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가 100년 넘게 보존되는 비결은? [제 647 호/2007-08-29]
 

“색이 이렇게 바래 버렸네…”
오래간만에 책장 정리를 하던 A씨는 낡은 토익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대학가에 영어 열풍이 몰아치던 1996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들인 문제집 중 하나가 눈에 띈 것이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누렇게 변한 교재를 만지작거리며 A씨는 신입생 시절의 추억으로 빠져든다. 순간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만든 지 겨우 10년이 지난 책이 이 정도인데 고려나 조선시대의 서적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있는 거지?”

문자를 사용하려면 그것을 ‘기록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처음에는 파피루스, 대나무, 비단, 짐승의 뼈를 썼다. 그러나 가장 편리했던 건 역시 종이였다. 글씨가 잘 써지는 데다 운반이 쉽고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었다. 현재의 노하우를 미래로 전달하는 수단인 종이는 ‘문명 발전의 기관차’가 됐다. 그런데 이 같은 종이가 현대에 들어 품질 저하의 수렁에 빠졌다. 왜 만든 지 10년 밖에 안 된 토익 책이 수백 년이 지난 조선왕조실록보다 삭아 버렸을까. 우리나라 고문서를 구성하는 한지의 특성을 짚으며 그 이유를 알아보자.

먼저 눈에 띄는 건 한지의 견고한 섬유 구조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의 섬유는 길이가 균등한 데다 서로 간의 폭도 매우 좁다. 게다가 섬유의 방향도 직각으로 교차한다. 그물 같은 구조를 띠고 있어 충격에 강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는 한지를 여러 겹 붙여 화살을 막아내는 방탄복을 만들었을 정도다. 생활용품이던 한지가 방탄복의 재료였다는 점은 놀라운 대목이다.

닥나무의 섬유 길이가 유난히 긴 것도 강점이다. 닥나무의 섬유 길이는 10mm 수준이지만 화학 펄프의 원료인 전나무와 소나무는 3mm,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는 1mm 밖에 안 된다. 닥나무 섬유가 나무젓가락이라면 화학 펄프의 재료가 되는 나무의 섬유는 이쑤시개인 셈이다. 얇은 철근이 들어간 콘크리트의 안정성이 취약한 것처럼 짧은 섬유를 쓴 ‘펄프 종이’는 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지가 중성을 띠는 것도 강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종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가 산성에 상당히 취약한 반면 중성에서는 별 다른 변형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나오는 종이는 대부분 pH5 정도의 산성이다. 대부분 몇 년 지나지 않아 빛이 바래며 표면이 푸석푸석해지는 ‘산가수분해’를 일으켜 100년 뒤 아예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이에 비하면 한지로 만든 고문서는 ‘영생불멸’의 축복을 받은 셈이다.

한지가 중성을 띠는 이유는 제조공정에서 산성 약품을 전혀 안 쓰기 때문이다. 원료인 닥나무 껍질을 잿물에 넣어 4~5시간 푹 삶고 나면 pH9.5 정도의 알칼리성을 띤다. 이를 고루 펴 물에 띄우는 과정에서 아욱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인 ‘닥풀’을 섞어 pH7.89의 중성으로 정확히 맞춘다는 얘기다. 화학 처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산성을 띠게 되는 현대 종이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한지에 식물섬유를 구성하는 ‘리그닌’이라는 물질이 적당량 섞여 있는 것도 주목된다. 리그닌은 방충효과를 높이지만 섬유를 딱딱하게 만든다. 게다가 화학적으로 불안정해 수분이나 자외선과 반응, 종이를 누렇게 만들기도 한다. 전통 한지는 11월과 12월에 자른 1년생 닥나무를 쓰는 데 여기엔 리그닌이 가장 이상적인 수준으로 함유돼 있다. 이에 비해 다양한 목재를 쓰는 화학 펄프에는 리그닌 성분이 상대적으로 많아 종이 색을 누렇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한지는 화학 펄프를 재료로 한 현대 종이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품질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다. 새하얀 A4 용지보다 한지가 질 낮은 종이라는 선입견이 우선 꼽힌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원인은 현대식 제지공정으로 소화하기엔 한지가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현대 제지공정을 활용하면서도 한지의 명맥을 이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장기 보존이 필요한 공식 문서나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데 한지를 활용해 ‘수요’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신발, 그릇, 심지어 휴대용 요강에까지 한지를 광범위하게 썼다. 인사동에서만 볼 수 있는 관광 상품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 든 한지를 기대해 볼 일이다. (글 : 이정호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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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8-2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책을 모아서 나름 서재를 만드는 게 먼 훗날의 꿈이건만, 지금 소장하는 책들이 십년 지나면 누렇게 변하고 몇 십 년 지나면 아예 바스라져서 못 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덜컹 걱정이 들었다. 기를 쓰고 이고 지고 가는 이 책들이 갑자기 허무해진다. ㅠ.ㅠ

비로그인 2007-08-29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좋은 정보로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수집하는 책들이 반영구적으로 보관될 것 같았는데..
그렇게 수명이 짧다니. 그래서 더더욱 책 보관에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그나저나 한지가 방탄복으로도 제조가 되었다니 놀라운 사실이군요.
어찌보면, 과거의 조상들의 지혜가 현대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 정말로 한지를 유용하게 개발하면 좋겠어요.
흐음. 와인데이에 제가 나눠드렸던 한지 편지지가 생각이 나는군요. 다행입니다.
그것은 오래갈 것 같아서.(웃음)

마노아 2007-08-29 21:14   좋아요 0 | URL
어느 회사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도 바른손 같아요. '자작나무'로 만든 백년을 가는 공책~이란 문구로 선전했거든요. 표면도 매끄럽고 해서 정말 백년 가는 줄 알았죠. 지금 보니 '구라'군요^^ㅋ
한지는 숨쉬는 종이잖아요. 정말 조상들의 지혜는 못 쫓아간다니까요. 하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도 박정희 때 개보수했다가 오히려 습기가 차서 망했죠.ㅡ_ㅡ;;;
엘신님이 쓴 편지지는 선견지명의 정수군요. ^^

비로그인 2007-08-29 21:51   좋아요 0 | URL
푸하하핫. '지금 보니 구라군요'...라니. 그렇게 순수한 마노님 입에서.ㅋㅋ
에이~ 제가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겠습니까. 단지 붓펜을 쓰고 싶어서 고른 것이라는..킥.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어요.^^

마노아 2007-08-29 22:1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서 가끔 외모(?)를 이용한 개그를 쓰곤 하지요. 수업 시간에 일부러 엄한 말을 쓰면 애들이 너무 좋아해요. 아... 비교육적이다^^ㅋㅋㅋ
붓펜 원츄~ 다음엔 원하는 글을 써달라고 종이를 내밀어야겠어요.
기왕이면 한지로^^;;;

비로그인 2007-08-30 00:11   좋아요 0 | URL
아하핫. 아이들이 정말 재밌어하겠는데요.^^
한지 위의 붓펜글씨...얼마든지 오케이입니다.(웃음)

마노아 2007-08-30 01:59   좋아요 0 | URL
사실, 별거 아닌 얘기에도 좀 뜻밖인지 웃더라구요^^ㅎㅎㅎ
다음에 우리 만남의 준비물 추가예요. 한지랑 붓펜이요^^

순오기 2007-08-30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지의 영생불멸 강추!!
님, 책도 사람이 사는 공간에 같이 있어야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책을 둘 데가 없어 옥상에 있는 방을 서가로 꾸몄는데, 더웠다 추웠다 제멋대로니까 완전히 누렇게 변해서 도저히 볼 수가 없더군요. 필요에 따라 거실에 꽃혀있던 녀석들 빼고는 눈물을 머금고 다 버렸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옥상방은 빈 책꽂이(앵글로 만든)만 있지요. 넘쳐나도 절대 안, 못 올려보냅니다~ㅠㅠ

마노아 2007-08-30 02:00   좋아요 0 | URL
와, 그렇군요. 마치 초가같아요. 우리 전통 초가는 사람이 살지 않으면 무너진다고 하잖아요.
책도 그렇게 살아 숨쉬는군요. 저도 박스에 넣어서 못 꺼내고 방치한 책들이 꽤 많은데 거의 십년 세월이라 어찌 되었는지... 갸들 중에는 비닐 랩핑도 못 뜯은 게 많은데... 크흑...ㅠ.ㅠ