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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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짐에 대하여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 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리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리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20쪽

감자를 씻으며

흙 묻은 감자를 씻을 때는
하나하나씩 따로 씻지 않고 한꺼번에 다 같이 씻는다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감자를 전부 다 넣고
팔로 힘껏 저으면
감자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면서 흙이 씻겨 나간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흙 묻은 감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과 같다
나는 오늘도 물을 가득 채운 통 속에
내 죄의 감자를 한꺼번에 다 집어 넣고 씻는다
내 사랑에 묻어 있는 죄의 흙을 제대로 씻기 위해서는
죄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게 해야 한다
흙 묻은 감자처럼
서로의 죄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위해서는-46쪽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 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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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10-25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여자가 쓴 시들 같아요. 하나같이 맘에 와 닿아서요

마노아 2007-10-25 09:56   좋아요 0 | URL
시인의 감수성이 여자의 느낌이 닿아 있죠. 저도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