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요 선생님 - 남호섭 동시집
남호섭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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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간디학교1)

"오늘은 쉽니다."

교무실 문에 이렇게 써 붙여놓고
선생님들 다 도망갔다.

남의 교실에 들어가 시치미 떼기,
선생님 앞에서 싸우다가
의자 집어 던지고 나가기,
우리가 음모 꾸미는 사이에

한발 앞서
선생님들 다 도망갔다.
-14쪽

스승의 날
(간디학교2)

아이들은 선생님을 쌤이라 부른다.
아이들은 그날 쌤들에게 드릴 김밥을 쌌다.

밥을 너무 많이 넣어 뚱뚱한 김밥
단무지를 빠뜨려 싱거운 김밥
옆구리 터진 김밥

아이들이 등 떠밀어서
쌤들은 도시락 하나씩 들고
소풍을 갔다.

따스한 봄볕이 다 모인다는 다볕당 앞뜰에서
쌤들은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을 먹었다.-15쪽

한근이
(간디학교8)

말이 느리면
행동도 느리고 생각도 느리다고
한근이를 놀립니다.

말이 빨라서
행동도 빠르고 생각도 빠른
친구들이 놀립니다.

느린 대신에
바위처럼 생각이 무거운
한근이는 그저 웃습니다.-26쪽

기숙사
(간디학교9)

백혈병 치료 중인 아이가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여럿이 가슴 아파하며 울더니

문득, 청란이 머리를 깎았다.
안 그래도 작고 귀여운 청란이
동자승처럼 더 맑아졌다.

다음날 친구들하고 목욕탕 가서
목욕하고 나와 옷 입기 전
할머니 한 분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어느 절에서 오셨어요?
청란이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기숙‘사’에서 왔습니다.
-27쪽

시 읽어 줄까
(간디학교16)

-시 읽어 줄게 얘들아.
-시 읽어 줄게 얘들아.
아침 조회 시간마다 우리 선생님
우리를 귀찮게 하신다.

싫다고 하면 슬퍼하시고,
좋다고 하면 우리 마음하고
저렇게 잘 맞을까 싶은
시들만 골라 읽어 주신다.

-오늘은 내가 쓴 신데 들어 볼래?
이런 날은 우리가 시의 주인공이 된다.
선생님은 일부러 야단치지 않아도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으면
스스로 잘하리라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40쪽

불 끈다

우리 집 방충망에
달라붙은
매미, 풍뎅이, 태극나방, 사마귀야

안녕,
우리 집 이제
불 끈다.-46쪽

봄비 그친 뒤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 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51쪽

사랑

우산을 같이 씁니다.
동무 어깨가
내 어깨에 닿습니다.

내 왼쪽 어깨와
동무 오른쪽 어깨가
따스하게 서로 만납니다.

우리 바깥쪽 어깨는
사이좋게 비에 젖고 있습니다.-52쪽

한 여름 소나기

저 멀리서 울 때는
바람에 마른 잎 구르는 소리 같았다.

옆집 마당에 왔을 때는
급하게 달리는 수십 마리
말 발굽 소리 같았다.

우리 집 마당에 닥쳐서는
하늘까지 컴컴해지고,
하늘이 마른땅에 대고
큰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빨래 걷을 틈도 주지 않고
금세 또 옆집으로 옮겨 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64쪽



풀 뜯는 소가 똥 눈다.

긴 꼬리 쳐들고
푸짐하게 똥 눈다.

누가 보든 말든
꼿꼿이 서서
푸짐하게 똥 눈다.

먹으면서 똥 눈다.
-86쪽

잠자리 쉼터

손을 쭉 뻗어
검지를
하늘 가운데 세웠더니
잠자리가 앉았습니다.

내 손가락이
잠자리 쉼터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가 되었습니다.-89쪽

고래의 죽음

먼 나라 바닷가 모래밭에 몸무게 십 톤인 범고래 한 마리가 스스로 올라왔습니다.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몸뚱이가 바싹바싹 타들어 갔습니다. 숨도 점점 가빠졌습니다. 그러나 고래는 무슨 까닭인지 꼼짝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죽으려는 작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놀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연락을 받은 동물 보호 단체 사람들까지 멀리서 달려왔습니다. 불나면 줄지어 서서 양동이로 물을 뿌리듯 말라 가는 고래 몸뚱이에 바닷물을 뿌려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래를 바다로 밀어 넣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십 톤이나 되는 무게를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고래의 몸은 더욱 바싹 말라 가고 숨쉬기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두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을 것 같았습니다.-90쪽

이때 한 사람이 생각을 내놓았습니다. 고래의 생각도 아니고, 갈매기의 생각도 아니고, 동물 보호 단체에서 온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고래 몸에 폭탄을 달아서 폭파하자는 거였습니다. 천천히 오래가는 아픔을 큰 아픔 한 번으로 끝내자는 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걸 안락사라 했습니다. 조금 뒤, 큰 폭발이 있었습니다. 바다 저 멀리까지 소리가 퍼져 나갔습니다. 멀리서 다른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습니다. 모래밭은 온통 붉을 대로 붉어졌습니다.-91쪽

지렁이

시멘트 길 위에서
어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지렁이 몇 마리가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고
뜨거운 햇살에
몸이 타고 있다.

나도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저럴 거라는 생각에
징그러운 줄 모르고
길가 풀숲
촉촉한 흙 위로
가만히 옮겨 주었다.
-98쪽

다모

네 이름 뜻을 누가 묻거든
뜻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하렴.

다모야!

세상에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을 만나서도 첫 느낌을
늘 기억해라.-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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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래...사람들이 고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는 점은 기특하지만..
어쩌면, 고래가 고래답게 죽어야 하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인간들이 고래의
'성스러운 마지막'을 지저분하게 망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래는...늙어서 바다 깊은 곳에서 죽기도 하거든요.
굳이 태양 아래 누워 죽고 싶었던 것은, 그 고래만의 특별한 뜻이 담겨 있지는 않았는지.
단순한 동정으로, 인간의 무지함으로 고래는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한건 아닌지 살짝 안타깝군요...^^;
(그냥, 제 생각이었습니다)

지렁이 말이에요.
저도 옮겨준답니다. 남들이 밟아 죽일까봐. 태양에 타 죽을까봐.
다른 곤충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저렇게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좋은 글들입니다.^^

마노아 2007-09-14 19:14   좋아요 0 | URL
저도 고래의 진심이 궁금해서 옮겨보았어요. 고래의 생각도 아니고 갈매기의 생각도 아니라고 미리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저자도 저 의견을 낸 사람의 생각에 동조하지 못했음이 아닐까 싶어요.
모든 안락사를 같은 기준으로 보기 어렵지만, 어쩐지 저 고래의 이야기에선 고래의 성스러운 의식을 망친, 눈치없는 인간들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좀 어려웠어요. 지렁이도 곤충도 모두 소중히 대해주는 멋진 엘신님, 그 따스한 마음씨가 참 예뻐요~

승주나무 2007-09-14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개미 안 밟으려고 발목 돌리다가 삐끗했어요.
친구가 '왜 발목 삐었니?' 하고 물으면
'개미 피하려다 그랬다'라고 얘기하지 못하고 냉가슴만 삭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저나 지렁이 일은 참 안타깝게 됐습니다~

마노아 2007-09-15 08:59   좋아요 0 | URL
지렁이도 개미도 보는 순간 도망가는 저는 부끄럽군요..;;;;;
개미는 한마리 있으면 도망갈 정도는 아니지만 엄청시레 모여있으면 무서웠어요.
지렁이는 수년 간 보지 못했네요. 너무 자연과 먼 삶을 살고 있나봐요...

2007-09-14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9-14 19:15   좋아요 0 | URL
일요일이군요. 저는 3시 이후에 움직일 수 있답니다. 괜찮죠? 네시쯤 만나는 것^^;;;
숫자는 저도 마음에 들어요. 9월 23일. 발음이 예뻐요. 이번엔 어디서 볼까요?
체스, 이번에 둘까요? ^^

2007-09-17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9-17 18:55   좋아요 0 | URL
그때 실패(?)했던 민들레 영토는 어때요? 이번엔 어디쯤에서 만날까요? ^^

승주나무 2007-09-14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동시를 봤더니 마음이 한결 맑아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7-09-15 09:00   좋아요 0 | URL
동시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저도 읽으면서 참 좋았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