을 전혀 술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이락에는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한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두세 잔 마시면 취기가 오르기 보다는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 정도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대용이자 최고의 영양식으로서 몽골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 사람당 매일 3~5리터의 아이락을 마신다. 허약한 아이에게는 아이락을 끊임없이 마시게 한다. 또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중증 환자에게도 아이락을 먹인다. 아이락은 비타민 A.C.B 등을 포함하고 있고 병원체미생물의 성장과 증식을 억제한다. 아이락은 특히 폐나 위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작용을 활성화 한다. 더불어 식욕과 소화력을 증진시킨다. -159쪽

소나 양, 염소 젖으로 만든 '타라크(요구르트)'는 발효식품이다.


필요한 비타민은 유제품과 날고기를 섭취해 보충하므로 몽골 요리에서 야채는 비교적 적게 사용된다. 야채는 동물들이나 뜯는 목초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몽골인은 양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몽골인 요리에는 간장보다는 소금을 많이 사용해 별다른 맛을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기후가 건조한 탓에 음식을 매우 짜게 먹는다. 몽골 정부는 수돗물에도 의무적ㅇ로 요오드를 포함시켜 국민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161쪽

건조기법으로 만든 음식으로 봄여름에 먹는 보르츠라는 고기가루가 있다. 보르츠는 가축들이 살찌는 가을에 잡은 고기로 만든다. 주로 쇠고기로 만들며, 살코기의 결을 따라 찢은 뒤 그늘에서 말린다.

보르츠는 소의 위나 오줌보를 깨끗이 씻어 그 안에다 보관한다. 이것들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춘 최상의 자연 저장고이므로, 해가 바뀌어도 고기가루가 상하지 않는다.

보르츠를 뜨거운 물에 서너 숟가락 퍼 넣고 2~3분 기다리면 훌륭한 영양식이 된다. 외국에 가는 몽골인은 반드시 보르츠를 한 봉지씩 가지고 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이것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170쪽

수테 차를 만들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소금을 넣는 일이다. 찝찔한 맛이 나지만 몽골고원에서는 염분 보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후가 건조해 몸에서 수분이 자주 발산되므로 몸속의 염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175쪽

손님이 오면 주인은 술이기 보다 음료에 가까운 아이락을 먼저 내놓는다. 아이락으로 기분이 조금 얼큰해진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상통하면 아르히를 마시기 시작한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는 만취하는 것이 에의다. 그래서인지 만취해서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다.-176쪽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몽골인은 늘 차강사르(설날)처럼 풍요롭기를 기원한다. -181쪽

몽골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과 십간십이지를 사용한다.

양의 해에는 좋은 일이 생기며가정이 화목해진다. 닭의 해에는 살림이 풍요로워지고 출산율이 큭 ㅔ늘어난다. 돼지해에는 음식 저장량이 크게 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183쪽

소련은 1921년 공산혁명 이후 몽골의 많은 전통 세시풍속을 없애면서 서구식 신년을 강요했다.

젊은이들은 소련의 본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세시풍습에는 민족의 전통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풍습을 바꾸면 민중의 의식과 사고에도 변화가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소련은 몽골인의 민족혼을 말살하거나 국민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 몽골 전래 풍습을 없애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몽골에서 신년은 서양풍속의 하나일 뿐이다. 이 날 모든 관공서는 휴무이다.-185쪽

몽골인이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매년 음력 1월 1일은 거창하다. 3일간 모든 고나공서와 직장이 문을 닫고 집 안에서 식구끼리 지낸다. 한달 전부터 이날을 준비하느라 온 국민들이 분주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날에는 전 갖고이 모여 세배하고 성황당에 참배하는 등 새해맞이를 한다. 덕담도 어느 때보다 많이 주고 받으며 음식도 풍성한 명실공히 몽골 최대의 명절이다.

몽골 음력설의 역사는 쿠빌라이 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며 한족으로부터 음력설을 도입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어른들로부터 세뱃돈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몽골에서는 아래사삶이 웃어른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랫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관례다. 어른들이 준비하는 선물로는 초콜릿, 사탕, 학용품, 장갑부터 때로는 새로 나온 빳빳한 지폐 몇 장까지 다양하다. 또한 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문간에서 하나씩 선물을 나눠준다. 통상 유제품을 싸주는데, 이는 세배를 갈 때 싸갔던 것 중 먹고 남은 것이다. -187쪽

6월 1일은 어린이날이다. 몽골에서는 이때가 되어야 겨우 나뭇잎도 제대로 피고, 어린이들이 밖에서 놀기 좋은 계절이 시작된다. 몽골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모든 관공서와 기업이 휴무한다. -193쪽

몽골 세시풍속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이 가축의 거세다. 이 일은 유목민들이 가축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봄마다 하는 연례행사다. 지난해 태어난 수놈 중 좋은 종자를 제외하고 모두 거세하여 무차별적인 생식을 막는다. 또한 거세를 하면 발리 자라고 먹이를 적게 먹으며 온순해진다고 한다. -194쪽

몽골에서는 나담이 치러지는 매년 7월 11,12,13일에 국갖거인 축제를 벌인다. 나담은 '에른 고른 나담 (남성 3종 경기, 즉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의 준말로 '남성축제'라는 뜻이다. 나담은 원래 '놀다'라는 뜻의 몽골어 '나다흐'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몽골인은 경기의 의미보다는 놀이의 의미로 나담을 즐겼다. 이날은 또한 몽골 인민혁명 기념일이기도 하다. -195쪽

나담의 하이라이트인 씨름은 최고의 인기종목이다. 몽골에서 씨름의 인기는 캐나다의 아이스하키, 미국의 야구, 독일의 축구, 스페인의 투우 인기를 능가한다. 씨름 경기는 나담 축제의 첫째, 둘째 날에 벌어진다. 울란바토르 스타디움에는 전국에서 예선을 거친 512명의 선수가 참가해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진다.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예선을 치른다. 이들 중 9회 동안 연승한 선수가 우승자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 타이틀 보유자나 최다승으로 지목받은 선수는 3회전부터 매회마다 경기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비교적 쉽게 경기를 치를 수 있다. -196쪽

몽골 씨름에는 체급 구분과 경기시간 제한이 없다. 선수들은 최선의 방법으로 상대선수를 물리치면 그만이다. 우리나라 씨름처럼 샅바를 잡지 않고 서서 경기를 시작한다. 경기가 시작 후 상대방의 무릎이나 팔꿈치 등을 땅에 먼저 닿게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198쪽

활쏘기는 나담에서 두 번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종목이다.

몽골인은 활을 쏠 때 과녁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멀리 날아간 쪽을 선호한다. 물론 명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녁에 못 미치는 화살은 궁수의 약한 힘을 드러내므로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궁술시합에는 남녀노소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사수들은 꼭 몽골 전통복인 델을 입고 수술이 달린 모자를 써야만 한다.-199쪽

나담 마지막 날에는 시상식이 거행되며 이날의 주요 경기는 말달리기 시합이다. 4~7세읭 ㅓ린 기수들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최장 약 30킬로미터를 달린다.

이밖에도 매년 3월 8일은 몽골의 여성축제일이다. 몽골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인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펼친다.-202쪽

몽골 여행의 진수는 철도편을 이용해 느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인천에서 천진행 여객선을 타고 각서 북경-유라시아 간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기차 속에서 만리장성 너머의 중국을 보는 맛도 추천할 만하다.

몽골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승마와 승마여행이다.-212쪽

몽골을 여행하면서 주의할 것은 공룡알 들의 자연유물을 절대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몽골 정부는 몽골의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유물은 물론이고 가공되지 않은 동물 뼈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녹용 등의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고비에서 주운 돌멩이 하나, 작은 나무 가지 등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단, 공항이나 백화점 선물가게 등에서 구입한 선물은 인정된다.-216쪽

자본주의 사회와 70년이나 격리되었던 몽골에서는 영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에는 라마승과 극히 일부의 지식인만이 몽골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 당시 각 종족별로 언어가 달라 몽골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여러 개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몽골 정부는 1921년 공산혁명 이후 국가 통합을 위한 각종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정책적으로는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국민들의 의사와 사고를 통합하는 데는 늘 언어장애가 뒤따랐다. 1940년 몽골 총인구 74만 3800명 중 문자를 깨우친 사람은 5% 미만이었다. 1946년 몽골이 러시아 문자르 ㄹ빌려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상황은 변했다. 러시아의 지원으로 의무교육을 강화해 문맹률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1990년 민주화의 상징으로 러시아 문자를 폐지하고 옛 몽골 문자를 부활시켜 공식문자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많은 지식인들은 옛 몽골 문자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전 국민의 80% 이상을 문맹으로 만들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민주화 세력을 눌러 현재 몽골에서는 러시아 문자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217쪽

고비 지역은 우리에게 사막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고비'는 '황무지'라는 뜻의 몽골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지형의 사막은 3%에 불과하다. 연중 6개월 이상 눈이 쌓여 있어 무성하지는 않지만 풀과 나무가 자라며 야생동물도 뛰어다닌다. -223쪽

아라비아의 낙타는 혹이 하나인데 반해 고비낙타는 둘이라서 혹 속의 지방질로 열악한 환경에서 잘 견딜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살아서는 젖을 짜기도 하고 운송수단으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낙타젖은 진하고 끈기가 있으며 영양분이 풍부해 최고 품질로 선호된다. 낙타털로 만든 캐시미어 실은 양모와 염소털실보다 4~5배나 비싸다. 값도 비싸지만 털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다. 낙타 고기도 고비에서만 맛볼 수 있다. -226쪽

극북 히스테리아-극지방과 그 주변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옷을 찢는 등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급격히 우울해지거나 정신을 잃기도 한다. 단조로운 기후와 고립된 환경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234쪽

옛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하라호름(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카라코름으로 소개됨)은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으브르항가이 아이막에 속해 있다. -238쪽

성곽 안에는 황제들의 집무실이었던 게르 터가 남아 있다. 황제들은 요란하게 치장된 건물이 아닌 일반 국민들과 같은 게르에서 살았다. 다만 왕의 게르는 일반 백성들이 구하기 어려운 호랑이나 사자 등의 가죽으로 실내를 장식했을 뿐이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몽골 국민들은 가족 같은 유대와 계급차별 없는 공정한 통치 아래서 살았다.

이곳은 북경으로 옮겨 갈 때까지 148년간 수도로 사용됐다. 그 후 200년간 퇴락을 거듭해 이제는 주민이 한 사람도 살지 않는다.

몽골의 성은 방어용이 아니라 공격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특이하게도 성이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처음 접하는 관광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 성들은 산이나 언덕 등을 끼고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다.-239쪽

바로 여기서 몽골인의 전술을 알 수 있다. 적들과 지구전이나 방어전을 치르다보면 숫자가 적은 몽골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몽골인은 공격 전술을 채택한 것이다. 적이 침공해 오면 좁은 성벽에서 맞붙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곳으로 유도해 전열을 정비한 뒤, 전격전으로 맞섰다. 몽골인들은 당시로선 가장 강한 무기와 기동력을 가졌다. 말은 지금의 탱크처럼 위력적이어서 보병 위주의 군대는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화력이 우세한 군은 언제나 노출된 싸움을 원한다. 그래서 적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 유리하고 기마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넓은 초원 한가운데 하라호름 성을 구축했던 것이다.-241쪽

하라호름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두 번 놀란다. 첫째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제국의 첫 수도였던 하라호름 성이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윈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오스트리아의 쇤부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과 비교해도 형편없다. 유럽의 성은 외국에서 잡아온 포로를 이용해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투입한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하짐나 몽골인은 으리으리한 성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유목민의 기질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사는 데 집착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전리품이 전무한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유라시아 지역을 점령하여 많은 것을 약탈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라호름 성에는 만주족이 보낸 궁궐을 방비하기 위한 나무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몽골 군인들은 점령지에서 약탈하는 병사들을 즉석에서 참수했다. 엄정한 군기확립과 싸움에만 관심이 있었지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예상 밖의 전리품이 생기면 부하들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몽골인의 전통이었다.-247쪽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실자 발음은 울란바아타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다.-249쪽

몽골의 사회학자들은 사회가 국민의 생활을 보장하고 노후까지 책임지는 칭기즈칸의 정신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을 든다. 레닌은 몽골족의 핏줄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몽골족의 생활방식을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몽골족인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에서 공동생산, 소유 및 분배의 정의와 인간다운 삶에 대해 감화를 받고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더불어 1921년의 몽골 공산혁명이 거부감 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259쪽

몽골처럼 교육열이 높은 국가도 찾기 힘들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문맹률은 비교적 낮다.
-264쪽

전통적으로 몽골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돈과 명예는 순간적이지만 인간적인 덕망과 지혜는 영원하다는 것을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가장 강성해 중국을 지배하던 때부터 몽골인은 학문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한 집안에서 한 명 이상의 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학자는 승려였으므로, 당연히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승려들이 정치, 학문, 의술은 물론 예술분야까지도 이끌어 갔으며 이들은 전쟁보다 평화를 주장했고, 약탈보다는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그 결과 몽골군의 군사력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265쪽

서구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조차도 몽골을 망한 나라라고 여긴다. 원나라의 강성했던 힘은 사라지고 이제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골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강점했던 중국을 한족에게 돌려주고, 약탈했던 러시아 땅을 러시아인들에게 반환했을 뿐이다. 옛날 강성했던 터키, 로마,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도 몽골처럼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오늘과 같은 국가르 ㄹ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망했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몽골에 대해서만은 유독 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마도 현재 경제적으로 빈곤해서, 즉 일반적인 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보유하고 있는 달러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몽골이 가난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원나라가 무너지고 공산혁명이 일어났어도 행복한 삶을 누려왔다. 몽골인은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예절을 찾고, 남을 위하며, 관용을 베풀 줄 안다. 몽골인은 지식인들의 덕목으로 꼽히는 관용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어느 민족보다도 충실히 실천해 나가고 있다.-268쪽

영주권은 아직 쉽게 얻기 힘들다. 몽골인구가 너무 적어 영주권을 쉽게 주면 중국인이 몰려와 내몽고처럼 중국에 예속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281쪽

과거 소련은 몽골에 산업시설을 배치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몽골에는 공업제품을 생산하깅 ㅟ한 기반시설이 취약했다. -281쪽

술을 마실 때는 지대가 높다는 점을 감안해 적당히 마시는 것이 좋다. 고지대에서는 쉽게 취하기 때문이다.-288쪽

많은 몽골인은 중국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깝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신상에 유리하다. 몽골인과 중국인의 어색한 관계는 역사적인 경쟁의식과 내몽고를 강탈해간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인해전술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중국과의 거래는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13억이 넘는 인구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은 대단하다. 내몽고의 몽골인은 300만 명이지만 중국의 최대 민족인 한족은 2000만 명에 가깝다. 이제는 힘으로나 국민투표로나 어느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내몽고를 되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져 몽골인들은 이에 분해하고 있다. -291쪽

해도 되는 것!

-모자를 쓰고 있으면 게르에 들어갈 때 그대로 쓰고 있어도 무방하다. 인사를 할 때는 모자를 약간 들어올리면 된다.
-음식 선물 등 물건을 주고 받을 때는 양손이나 부득이할 경우 오른손을 사용하며, 걷어 올린 소매는 내린다.
-악수할 때는 아무리 추워도 장갑을 벗는다.
-게르 안에서 움직일 때는 시계 방향으로 이동한다.
-차나 음식은 조금씩 마시거나 뜯어 먹는다.
-물건을 받을 때는 두 손을 모아 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다.
-몽골인의 발을 밟았을 때는 상대방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바닥에 앉을 때 무릎을 꿇어도 된다.
-초대받았을 때 작은 선물이나 적은 현금을 놓고 오는 것이 좋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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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08-08-2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나요? 예전에 몽골에 갔던 기억이 나면서 왠지 읽고 싶어지네요.
아, 잠시 읽어보니 다시 가보고 싶어지네요!

마노아 2008-08-27 17:52   좋아요 0 | URL
아악, 감은빛님! 몽골에 다녀오셨다구요! 만세!
제가 몽골에 대해서 공부할 일이 생겼거든요. 질문 생기면 달려갈게요^^
이 책 괜찮았어요. 아주 환상적으로 좋지는 않더라도 편안하게 유익했어요^^

감은빛 2008-08-2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갖다 오긴 했지만 아주 잠시였거든요.
8일이었던가 9일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별로 도움이 안될 게 확실하지만,
혹 모르는 일이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알려주세요!
근데, 몽골에 대해 공부할 일이 생겼다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요. ^^

마노아 2008-08-28 16:10   좋아요 0 | URL
헤헤, 공부할 일이 드물게(?) 생기더라구요^^;;;
아직은 좀 막연한데, 궁금한 것 생기면 꼭 물어볼게요.
와, 그 멀리까지 다녀오시공... 대단대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