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간디학교1)
"오늘은 쉽니다."
교무실 문에 이렇게 써 붙여놓고 선생님들 다 도망갔다.
남의 교실에 들어가 시치미 떼기, 선생님 앞에서 싸우다가 의자 집어 던지고 나가기, 우리가 음모 꾸미는 사이에
한발 앞서 선생님들 다 도망갔다. -14쪽
스승의 날 (간디학교2)
아이들은 선생님을 쌤이라 부른다. 아이들은 그날 쌤들에게 드릴 김밥을 쌌다.
밥을 너무 많이 넣어 뚱뚱한 김밥 단무지를 빠뜨려 싱거운 김밥 옆구리 터진 김밥
아이들이 등 떠밀어서 쌤들은 도시락 하나씩 들고 소풍을 갔다.
따스한 봄볕이 다 모인다는 다볕당 앞뜰에서 쌤들은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을 먹었다.-15쪽
한근이 (간디학교8)
말이 느리면 행동도 느리고 생각도 느리다고 한근이를 놀립니다.
말이 빨라서 행동도 빠르고 생각도 빠른 친구들이 놀립니다.
느린 대신에 바위처럼 생각이 무거운 한근이는 그저 웃습니다.-26쪽
기숙사 (간디학교9)
백혈병 치료 중인 아이가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여럿이 가슴 아파하며 울더니
문득, 청란이 머리를 깎았다. 안 그래도 작고 귀여운 청란이 동자승처럼 더 맑아졌다.
다음날 친구들하고 목욕탕 가서 목욕하고 나와 옷 입기 전 할머니 한 분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어느 절에서 오셨어요? 청란이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기숙‘사’에서 왔습니다. -27쪽
시 읽어 줄까 (간디학교16)
-시 읽어 줄게 얘들아. -시 읽어 줄게 얘들아. 아침 조회 시간마다 우리 선생님 우리를 귀찮게 하신다.
싫다고 하면 슬퍼하시고, 좋다고 하면 우리 마음하고 저렇게 잘 맞을까 싶은 시들만 골라 읽어 주신다.
-오늘은 내가 쓴 신데 들어 볼래? 이런 날은 우리가 시의 주인공이 된다. 선생님은 일부러 야단치지 않아도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으면 스스로 잘하리라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40쪽
불 끈다
우리 집 방충망에 달라붙은 매미, 풍뎅이, 태극나방, 사마귀야
안녕, 우리 집 이제 불 끈다.-46쪽
봄비 그친 뒤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 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51쪽
사랑
우산을 같이 씁니다. 동무 어깨가 내 어깨에 닿습니다.
내 왼쪽 어깨와 동무 오른쪽 어깨가 따스하게 서로 만납니다.
우리 바깥쪽 어깨는 사이좋게 비에 젖고 있습니다.-52쪽
한 여름 소나기
저 멀리서 울 때는 바람에 마른 잎 구르는 소리 같았다.
옆집 마당에 왔을 때는 급하게 달리는 수십 마리 말 발굽 소리 같았다.
우리 집 마당에 닥쳐서는 하늘까지 컴컴해지고, 하늘이 마른땅에 대고 큰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빨래 걷을 틈도 주지 않고 금세 또 옆집으로 옮겨 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64쪽
똥
풀 뜯는 소가 똥 눈다.
긴 꼬리 쳐들고 푸짐하게 똥 눈다.
누가 보든 말든 꼿꼿이 서서 푸짐하게 똥 눈다.
먹으면서 똥 눈다. -86쪽
잠자리 쉼터
손을 쭉 뻗어 검지를 하늘 가운데 세웠더니 잠자리가 앉았습니다.
내 손가락이 잠자리 쉼터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가 되었습니다.-89쪽
고래의 죽음
먼 나라 바닷가 모래밭에 몸무게 십 톤인 범고래 한 마리가 스스로 올라왔습니다.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몸뚱이가 바싹바싹 타들어 갔습니다. 숨도 점점 가빠졌습니다. 그러나 고래는 무슨 까닭인지 꼼짝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죽으려는 작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연락을 받은 동물 보호 단체 사람들까지 멀리서 달려왔습니다. 불나면 줄지어 서서 양동이로 물을 뿌리듯 말라 가는 고래 몸뚱이에 바닷물을 뿌려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십 톤이나 되는 무게를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래의 몸은 더욱 바싹 말라 가고 숨쉬기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두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을 것 같았습니다.-90쪽
이때 한 사람이 생각을 내놓았습니다. 고래의 생각도 아니고, 갈매기의 생각도 아니고, 동물 보호 단체에서 온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고래 몸에 폭탄을 달아서 폭파하자는 거였습니다. 천천히 오래가는 아픔을 큰 아픔 한 번으로 끝내자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걸 안락사라 했습니다. 조금 뒤, 큰 폭발이 있었습니다. 바다 저 멀리까지 소리가 퍼져 나갔습니다. 멀리서 다른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습니다. 모래밭은 온통 붉을 대로 붉어졌습니다.-91쪽
지렁이
시멘트 길 위에서 어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지렁이 몇 마리가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고 뜨거운 햇살에 몸이 타고 있다.
나도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저럴 거라는 생각에 징그러운 줄 모르고 길가 풀숲 촉촉한 흙 위로 가만히 옮겨 주었다. -98쪽
다모
네 이름 뜻을 누가 묻거든 뜻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하렴.
다모야!
세상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을 만나서도 첫 느낌을 늘 기억해라.-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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